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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서의 노동운동

노동계급이 근대적 계급으로 형성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와서다. 이중 삼중의 착취와 압박을 받고 있던 노동자계급의 처지는 매우 비참하였다. 노예 같은 고용조건과 장시간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쟁의를 전개하였고, 1920년 4월에는 최초의 근대적인 노동단체인 노동공제회가 창립되기도 하였다.

1920년대 노동자 파업은 주로 운수, 광산, 부두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임금인상을 요구하거나 임금인하에 반대하였다. 그뒤 1930년대에는 노동운동의 양상이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1931년에서 35년에 걸쳐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하다가 일제경찰에 체포된 사람의 수는 1,759명이나 되었다. 이 같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역시 혁명적 농민운동과 마찬가지로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탄압에 밀려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경기지역은 서울을 포함하고 있는 지리적 특성으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에 민감한 지역이었다. 또한 경기지역은 역사적으로 조선말기 반봉건농민전쟁으로부터 한말 의병전쟁, 3·1운동이 활발히 전개된 지역이었다. 그러한 역사적 전통을 갖는 경기지역의 노동자들은 1920년대 일제의 폭력적 식민지 노동조건에 맞서 노동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20년대 경기지역의 노동운동은 개항 이후 미곡 등의 수출입항인 인천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인천은 황해도, 충남, 강화, 김포 등지에서 유출된 미곡의 집하장으로서, 일본으로 대량의 조선미가 약탈되던 곳이었다. 그러한 특성으로 인천은 개항 이후 부두노동자가 형성되었는데, 그들은 1920년대부터 임금인상과 노동조건개선을 위한 본격적인 동맹파업에 나섰으며, 일본인 자본가가 경영하는 정미공장에서 일하는 수천 명의 조선인 정미노동자들 역시 민족적 차별과 계급적 억압에 대해 동맹파업으로 그들의 분노를 표출하였다.1)

이렇듯 1920~1924년 경기도에서의 노동운동은 주로 식민지공업에서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는 반제품생산과 식료품공업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자 및 부두·운수노동자들이 다수 모여 있는 공업지대에서 파업투쟁이 전개되었다.2) 때문에 그 같은 공업이 발달하지 않은 여주지역의 경우에는 1920년대 전반에 파업이 일어난 예가 없었다.

1920년대 후반 경기지역의 노동운동 역시 부두·운수노동자와 정미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 활발하였는데, 1920년대 전반보다 투쟁의 지역범위가 확산되는 추세였다. 그러나 여주지역은 노동자가 많지 않아 노동운동 역시 격렬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1929년 현재 경기도지역의 노동자는 총 101만 5,571명이었는데, 여주는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 노동자는 한 명도 없이 조선인만 1,052명 존재하였다.3)

그렇지만 전국적으로 노동운동이 확산되면서, 여주지역의 경우에도 노동관련 단체가 조직되고 활동하는 양상이었다. 그 첫 사례로 1926년에 활동하고 있던 노동친목회가 확인된다. 여주노동친목회는 1926년 10월 21일 창립되었다.4) 1926년 11월 14일 경찰은 여주노동친목회에 침입하여 서류를 무단 탈취하였고, 항의하는 노동자 3명을 업무방해죄로 검속하기도 하였다.5) 이 같은 일제 경찰의 탄압 양상으로 보아 여주노동친목회의 활동은 두드러졌던 것으로 보인다.

노동친목회 외에 노동관련 단체로 구월회(九月會)도 있었으며, 1926년 11월 12일경에는 노동쟁의도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 같은 사실은 같은 해 11월 12일 원주경찰서가 조선일보 지국을 수사해, 노동친목회와 구월회 일지 및 ‘여주노동쟁의’라는 기사원고를 탈취해간 데서 알 수 있다.6) 그리고 1930년 3월 11일에는 노동자 40여 명이 또다른 여주노동친목조합을 창립하고 총회를 개최한 일이 있었다.7)

그런데 1930년대에 들어와 노동운동은 좀더 계급화·정치투쟁화·조직화되는 양상을 보였으며,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여주는 1932년에 100인 이상 고용한 공장이나 광산으로 여주군 금사면 상호리에 소재한 여주금산광업소가 유일하게 137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으나,8) 1930년대에 여주에서 노동운동이 일어난 사례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1930년대에 들어와 노동운동이 혁명적으로 변하면서 대단위사업장 중심으로 파업투쟁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종래 노동운동의 기반이 약하거나 큰 규모의 공장이 없는 지역은 노동운동이 활발해질 수 없었는데, 여주가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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