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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여주의 세력동향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마침내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우리 민족의 해방은 일제강점기 동안 줄기차게 전개된 민족해방 투쟁의 흐름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라는 결정적인 계기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것이었다. 이후 미·소 양군의 남북한 분할점령 상태가 계속되면서 해방이 곧 자주 독립국가의 건설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들의 지향은 식민지적 지배구조와 낡은 봉건적 유산들을 타파하고 자주적이고도 민주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최초의 움직임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였다. 한 자료에 따르면 건준은 같은 해 8월 31일에 이미 전국적으로 145개의 지부를 거느릴 정도로 확산되어갔다. 이는 해방 2주일 만의 통계로 건국의 움직임은 전국으로 확산되어나갔음을 알 수 있다.1)

해방 직후 여주에서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자생적으로 건준지부가 창설되었으며, 위원장에 성기원이 선출되었다. 또 여주중앙교회 등의 목사를 역임하면서 일제말기 총독부 종교정책에 부응하는 혁신안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최영래를 비롯하여 김영석(金永錫), 이응식, 이남수(李南洙), 이동호(李東浩), 권병덕(權秉德) 등이 참여하였다.2) 특히 해방 직전 양평지역을 기반으로 한 여운형의 지하조직체인 ‘건국동맹’의 세포 조직체가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를 중심으로 최영창, 권병덕 등이 주도하여 활동했던 상황에서 인근 양평지역과의 연계 속에서 이들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이를 주도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3) 이들은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정세하에서 근대 민족국가 수립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당면과제인 일제의 잔재 청산과 봉건적인 지주소작제의 철폐 등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곧바로 여주경찰서를 점거하여 일본인 경찰서장 및 일본인 경관들을 무장해제시키면서 치안권을 확보하고 여주군청 등 행정권 장악에 나섰다.

그러나 여주경찰서의 무혈 점거 직후, 수원에서 1개 소대가 출동하여 이를 주동했던 이응식, 권병덕 등을 체포하려는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곧이어 진주한 미군정의 1개 소대가 여주군청에 진주하면서 일제 통치기구 및 친일인사들의 잔존과 협조를 통해 행정권과 치안권을 장악하자 건준지부는 치안권과 행정권의 획득 시도는 사실상 좌절되었다. 10월경 미군정이 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탄압하자 여주 건준지부는 인민위원회로 전환하였다.4) 여주군 인민위원회는 그 구성원과 활동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으나 위원장 오혜수를 비롯하여 10월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각 대표자회에 참석한 김영석, 1945년 12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대회에 여주군 대표로 참석하였던 이남수, 이동호, 권병덕, 최영래 등의 핵심인물로 구성되었다.

또한 인민위원회는 여주의 10개 읍면에서 모두 창설된 것으로 파악된다.5) 김윤선의 「여주소사(驪州小史)」에 의하면 당시 10개 읍·면장 중 4~5인 정도가 좌파계열로 지목된 실정이었다. 다만 구체적인 조직구성과 활동상을 확인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좌파계열의 활동이 활발했던 금사면 인민위원회의 경우, 이희동과 박광일 등이 활동하였다고 한다. 특히 금사면 외평리와 송현리의 경우 ‘여주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좌파계열의 활동이 활발했는데, 송현리의 박승룡은 중앙에 진출하여 활동할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일제말기 금사면을 중심으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에 참여하였던 박수창, 지옥성 등도 당시 중앙에서 주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6)

우익계열의 경우, 일제말기 ‘여우회(여주의 기관장·민간 유지 친목회)’에 참석하였던 여주읍내 유지급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여주치안유지단’을 창설하였으며, 단장에 구종태, 치안대장에 오덕섭 등이 선출되었다. 여주치안유지단은 해방 직후 건준지부의 적극적인 활동과는 달리, 단체의 성격상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익계열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미군정 정책을 펴나간 보드만 군정관의 부임과 그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서 여주치안유지단은 군청과 경찰서 등 여주의 행정권과 치안권을 주도적으로 장악해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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