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HOME 주제 역사 일제강점기 여주... 문화계몽운동과 ... 구국교육사업과 ...

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구국교육사업과 야학운동

한말 일제하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 국력을 신장하기 위한 민족운동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한말 애국계몽운동 일환으로 나타난 사립학교 설립과 야학운동은 일제시대 전시기에 걸쳐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일제시대 야학운동은 실력양성을 통한 교육구국운동과 문맹을 퇴치하고 문화기반을 닦는 문화운동으로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부분별 운동과 결합됨으로써 민족민중운동으로까지 발전하곤 하였다.

한말 1906~1910년 동안 경기도 전역에서 모두 45개의 야학이 설립·운영되었으나, 여주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1) 그렇지만 당시 해마다 높아져 가던 교육열과 각도 각군에 증가하던 국문학교의 추세로 보아,2) 여주 역시 일정한 교육운동이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당시 전국에는 사립학교를 비롯하여 각종 국문야학·초동야학·노동야학 등이 1,000여 개나 설립될 정도였다.

이 같은 교육 열기는 3·1운동 이후 더욱 고조되었다. 심지어 3·1운동 이후 설립된 야학 수는 6만여 개 이상이나 될 정도였다.3) 3·1운동 이후 교육열은 고조되었지만, 대중들의 교육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교육 기회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었다. 게다가 3·1운동을 경험하면서 성장한 민중층은 다양한 부분운동에 진출하였고 그들에 의해서 추진된 문화운동은 자연히 다양한 형태의 교육운동으로 이어져 야학, 강습소와 같은 교육사업이 전개되었다.

이 같은 교육사업은 여주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1921년 개신교 신자인 이수다(李壽多)·류인애(柳仁愛)·한윤희(韓允熙) 등은 여주 읍내의 여성들에게 상식을 보급하고자 교회 안에 여자야학회를 열었다. 교수과목은 성경, 조선어, 산술, 한문 등으로 매일 1시간씩 가르치는 한편, ‘가정교육에는 아버지의 힘이 만흐냐, 어머니의 힘이 만흐냐’ 등과 같은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이는 주민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4) 천도교구 역시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교수과목은 교리, 역사, 간독, 법제, 경제, 창가, 일어, 산술, 조선어 등이었고 수강생은 수십 명이나 되었다.5)

여주공립보통학교는 중등교육과정인 취실야학회(就實夜學會)를 운영하였는데, 강사는 보통학교 교사인 일본인 사무라신뻬이(佐村信平)와 전봉호(全鳳昊)가 담당하였고 교과목은 산술, 대수, 기하, 영어, 법제, 경제, 지리, 역사, 조선어, 한문 등이었다. 수강생은 30명이었다.6) 여주 우만리(又晩里) 유지인 장경식(張慶植)·이종형(李鍾瀅)은 노동야학강습회를 열어, 조선어, 한문, 일어, 산술, 주산, 농업을 가르쳤는데, 수강생이 30명이나 되었다.7) 1921년 6월에는 여자야학회도 설립되었다.8)

이러한 1921년의 야학 열기는 1922년 이후에도 이어졌다. 김홍제(金弘濟) 등은 여주 능서면 마래리에 노동학회를 연 뒤 보통학교과정을 자신들이 직접 가르쳤는데, 수강생은 30명이었다.9) 1922년 6월에 조직된 여주청년회 역시 여주공립보통학교 안에 노동야학회를 연 뒤 류희진(柳熙晋)·이세웅(李世雄) 등 5명이 수신, 조선어, 한문, 일어, 산술 등을 가르쳤다. 수강생은 80명이나 되었다.10) 또한 야학회는 아니지만, 김익진(金翼鎭) 등은 1922년 7월에 교원 2명과 학생 35명으로 하자포학술강습회(河紫浦學術講習會)를 설립하였다.11)

여주청년회는 1923년에도 사무실 내에 청년회강습회를 개최하였다. 여주청년회 임원이 강사진으로 나선 청년회강습회는 보통학교과정을 강습하였으며 수강생은 60명이었다.12) 또한 1924년에는 이봉호(李鳳鎬)·이경호(李京鎬)·이예수(李禮洙) 등이 여주 금사면 상품리에 상품리강습소를 열었는데, 교사진은 상품리 유지들이 참여하였고 보통학교과정에 나오는 과목들을 가르쳤다.13) 그 밖에 이건석(李建奭)은 1924년 2월에 박노선(朴魯宣)을 회장으로 한 효지학술강습회(孝池學術講習會)를 설립하였다. 학생수는 35명이었다.14) 또한 이흥범(李興範)·김경중(金敬中)·한흥수(韓興洙) 등은 1925년 12월 흥천면 복장리에 40여 명의 학생들을 모집하여 한글·산술·일어 등을 가르치는 복대야학(卜大夜學)을 창설하였다.15) 그 뒤 복대야학이 경영난에 빠지자, 흥천면 복대리 유지 20여 명은 50여 원을 전달하는 등 지역주민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16)

이렇듯 1920년대 전반 여주지역의 야학열기는 뜨거웠는데, 주로 계몽야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 시기는 여주지역의 사례와 같이 주로 보통학교 수준의 지식을 보급하고 일깨우는 계몽적인 야학활동이 주를 이루었으나, 이후는 좀더 계급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는 혁명적인 농민·노동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사회주의사상이 확대 보급됨에 따라, 야학도 좀더 민중야학의 성격을 띠어갔다. 그 같은 민중야학은 여주지역에서도 있었다.

1925년 8월에 조직된 금사면 이포청년회는 1925년 12월에 무산아동을 위해 이포공립보통학교에 노동야학을 개설하였다.17) 여주 북내면 당우리 금당소년회(金塘少年會)에서는 1927년에 부근에 있는 무산농민의 청소년들에게 의식화 교육을 하기 위하여 11월 19일부터 금당리 예배당 안에 농민야학회를 개최하였다. 강사는 조동섭(趙東燮)·조흥섭(趙興燮)·이광제(李光濟)였으며, 이들의 열성적인 교수로 야학생이 30여 명에 이르는 등 성황을 이루었다.18) 그 밖에 이재호(李在浩)는 1927년 10월에 점봉리에 학생수 20명의 야학회를 설립하였고,19) 조병현(趙炳賢)은 학생수 60명의 학술강습소를 설립하였다.20)

1929년 여주 대신면 가산리에서는 동네 청년들이 무산아동을 교육하기 위해 돈이 없어 움집 6간을 짓고 노동야학회를 열었다. 주동자는 최희섭(崔熙燮)·김옥진(金玉振)·류홍수(柳洪秀)로, 한글과 기타 필요한 학과목을 교수하였다. 학생은 약 20명이었다.21) 이 노동야학회는 여주 최초의 노동야학으로서 무산대중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었다.

1930년부터 혁명적 농민운동을 이끈 엄주언은 금사면 외평리 고향에서 동네 청년 최영창(崔永昌)·박수창(朴壽昌)·지옥성(池玉成) 등과 함께 농민야학을 개설하였는데, 그때가 1930년 12월경이었다.22) 이 같은 농민야학은 여주지역 혁명적 농민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그 밖에 여주 학우회는 1930년 8월 1일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노동야학을 개설하였고,23) 주내면 홍문리·창리·하리 진흥회에서는 1933년 1월 14일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학생 200여 명을 모아 무료로 가르쳤다.24) 가남면 안금리에서도 1933년 2월에 회장 임명재(任命宰)의 발기로 농한기를 이용해 야학을 개최하였다.25) 이천면(利川面) 농촌진흥회에서는 1934년 1월 20일 농한기를 이용하여 학생들을 모집해 야학을 개설하였고,26) 상리(上里)와 창리(倉里)에서도 1934년 11월 15일 합동야학을 개설하였다.27)

이와 같이 여주지역에서도 야학운동이 다양한 형태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종교계는 물론 여주청년회와 같은 단체도 참여하였다. 교수과목은 매우 다양하였는데, 특히 보통학교과정을 이수시키는 데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수강생도 수십 명에 이를 정도로 교육 열기는 대단히 높았다.

이 같은 교육문화운동은 여주지역의 지식기반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문화운동 성격을 지닌 것으로, 한편으로는 민족의식을 배양하고, 또 한편으로는 사회의식을 높여 민족운동이 추동될 수 있는 토대를 이루었다. 더 나아가 1930년 금사면의 농민야학과 같은 민중야학은 문맹퇴치와 같은 교육운동에만 머무르지 않고, 민중의식을 고취시키고 저항문화를 창출하여 의식화운동도 전개하였다.

맨 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