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HOME 주제 역사 일제강점기 여주... 3·1운동 이후... 여주에서의 농민운동

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여주에서의 농민운동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과 3·1운동을 거치면서, 1920년대에는 농민들이 스스로 단결된 힘을 확인하고 전국적으로 소작쟁의가 활발히 일어났다. 1920년대 전반기 소작쟁의는 소작인조합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소작인조합은 1920년 노동공제회가 결성된 것을 기회로 전국 농촌에서 면리를 단위로 소작인 조합, 소작인 상조회, 농우회 등 여러 이름으로 조직되었고, 주로 소작료 인하와 소작권 이동 반대를 목적으로 전개되었다.

192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 농민운동은 노동운동과 함께 새롭게 발전했다. 전반기 농민대중조직이었던 소작인조합은 농민조합으로 개편되었다. 이러한 조직개편은 이 시기 농민운동이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보기가 된다. 1920년대 후반기부터는 자작농까지 포함하는 농민조합이 농민운동을 주도했다. 그 운동도 지주를 상대로 한 소작쟁의만이 아니라, 일제의 경제적 약탈에 반대하는 투쟁으로까지 나아갔다.

그 뒤 1930년대에는 1920년대의 농민조합운동이 침체되는 상황에서, 농민들이 혁명적으로 진출하여 혁명적 농민조합을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혁명적 농민조합은 전국 70여 개 군에 조직되어, 일본 제국주의세력과 지주를 상대로 투쟁을 벌여나갔다. 일제는 혁명적 농민조합을 처음부터 철저히 탄압하였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더라도 1931년에서 1935년 사이에 45건에 4,121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1937년 중일전쟁 뒤 일제의 폭압적인 탄압에 밀려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1920~30년대의 농민운동의 전개는 경기도와 여주에서도 일어났다. 위 표에서 보듯 1920~1939년 사이에 경기도지역에서 일어난 소작쟁의 건수는 모두 7,254건으로, 이는 삼남지방과 강원도에 비해서는 적은 건수이나 이북보다는 많은 숫자이다. 1920~1929년 사이 경기도지역의 소작쟁의 건수는 91건으로 전국 13도 가운데 5위, 1930~1939년 사이는 7,163건으로 전국 13도 가운데 8위 정도이다. 시기별 추이를 볼 것 같으면, 1920년대의 경우 1925년까지는 1~2건에 불과했고, 1926년 이후부터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경기도에서도 지주들의 착취와 식민지 지배정책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그 같은 농민운동은 소작권에 대한 지주나 마름의 지위남용, 높은 소작료 부과, 당시 최대 지주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횡포 등에 반대하는 소작쟁의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다.1)

그렇지만 위 표에서 알 수 있듯이 경기도에서의 소작쟁의는 1929년까지는 소강상태였다. 경기도에서의 소작쟁의는 1930년대에 들어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고, 특히 1930년대 후반에 들어와 다른 도와 마찬가지로 폭증하는 추세였다. 그래서 경기도에서의 소작쟁의는 1920~30년대에 일어난 소작쟁의 7,254건 중 89.1%인 6,461건이 1935~39년 사이에 집중 발생하였다. 더욱이 1930년대 농민운동은 더욱 계급화되면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 형태로 고양되어 질적으로 한 단계 발전된 양상이었다.

이 같은 상황은 여주도 마찬가지였다. 여주 역시 1920년대 농민운동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1927년에 점동면 청안리에서는 농민단체로 보이는 농우회(農友會: 창립회원 50명, 회장 劉相基)가 창립되었다.2) 또 주내면 우만리 농민들은 1928년 1월 2일 우강농민회를 조직하고 경찰의 이유없는 해산 종용에도 불구하고 창립대회를 개최하였으며,3) 1월 12일에는 제1회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회관 건립, 신입회원건, 의연금 모금 등을 토의하였다.4) 그 밖에 1928년 11월 28일 강천면 간매리와 능서면 매화리에서는 각각 회원수 30명의 근농공제조합이 창립되었다.5)

이처럼 여주에서의 농민운동은 1920년대 말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해, 1930년대에 들어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 여주지역의 지주소작 상황은 아래 표와 같다.

위 표와 같이 1937년 여주지역의 대지주는 모두 61명으로, 그 중 40명은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부재지주였다. 이들이 소유한 면적은 총 3,177정보로, 이를 경작하는 소작농민은 8,470명이나 되었다. 소작농민 1인이 평균 0.375정보를 경작하면서 보통 수확량의 1할을 지주에게 소작료로 납부하였다. 여주지역 역시 부재지주가 주도하는 지주소작제가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었으며, 여주군민 대부분은 소작농민으로서 소량의 소작지를 경작하는 빈민의 처지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같은 실정에서 여주지역의 농민운동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1930년 3월에 귀향한 엄주언(嚴柱彦)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엄주언은 금사면 외평리로 귀향한 뒤 고향에서 동네 청년들과 함께 혁명적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30년 10월경에 혁명적 농조운동을 개시하기 위한 준비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준비모임에서 “여주에는 일반의 의식이 지극히 저급하여 바로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하는 것은 곤란하므로 먼저 협동조합을 조직하고, 이것을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기초로 하며, 그 내부에서 빈농계급을 좌익적으로 지도하여 내부의 우량분자를 획득하는 방법으로 혁명적 농민조합을 조직”할 것을 협의·결정하였다. 그런 다음 1931년 1월에 협동조합을 조직하였으나, 운영 미숙과 자금 부족으로 실패하였다.

그러자 엄주언 등은 학술강습회·축구대회 등을 개최하는 방법으로 동지를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여주지역 활동가들은 양평지역 활동가들과의 연대를 통해서 활동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1931년 10월에 결성된 ‘양평여주대표자회’는 그러한 과정에서 조직된 혁명적 농조운동의 준비조직, 혹은 지역전위 정치조직이었다.

그러나 여주와 양평 대표자들은 조직 방침을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여주지역 대표자인 이성출은 대립이 심화되자 별도의 조직을 꾸려 활동하자고 제의, 결국 ‘농민계’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드디어 1932년 10월에 ‘혁명적 농민운동 지도부’를 결성하기에 이르렀으며, 금사면 금사리지역에는 새로운 계(契)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송현리지역에서는 기존의 계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곧이어 검거되고 말았다.6)

엄주언이 이끄는 혁명적 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난 뒤, 1933년에는 지주와 마름의 횡포에 대항하여 소작인들이 쟁의를 일으켰다. 마름들이 비료값을 받아먹고 일방적으로 소작권을 매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소작인들은 마름을 고소하였는데, 오히려 소작인들이 사기죄로 여주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은 일이 있었다.7)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도 1933년에 지주가 소작계약을 일방적으로 변경한 데 따른 소작쟁의가 일어났다. 지주는 원래 소작료가 병작제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년이라 하여 기존의 계약을 취소하고 가중한 도조계약에 날인을 요구하자, 30여 명의 소작인들은 지주의 일방적인 처사에 강력히 반발하여 소작쟁의를 일으켰다.8)

이처럼 9,000여 명에 이르렀던 여주 소작농민들은 1930년대에 불합리한 지주제 경영에 반발, 다양한 형태의 소작쟁의를 전개하였다. 그것은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정당한 투쟁이자,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에서 나온 사회경제운동이었다.

맨 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