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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학생운동과 청년운동

개항 이후 신교육에 대한 열의가 고조되면서 전국 각지에 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하였는데, 1910년 7월 전국의 총 학교수는 관공립학교가 2,477개교, 사립학교가 2,250개교에 이르렀다.1) 그 이후에도 각종 학교가 크게 설립되고 학생수도 그에 비례하여 폭증하는 추세였다. 더욱이 1920년대 이후 여러 학생·청년단체가 활발히 결성되었을 뿐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을 이끌던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은 각기 청년단체를 세력확장의 주요한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그 때문에 1920년대 이후 학생·청년운동은 매우 활동적이었고 민족운동의 전위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그 중심세력은 보통학교 학생들이었다.

학생·청년운동은 1920년대 경기도는 물론 전국에서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던 항일운동의 한 계열이었다. 학생·청년운동은 젊고 진보적인 속성을 지닌 까닭에 선진사상을 쉽게 수용할 수 있었고, 또한 행동 면에서도 적극적이었다. 이는 3·1운동의 주도와 확산과정에서 학생·청년들이 보여준 역할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경기도지역에서의 학생·청년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활발히 일어났다. 학생운동이 주로 비밀결사와 동맹휴학 형태였다면, 청년운동은 청년회를 통한 사상활동과 야학활동, 그리고 다양한 계몽활동으로 나타났다.2)

그 같은 학생·청년운동의 양상은 여주지역에서도 나타났다. 1920~30년대 동맹휴학 형태로 활발히 전개된 학생운동은 여주지역의 경우 거의 일어나지 않았으나,3) 청년운동은 그렇지 않았다. 3·1운동 이후 경기도지방에 있었던 청년운동단체는 대체로 210개나 존재하였으며, 이들 단체는 야학회, 강연회, 토론회, 또는 체육활동, 예술·오락활동, 기타 산업을 장려하는 활동 등을 통해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고양·인천·개성·강화·수원·시흥지역에서 활발한 청년운동이 나타났는데,4) 이를 시기별로 여주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기도지역에서는 1919년 이전에 이미 구락부(俱樂部), 당(黨), 회(會) 등의 명칭을 가진 청년운동단체가 조직되어 있었는데, 3·1운동 이후에는 전지역에서 청년운동단체가 조직되었다. 특히 1923년 이후에는 종래의 계몽적인 수준에서 한발짝 더 나가 사회주의화되면서, 그 지역의 각 청년회를 연맹 또는 동맹체로 꾸려 투쟁력과 조직력을 강화하였다. 1927년에 들어와서는 청년운동이 좌우익 통일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각 부군(府郡)에는 부군청년동맹을 결성하고 각 면에는 동맹지회를 만들어 발회시켜 나갔다.

그에 따라 여주에서도 청년회가 조직되었는데, 1922년 6월 23일에는 여주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이때 선출된 임원은 회장 김봉호(金鳳昊), 총무 전은하(田殷夏), 덕육부장 이세웅(李世雄), 지육부장 류희진(柳熙晋), 체육부장 정영규(鄭永奎), 사교부장 김준옥(金駿玉) 등이었다. 이 같은 덕(德)·지(知)·체(體)와 같은 조직체계로 보아 여주청년회는 1920년대 초반 다른 청년회처럼 계몽적이고 교육적인 활동에 역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22년 7월에 여주청년회 총무였던 전은하를 회장으로 한 신청년회(新靑年會)가 조직되었다는 신문기사가 있다.5)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주청년회는 설립 직후 또 다른 조직으로 나뉘어졌다는 결론이 나온다. 전은하는 1928년 5월에 여주군 읍내에서 자본금 50원으로 10인 친목조합을 설립한 뒤 자신이 조합장으로 활동한 일도 있었다.6)

그렇지만 여주청년회는 설립 이후 단일조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한 것으로 보아, 그 같은 신문기사는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 여주청년회는 조선청년총동맹에 참가하였다. 조선청년총동맹은 청년단체들의 조직적 성장과 청년운동의 활발한 전개를 바탕으로 1924년 4월 21일 223개 단체의 대표 170명이 참석한 가운데 청년운동의 통일체로 창립되었다. 조선청년총동맹은 ‘아등은 계급적 대단결을 목표로 청년운동의 통일을 도하기 위하여’라는 「선언」과, ‘1. 대중 본위의 신사회의 건설을 기도함 2. 조선민족해방운동의 선구가 되기를 기함’이라는 「강령」을 내걸고, 청년조직에 민중적·계급적 의식을 주입시키고 노동자·농민·여성·형평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맞서 보통교육의 확대와 노동자교육의 실시 등 각 부문운동의 차원에 개입하여 활동을 벌일 것을 결정하였다. 이 같은 조선청년총동맹 창립식에는 경기도지역에서 모두 9개의 청년단체가 참가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여주청년회였다.

따라서 조선청년총동맹의 선언과 강령에서 볼 수 있듯이 여주청년회 역시 계급의식을 고취하고 여러 부문운동에 참가하여 대중교육을 활성화하고, 그를 통해 민족해방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를 위해 여주청년회는 각종 강연회를 개최하고, 토론회를 열고, 지역 내 여러 진보활동에 직간접으로 개입하여 활동하였다.

실제 여주청년회는 1925년 8월 8일 간신히 일제 경찰 당국의 허락을 얻어낸 여주 혁청단의 강연회를 적극 후원하였다. 이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지국의 후원도 있었다. 여주예배당에서 개최된 혁청단 강연회는 권오돈의 사회로 권태휘가 ‘혁청단(革淸團)의 사명’이라는 주제 강연을 하여 수백 청중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다음은 옥순철이 ‘인류평화의 서광’이란 연설을 하는 등 당일 밤 10시에 이르러서야 마쳤다.7)

또한 1926년 8월 19일 여주청년회는 여주학우회가 주최하는 음악회를 후원하여 성공리에 끝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여주학우회는 재경(在京)유학생으로 조직된 학생단체였다. 여주학우회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순종황제 승하 당시의 인산(因山) 광경(光景)을 촬영한 활동사진을 상영하고자 각 신문사에 누차 교섭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음악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여주학우회는 1926년 8월 19일 오후 9시에 여주청년회의 후원하에 여주공립보통학교 강당에서 음악회를 열어 큰 호응을 얻었다. 이때 개회사는 류인목(柳寅睦)이 맡았고 임천환(林天桓)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등 밤 12시에 가서야 음악회가 끝났다.8)

여주청년회 외에 1927년 8월에는 금사면에 이포청년회가 조직되었다. 회장은 박원식(朴元植)이 맡았는데, 12월에는 무산아동을 위해 이포공립보통학교에 노동야학을 개설하였다. 또 1927년 11월에 여주군 주내면 단현리에서는 김상기(金商綺)를 회장으로 한 신흥(新興)청년회가 조직되었는데, 회원수는 20명이었다.9)

그 밖에도 여주지역에는 다른 지역의 예로 보아 많은 청년회가 조직되어 활동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현재 알려진 것이 없다. 특히 1928년 3월 21일 여주군내 각 단체의 일원화를 목적으로 연맹조성회 구성 임시회가 개최되고 연맹조직대회 개최를 결의한 점으로 보아,10) 1920년대 말 여주지역에서는 여러 단체들이 조직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와 같이 여주지역의 여러 청년운동단체는 강연회, 토론회, 체육활동, 연예·오락활동 등을 열심히 하였다. 또한 실업을 육성하고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경제적 자립을 꾀하고자 경제적인 지식 보급에도 노력하였을 뿐 아니라, 문맹을 퇴치할 목적으로 회보나 기관지를 발행하는 활동도 하였다. 더욱이 지역발전을 위한 사업이나 부당한 사회문제에 대항하며 대처해 나가는 활동을 열심히 전개하였는데, 그 같은 활동을 열심히 한 단체로는 여주청년회를 빼놓을 수 없다.11)

끝으로 큰 범주로 보아 학생운동으로 볼 수 있는 소년운동도 여주지역에서 나타났다. 소년운동은 자라나는 소년들에게 민족정신과 인간정신을 배양하여 장차 독립의 역군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는데, 일제시대 그 같은 국내외의 한인 소년운동단체는 모두 576개로, 경성과 인천을 제외한 경기지역에 있었던 소년운동단체는 모두 121개나 조직 운영되었다.

그 중 여주지역에는 3개의 소년운동단체가 있었다. 신천지소년회와 여남소년회, 그리고 흥진소년회가 그것이다.

신천지소년회는 언제 창립되었는지 알 수 없다. 1925년 6월 25일 조직개편시 피선된 임원은 회장 김준룡, 총무 김수영, 덕육부장 이영식, 지육부장 신성룡, 체육부장 장수만, 서기 신성룡·최고라, 회계 이은형·오립경·정영규·박용환·김용준·최창엽이었다.12) 이 같은 조직체계로 보아 신천지소년회 역시 여주청년회처럼 계몽과 교육 위주의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신천지소년회는 1925년 7월 최을순 연사가 ‘신천지소년회를 향한 나의 희망’이란 강연을 하였다.13) 이 강연회 외에도 또 다른 강연회가 열리었고, 토론회와 체육회도 각각 1회씩 개최되었다.

여남소년회는 1925년 8월 1일 상동면 청안리 상동공립보통학교에서 창립되었는데,14) 다른 기록이 없어 소년회의 활동상을 알 수 없다.

흥진소년회는 1926년 6월 13일 흥천면 복대리에서 창립되었다. 회장 이윤수, 총무 이명호, 덕육부장 한승수, 지육부장 김동길, 체육부장 김해영, 사교부장 이윤수, 고문 이흥범·이계윤 등이었다. 창립식을 마친 뒤에는 체육행사도 가졌다.15) 이 흥진소년회 역시 조직체계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신천지소년회의 설립취지나 활동방향과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간주된다.

이와 같이 1920년대 여주는 여주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청년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소년회도 조직되는 등 다양한 학생운동이 전개되었으나, 1930년대에는 이렇다 할 기록이 없어 활동양상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1933년 경기도의 정치단체는 19개, 노동·농민단체는 80개, 청년단체는 165개, 여성단체는 65개, 종교단체는 155개 등 모두 654개의 단체가 있었다. 이는 전국에 분포해 있었던 6,396개의 단체 중 10% 정도에 해당하는 숫자이다.16) 또 1935년에 경기도민의 5%는 항상 독립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29%는 적당한 시기가 오면 독립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17) 그런만큼 여주지역에서도 비록 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청년운동을 비롯한 여러 민족운동이 1930년대 이후에도 활발히 전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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