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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8·15해방을 전후한 여주지역의 동향

앞에서 윤석중의 시와 여연구의 회고에서 잘 보이듯이 여주지역도 당시 8·15해방의 역사적인 날을 ‘광기’ 속에서 맞이하였다. 여주에서 보국대(報國隊)로 강제 징용돼 일본에 끌려갔다가 해방을 맞아 돌아온 여주주민의 가족에 의해 지어져 자주 불린 다음의 ‘해방노래’는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1)

해방노래
일본 보국대 가신 낭군은
영원히 올 줄을 몰랐드니
일천구백사십오년에
조선이 해방이 되었구나.
연락선을 집어 타구서
부산시내를 썩 들어시니
하루에는 서기가 돌고
사꾸라 꽃은 낙화가 지구
무궁화 강산이 되었구나.
문전 문전이 태극기 달고
골목 골목 만세 소리
삼천만 동포가 다 모였네.
얼시구나 지화자 좋네
아니노지는 못하리라.

당시를 묘사한 한 회상기에 의하면 여주에서는 8월 14일 라디오 방송에 내일의 중대 발표가 예보되자 몇몇 군민들은 이마를 맞대고 궁금증에 가슴을 조였으며, 8월 15일 정오 뉴스시간에 잘 들리지 않는 일본 히로히토 천왕의 녹음 방송을 듣고 어렴풋이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청천벽력 같은 기쁜 소식’에도 8월 15일 그날의 분위기는 예전과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거리에서 일본인 경찰들을 만나도 서먹서먹하게 눈치만 볼 뿐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고, 다만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뿐이었다. 그러한 상황이 지나고 서울의 해방 소식이 물밀듯이 전해지면서 여주도 해방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2)

서울에서 건준이 창설된 후 8월 말까지 자연발생적으로 전국에 145개의 건준지부가 설치될 만큼 전국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여주에서도 해방 직후 성기원을 위원장으로 이응식, 권병덕 등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건준 여주지부가 창설되었다. 여주 건준지부는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정세하에서 ‘독립국가’ 수립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식민통치기의 사회모순인 일제 잔재청산과 식민지적·봉건적 경제구조인 지주소작제의 토지문제 해결에 나섰다. 이들은 새로운 정세하에서 여주사회를 변혁하자는 취지에 공감하는 젊은 청년들과 여주사회의 일본인과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해 우선 여주경찰서를 무혈 점거하는 등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이들은 일본인 경찰서장과 그 이하 일본인 경관들을 무장해제하고 유치장에 감금하는 등 여주의 치안을 확보하면서 여주군청 등 행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한편 해방 직후 움츠렸던 지주·목사 등 우익계 여주의 유지 세력들은 변화된 정세하에서 여주사회의 변혁을 지향한 여주 건준지부 및 이에 동조하는 젊은 청년들에 맞서 자신들의 주도권하에서 치안 및 행정권의 장악을 위해 ‘미도리식당’에서 모임을 갖고 구종태와 오덕섭을 단장과 치안대장으로 하는 ‘여주치안유지단’이란 단체를 창설하였다.

8·15해방 직후 35년간 압박당하던 울분의 폭발, 자식과 남편을 강제 징용으로 죽음의 길로 보낸 유가족들, 피땀 흘려 거둔 곡식을 강제로 공출이란 미명 아래 빼앗겨 초근목피로 연명하여 얼굴에 부황이 생긴 농민들이 여주 읍내로 쏟아져 나와 농악대를 선두로 읍내 일원에 걸쳐 데모 행진을 하는 등 여주 일대는 뒤늦게 해방 천지로 변하였다. 농민들은 여주 건준지부와 함께 양조장을 위시하여 조선인 형사를 비롯한 군청 상업과 노무동원 등 일제에 두드러지게 협력한 친일 인사들의 집을 습격하고 징과 꽹과리를 울리며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당시 여주군청에서는 피신하라는 군수의 지시에 직원들은 우리가 왜 피신을 해야 하냐며 이를 묵살하고 군청 정문으로 나가 데모대가 지나가는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때 데모에 참여했던 농민들은 군수를 보고 일시에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으나 군수는 급히 피신했다. 결국 추적 끝에 붙잡힌 군수는 농민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했으나, 금융조합 이사 곽종석과 치안유지단장 구종태를 비롯한 우익계열의 유지급 인사들이 나서서 냉정을 호소하자 사태는 진정되었다.3)

당시 중앙의 조선총독부는 소련군이 38도선 이북만을 점령하고 이남은 미군이 점령할 것이 확실해지자 하루 만에 건준으로의 행정권 이양을 거부하고 나섰다. 그리고 나서 “민심을 교란하고 치안을 해치는 일이 있으면 일본군은 단호한 조치를 취할 방침이다.”라는 포고령을 내리고, 일본군인 3,000 명을 동원해 특별경찰대를 조직하고 건준이 접수한 경찰서·방송국 등을 다시 빼앗아버렸다.4) 이런 상황에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일본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수원으로 급히 구원요청을 하자 수원에서 경동 출신의 일본인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 일개 소대가 여주로 파견되었다. 그날 밤 이 소식이 여주 일대에 알려지자 읍내에 별의별 유언비어가 덧붙여지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른 새벽에 교외로 피난 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여주경찰서를 점거하고 일본인 서장 등을 체포했던 건준지부 등 젊은 청년들은 대피하였고, 반면 여주치안유지단은 이에 대한 긴급대책을 세우는 등 적극적인 활동에 나섰다.

당시 일본군 일개 소대는 기관포를 선두에 내세우며 여주경찰서에 도착하였고, 일본인 서장을 비롯하여 감금된 일본인들을 방면하였다. 그리고 나서 사태 해결을 모색하는 여주치안유지단과 향후대책을 논의하였다. 초기 일본인 경찰서장을 비롯하여 일본군 소대장은 엄포를 놓으면서 강경하게 나왔으나 최후의 타협안으로 여주경찰서를 점거하고 자신들을 무장해제시킨 후 감금하였던 이응식 등 주모자를 일본군에게 넘겨주고, 여주 읍민에게 할말이 있으니 읍민들을 군청 앞 광장에 모아달라는 요구를 하는 것으로 일단락짓게 되었다.5)

여주건준 지부 등 중도계열·좌파계열의 세력들이 피신한 상황에서 여주치안유지단은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여 바로 군청 군수실을 사용하면서 각 읍면의 하부 조직체와 유기적인 유대 확립에 주력하였다. 또한 그 산하 치안대는 경찰서 청사를 사용하면서 관내의 치안유지에 힘쓰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좌우익의 세력관계를 반영한 커다란 갈등과 논쟁이 있었다. 이것은 바로 당시 건준의 면단위 조직의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는 점동면 자치대 대표 권오돈과 여주치안유지단 단장 구종태와의 논쟁이었다.

당시 권오돈은 여주의 치안과 행정권을 관할하는 단체의 구성은 하부에서부터 조직하여 상향식으로 진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여주군의 인사를 망라하지 않은 일부 여주 읍내 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여주치안유지단은 허수아비 격으로 각 읍면에 명령을 하달할 수 없으므로 여주치안유지대의 지시에 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구종태 치안유지단 단장은 모든 조직체를 ‘부인’하는가를 물으면서 논쟁이 비약되었고, 나중에는 점동면 권오돈 대표는 ‘아나키스트’로 몰려 단장의 즉결 판결인 긴급구속령으로 유치장에 감금되는 사태로 발전되었다.6) 이러한 갈등은 해방이 되었으나 조선총독부가 10월까지 물리적인 세력으로 온존되는 등 완전한 해방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 여주군의 10개 읍면장 중에서 4~5인 정도가 중도나 좌익계열로 지목되어 여주 곳곳에서 일어났다.

한편, 중앙에서 인민공화국이 조직되자 각 지방에서는 이에 발맞추어 ‘지방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친일파·민족반역자를 배제하고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된 인민주권 기관이었던 인민위원회는 독자적으로 구성되기도 하였으나 대체적으로 기존의 건준 지방조직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여주에서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된 것으로 보인다. 해방정국기 금사면 면사무소에서 서기와 주사보를 역임하였던 최병두(86세)의 증언에 의하면 여주군 인민위원장으로 오혜수, 금사면 인민위원장으로 이희동(이후 박광일) 등이 확인된다.7) 그러나 구체적인 인원 구성이나 활동은 현재 알 수가 없다. 이들은 미군이 10월 중순경 여주 일대에 진주하기 전에 지하화(地下化)한 것으로 보인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에 의하면 인민위원회가 지배적인 활동을 했던 인근 지역인 양평과 이천지역과 달리 여주의 인민위원회는 지배적이지 못하였다고 한다.8) 이것은 여주가 지주·기독교 등 우익세력이 상당히 강고한 반면, 좌익세력이 미약했음을 반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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