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HOME 주제 역사 미군정기의 정치... 반탁운동과 단정... 여주지역의 반탁... 여주지역의 제1...

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여주지역의 제1차 반탁운동

당시 여주도 중앙 정세의 변화에 따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와 관련하여 좌·우익이 확연히 갈라져서 적대적으로 대립하였다. 여주에서 반탁운동을 주도했던 우익의 본산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여주지부였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1946년 초 반탁운동의 전개 속에서 김구 등 임정세력과 이승만 세력이 자신의 세력하에 있던 ‘반탁총동원위원회’와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선전통 본부를 통합시켜 대중적 기반을 마련하는 가운데 1946년 2월 8일 결성된 우익중심의 조직체였다.1)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3월 말까지 남한 각 도내의 부군지부(府郡支部) 조직의 완료, 4월 초 ‘전국대의원대회’의 개최를 목표로 각 지역에 임원을 파견하였고, 파견된 임원들은 각 도의 부군(府郡)에 이미 결성되어 있던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지부의 간부를 중심으로 지부를 조직하였다. 1946년 5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여주지부장으로 한민당의 원용한이 선임된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지부가 결성된 것으로 보이며, 대체로 조용택 등 한민당 계열과 전 여주치안유지단 간부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당시 ‘독립전취국민대회’를 개최하면서 반탁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이는 한편, 본격적인 대중동원을 통한 대좌익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갔다. 여주지부의 구성원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면·이장 등 관공서의 관리, 의사와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 또는 지방의 금융조합이나 교육기관 종사자, 목사 등이었으며, 연령별로는 3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을 중심으로 40대가 가장 많은 분포를 보였다. 이처럼 여주지부를 조직하고 운영해나갔던 인물들은 대체로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과 의사나 목사, 또는 금융조합 임원이나 학교 후원회의 회원 등 지방정치의 헤게모니를 가질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지방 유지들이었다. 경제적으로도 지주인 경우도 있었지만 1차적으로는 토지 이외의 주수입원을 가진 자산가(資産家) 계급이었다. 여주의 지부 또한 이와 크게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2)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약칭 미소공위)가 열리면서 반탁운동은 초기와 달리 기세가 많이 꺽였다. 그리고 미소공위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 등 3상회의 결정안의 지지운동이 중간파계열이나 좌파계열을 중심으로 세를 얻어갔다. 1946년 인민공화국과 조선공산당 등 좌익계열의 세력은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을 결성하였는데, 여주에서도 성기원, 이승식, 이남수, 이동호, 권병덕, 최영래 등 군내 인민위원회와 여운형 계열, 그리고 전농 조직 등이 민전 지부를 결성한 후 반탁운동을 주도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여주지부에 대항하면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에 대한 지지와 미소공위 재개최 촉구운동을 벌였다. 좌파세력이 활발했던 금사면은 박광일 등이 참가한 인민위원회의 주도하에 이포리 장터에서 이포초등학교까지 20~30여 명이 행진하면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안 지지와 미소공위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3)

그러나 1946년 5월 ‘조선인 협의대상 선정’의 문제를 둘러싸고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상반기내내 우익진영의 거물급인 이승만, 김구 등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반공선전에 열을 올리고 한민당과 한독당 등 우익 정당들도 지방유세대를 파견하는 등 본격적인 공세를 취하자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여주지부 등 좌익진영은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실제로 1946년 중반이 되면 경기도에서 인민위원회에 대한 미군정의 보고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는데, 이는 당시 여주군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좌익계열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음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4)

맨 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