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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응

일제시대 여주지역의 대표적인 자선사업가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민응(李敏應, 1876~1955)이다.1) 그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행(敬行), 호는 수춘(壽春)이며 돈령첨지(敦寧僉知) 도상(道相, 1838~1904)의 둘째아들이다. 그가 출생한 곳은 강원도 춘성군 남면으로, 선대부터 상당한 재력가였으며 춘천 의병장 이소응(李昭應)과 6촌간이다. 그는 1889~1894년에 걸쳐 유인석(柳麟錫)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성품이 민첩하고 외유내강형의 어진 성품을 지니고 있었으며 키가 6척 이상인 우람한 체격이었다. 1894년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학부참서(學部參書)의 벼슬을 지냈다.

이렇게 춘천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민응이 언제 어떻게 여주로 이주하였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민응의 선조는 대부분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 하남으로 옮겨 세거하였고 그 일파가 춘천 남면에 이거하였는데, 이민응이 여주로 이사하기 전부터 여주·이천에는 그의 친척이 세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2) 그런 인연 외에, 명당 자리를 찾고 있던 이민응은 여주 흥천면 외사리 원적산 줄기 옥녀봉 밑이 천하명당 금반형(金盤形)이라는 지관들의 말을 믿고 여주 흥천면 외사리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그 시기는 1894년에 과거에 합격한 뒤 대한제국기에 관직에 있었던 점, 합병이 되자 시골로 내려갔다는 신문기사,3) 1920년에 이미 여주에서 재단법인 선린회(善隣會)를 발족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1910년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주로 이주하기 전 춘천 수동리에서 연간 3,000석을 수확하는 대지주였던 이민응은 여주로 이주한 뒤에도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이천과 여주 일대에 연간 7,000~8,000석을 수확하는 방대한 농경지를 소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멀리 제천·청주·양평 등지에도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같은 막대한 부를 소유한 이민응은 자신의 재산을 호의호식하는 데 쓰지 않았다. 그는 부호였지만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희사해 공익사업을 펼치는 일에 앞장을 섰다.

먼저 이민응은 1920년 3월에 현금 33,750원을 출자하여4) 현 이천시 백사면 현방리(현 우체국 자리)에 재단법인 선린회(善隣會)를 설립하였는데, 임원진은 이사장에 이민응, 이사에 임세순(任世淳)·이윤용(李允鎔), 감사에 지규택(池圭澤), 사무장에 최선용(崔善鎔) 등이었다. 선린회는 식산주식회사 등 금융사업을 하는 한편, 빈민구제사업과 육영사업, 농촌개량사업 등의 자선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 같은 사업은 선린회 차원 외에 이민응 개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빈민구제사업으로는 춘궁기에 곡식을 배급하고, 곡물 10말에 연리 2말의 저리로 받아서 1말은 원자산 손실에 충당하고 1말은 빈민구제사업에 충당하였다. 구제된 빈민은 1931년까지 모두 519명이나 되었다.5) 1936~1937년에 걸친 대기근 때는 기아농민 200여 명을 1개월간 집에서 보살폈다. 가난한 농가에는 농토를 나누어주고 소작료를 연기 또는 면제하기도 하였으며 끼니를 굶는 사람이 있으면 쌀을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육영사업으로는 효자·효부를 장려하는 뜻에서 양돈과 양잠 등 영농지원과 함께 자녀들의 학비를 제공하였다. 1943년에는 여주읍에 기동학원(畿東學園)을 설립하였는데, 이는 여주여자중종합고등학교(현재 여주여자중학교와 세종고등학교로 분리)로 발전하는 모태가 되었다. 1946년 이후로는 성균관 육성과 성균관대학교 재단의 창설과 함께 선린회 재산을 기부하여, 성균관재단 이사를 역임하면서 유림과 사학발전을 위해 일하기도 하였다.

농촌개량사업으로는 빈민들을 대상으로 양돈·양잠을 적극 육성하는 한편, 지역 농촌개발을 위해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농도강습소(農導講習所)를 개설한 뒤 농업기술 보급을 꾀하였다. 또한 이민응은 권농사(勸農社)를 자신이 사는 마을(흥천면 외사리)에 조직하고 현금 3,000원과 벼 170석을 출자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20원씩을 연 7분으로 대여하여 고리대금을 근절시키는 한편, 소작료도 매우 저렴한 2할만 징수하였다. 그리고 농가 소득을 높이기 위해 잠업강습소(蠶業講習所)를 설립하여 경비를 부담하고 잠업 교육을 시키었다.6)

그 밖에 이민응은 1922년에 자신이 사는 흥천면사무소 건축비로 3,000여 원을 단독 부담하여 면사무소를 신축해 기부하였다.7) 1926년에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잠입한 이수흥(李壽興) 의사가 당시 선린회 이사장으로 있던 이민응을 찾아가 군자금을 요구한 사실이 있으며, 그 때문에 이민응은 1926년 11월 21일 자신의 집에서 사법경찰의 신문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이민응은 1926년 초에 일본으로 몰래 팔려나가는 『화동강목(華東綱目)』 목판을 거금을 들여 회수한 일이 있었는데, 그 덕택에 『화동강목』은 현재 충북 제천시에 있는 자양영당에 보존될 수 있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철도사업에도 투자를 했다. 현 여주시 홍문동 74-2 여주시민회관 자리가 옛 수려선(水驢線) 종착역인 여주역 자리인데, 이민응은 1931년 12월 1일 영업을 개시한 이천~여주간 철도공사에 투자했다고 한다.

그 뒤 이민응은 만주로 건너가 사업에 투자하였다. 그는 1만여 원을 투자해 대련·봉천·무순 등지에 남만공사(南滿公司)를 설립하고 정미업에 투자하였는데, 그것은 재만동포를 위한 일이었다.8) 그 같은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된 것은 1931년 6월이므로, 그가 만주로 건너간 시기는 1930~1931년 무렵이었다. 만주에서의 사업은 사업환경의 변화, 일제의 감시, 마적과 불량배의 횡포 등으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민응은 1935년에 그의 친구인 개성 출신 공진학(孔鎭學)의 주선으로 개성으로 이주하였다. 개성 운학정(雲鶴町)에 거처를 마련한 그는 문방구점을 차렸다. 그러나 그것 역시 지역주민의 텃세에 밀려, 개성에서의 생활은 편안하지 못하였고 사업 역시 부진하였다. 그래서 1937년 2월 28일 개성에서 회갑을 맞이한 뒤, 1938년에 다시 여주로 귀향하였다.

1941년에는 서울 성북구(고려대학 의료원 뒤)에 집을 마련하고 여주와 서울을 오갔다. 1943년에는 강원도 홍천으로 은둔한 뒤 서당을 차려 글방공부를 가르치며 소일하였다. 해방이 되자, 그는 서울 종로 명륜동으로 거처를 옮긴 뒤 평소 교분이 두터웠던 정인보(鄭寅普)·주시경(周時經) 등과 벗하였다.

그 무렵 1946년 10월 이민응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의 친서를 받고 성균관과 성균관대학 재단법인 설립에 참여, 선린회 법인재산을 기부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백범 김구는 이민응의 집을 두 차례나 방문하여 감사의 표시를 전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해방 이후 사회육영사업에 큰 기여를 한 이민응은 불행히도 1954년 봄에 교통사고를 당해 다음해 별세하였다. 묘지는 경기도 시흥에 있다.

현재 이천 백사면 현방리 현방공원에는 재단법인 선린회기념비(善隣會紀念碑)가 세워져 있고, 흥천면 외사리 복지회관 앞에는 전학부참서이공민응기념비(前學部參書李公敏應紀念碑), 그리고 여주시 상동 영월루 공원에는 재단법인 기동보린사창립기념비(畿東保隣社創立紀念碑)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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