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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말기 여주지역의 세력동향

일제말기 여주지역의 세력동향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여주의 사회경제적 측면과 사회운동이나 농민운동 등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시기 여주의 세력동향과 활동은 기본적으로 이런 배경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여주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살펴보면 첫번째 지역적 특성으로 인구의 83.8%가 농업에 종사하면서 상공업은 7.7%에 불과한 전형적인 농업지역이었다는 점이다.1) 이렇듯 전형적인 농업지대라는 특성 위에서 여주는 지주소작제가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다. 지주소작제의 문제는 일제가 조선의 농업원료지대화로 추진하면서 1920년대부터 심각한 모순을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1929년 세계대공황을 겪으면서 조선의 식민지 지주소작제는 폭발 일보 직전까지 치달았으며, 그 결과 이를 타개하기 위한 조선총독부의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에도 불구하고 조선 곳곳에서 ‘소작쟁의’와 ‘적색농민조합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서울의 인근지역인 여주는 일제가 주도한 농업 정책의 주된 대상지로 지주소작제의 모순이 첨예하게 나타났던 지역이다.

여주의 대지주 존재양상을 살펴보면 대체로 100~500정보의 소수 거대지주(巨大地主) 혹은 초거대지주(超巨大地主)를 중심으로 발달한 것이 아니라 약 50정보의 다수 중소지주(中小地主)를 중심으로 발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다수 중소지주의 존재는 다수의 소작농(小作農)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1930년을 전후한 여주의 농업 경영실태를 살펴보면 경영형태별 수치의 경우 자작농 4.7% 자작 겸 소작농 29.3%, 소작농 66%였다. 자작농 4.7%를 제외하고는 농민의 대부분이 자작 겸 소작농이거나 순수 소작농이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지주소작제의 모순이 심각하여 농민층 몰락의 현상이 크게 심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여주의 소작농은 보통 3명의 중소지주에게서 약 1.5정보를 차경(借耕)하고 있었으며, 소작기간의 경우도 부정기 소작비율이 94%에 이르러 소작농이 극히 불리한 조건에 있었다.2)

이러한 사회경제적 배경은 직접적으로 일제말기 여주의 세력동향과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즉, 다수 중소지주들의 존재와 대다수 소작농의 존재는 여주에서 사회운동이나 농민운동 등의 활발한 활동이 저지되는 가운데, 우익세력이 강고한 반면 중도세력이나 좌익세력은 약하게 하였다.

여주의 청년운동은 1920년대부터 비교적 활발하였으나 1930년대를 거쳐 일제말기로 나아가면서 그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여주의 청년운동은 지역사회가 크게 여주읍과 금사면의 이포지역을 중심으로 나누어 활동하였던 것을 반영하여 두 지역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나타났다. 1922년 6월 23일 여주금융조합에서 창립총회를 통해 창설된 ‘여주청년회’는 지(智)·덕(德)·체(體)와 같은 조직체계로 보아 계몽적이고 교육적인 활동에 역점을 두었다. 김봉호(金鳳昊) 등을 회장으로 한 여주청년회는 1924년 청년운동의 통일체로서 조직된 ‘조선청년총동맹’에 가입하여 계급의식을 고취하고 여러 부문의 운동에 참가하는 등 일제시기 민족 해방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다.3)

1927년 금사면에 박원식(朴元植)을 회장으로 한 ‘이포청년회’가 창설되었으나 그 구체적인 구성원이나 단체의 성격은 파악할 수가 없다. 그러나 1928년 3월 여주내 각 단체의 일원화를 목적으로 ‘연맹조직대회’의 개최 결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유사한 성격의 단체로 여겨진다.4) 그러나 1920년대 여주의 청년운동이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것에 비해 1930년대 초중반 만주사변(滿州事變)과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그 활동양상은 자료상으로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되었다.

1920년대의 농민운동은 구체적 활동상은 확인할 수 없으나 1927년 점동면 청안리(淸安里)에서 유상기(劉相基)를 회장으로 하는 ‘농우회(農友會)’와 1928년 ‘우강농민회’ 그리고 1928년 강천면 간매리(看梅里)와 능서면 매화리(梅花里)에서 각각 ‘근농공제조합’의 창립을 확인할 수 있다.5) 일제말기 여주의 농민운동은 이러한 1920년대 농민운동의 흐름 속에서 1930년 말~1931년 초에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 일어났으며, 소작료 인하와 소작기간 보장을 요구하는 소작쟁의도 해마다 수십 건씩 발생하고 있었다.6)

본격적인 여주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1930년 3월 귀향한 엄주언(嚴柱彦)에 의해서 지도되었다. 그는 귀향 후 향리에서 동네 청년 최영창(崔永昌), 박수창(朴壽昌), 지옥성(池玉成) 등과 1930년 12월경 금사면 외평리(外坪里)에서 농민 야학(夜學)을 개설하였으며, 1930년 10월경에는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개시하기 위한 준비 모임을 갖기도 하였다. 이들은 준비 모임에서 “여주에는 일반의 의식이 지극히 저급하여 바로 적색농민조합(赤色農民組合)을 조직하는 것은 곤란하므로, 먼저 협동조합을 조직하고 이것을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기초로 하여 그 내부에서 빈농계급을 좌익적으로 지도하여 내부의 우량분자를 획득하는 방법으로 혁명적 농민조합을 조직”할 것을 협의·결정한 뒤에 1931년 1월 ‘협동조합’을 조직하였다.

다른 한편, 여주의 활동가들은 양평지역 활동가들과의 연대를 통해서 활동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1931년 10월에 결성된 ‘양평여주대표자회’는 이러한 과정에서 조직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준비조직 혹은 ‘지역전위 정치조직’이었다. 이러한 활동과정에서 이들은 1932년 10월 ‘혁명적 농민운동 지도부’를 결성하였으며, 또 금사면 금사리(金沙里) 지역에 새로운 계를 조직하였다. 송현리(松峴里) 지역에서는 기존의 계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곧이어 검거되고 말았다.7)

한편 1930년대 소작쟁의 발생현황을 보면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까지 활발하게 일어났으나, 1930년대 전반기에 정체되었다가 1935년부터 급격히 증가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여주군내 소작쟁의의 배경과 인적 구성, 그리고 그 성격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대체적으로 소작료 인하와 소작기간 보장 등을 요구하는 수준이었다.

요컨대 일제말기 여주의 세력동향은 지주소작제가 발달되었던 사회경제적 배경하에서 다수 중소지주들의 존재와 이에 크게 위축된 대다수 소작농의 존재 등으로 활발한 농민운동은 일어나기 어려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가운데 우익세력이 상대적으로 강고한 지역적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1930년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등 전시체제를 거치며 강화된 조선총독부의 물리적 탄압 속에서 중도계열이나 좌파계열의 사회운동이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 등 높은 수준의 농민운동은 1920년대의 비교적 활발한 활동에도 크게 위축되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중도세력이나 좌익세력이 미약한 토대 위에서 우익세력이 주도하는 흐름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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