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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식민지정책과 조선민중의 처지

3·1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책으로 식민지정책노선을 바꾸었다. 그것은 조선인을 회유·무마·분열시키려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조선경제를 일본 자본주의에 더 깊이 예속시키려는 것이었다.

일제는 1차 세계대전으로 엄청난 전시 초과이윤을 얻었지만, 1920년 공황의 여파로 입은 경제손실을 식민지로 떠넘기려 하였다. 즉,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의 실시와 회사령 철폐를 통해 일본 자본을 조선에 진출시키고 조선경제를 약탈하였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 자본주의의 기초가 만들어지면서 일본 자본주의는 놀라운 성장을 할 수 있었던 반면, 조선 농민과 노동자들의 처지는 더욱 비참한 지경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렇지만 1929년부터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경제공황으로 인해, 일제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에 일제는 경제공황을 타개하고자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길로 들어섰다. 그래서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다음해 만주국을 세웠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켜 본격적인 중국대륙을 침략하였다. 또한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도발해 연합국을 상대로 한 2차 세계대전을 감행하였다. 이 같은 일련의 전쟁들은 새로운 시장을 찾으려는 일본 독점자본을 만족시켰으며 일본 민중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려는 천황 군부의 뜻에 따른 것이다.

1931년 이후 확대 강화된 전시국면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정책을 바꾸어 놓았다. 즉, 일제는 1920년대의 ‘문화정치’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전시체제로 바꾸었으며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어갔다. 이를 위해 일제는 식민지 민중을 탄압하려고 군사력과 경찰력을 늘렸으며, 1936년 조선사상보호관찰령 제정, 1937년 조선중앙정보위원회 조직, 1938년 국가총동원령 확대실시 등을 통해 조선 민중을 통제하였다.

또한 일제는 조선을 병참기지화하기 위해 30년대에 들어와 ‘농공병진’을 내세우며 군수공업을 중심으로 한 식민지공업화정책을 폈다. 그래서 일본 독점자본은 값싼 노동력과 수자원, 지하자원을 노리고 조선의 기계공업, 중화학공업, 방직업, 군수산업에 본격 진출하여 식민지공업화와 이를 바탕으로 한 병참기지화를 이루어갔다. 이러한 식민지공업화는 민족자본이 무너져 내리고 일본 독점자본이 식민지경제를 완전히 지배하며 식민지 노동계급을 더욱 착취하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일제는 1932년부터 가난한 농가를 자급자족시킨다는 명분하에 농촌진흥운동을 벌였다. 이를 위해 일제는 ‘자력갱생’과 ‘진흥대책’을 내세워, 자작농창설유지사업(1932), 조선소작조정령(1932), 조선농지령(1934)을 공포하였다. 이 같은 정책은 농업공황에 휘말려 농촌경제가 완전히 무너지려 하자 농촌사회를 안정시키는 동시에, 농촌을 통제하고 농민운동을 막으려는 정책이었을 뿐이다.

더욱이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 1938년부터 지원병 형태로 조선 청년을 전쟁에 끌어들였고 1943년에는 학도지원병제도를 강행하여 학생들마저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이밖에도 일제는 모집, 징용, 보국대, 근로동원, 정신대 따위의 간판을 내걸고 조선인 노동력을 강제로 수탈함은 물론 전쟁물자에 필요한 지하자원, 곡물, 심지어 각종 쇠붙이를 빼앗아갔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선 민중들의 처지는 해가 갈수록 열악한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식민지공업화정책으로 빠른 속도로 증가한 조선인 노동자는 말할 수 없이 나쁜 노동조건에 시달려야만 했으며, 조선 인구 가운데 70~80%를 차지한 농민도 30년대 들어와 빠르게 몰락해갔다. 이는 여주 민중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부분 소작인이었던 여주 농민들은 5할이 넘는 고율 소작료와 여러 조세, 공과금을 내야 했으며 폭락하는 농산물 가격과 폭등하는 물가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래서 농민들은 춘궁기에 초근목피로 연명했고, 자기 고향을 떠나 화전민이 되거나 도시 변두리에 토막을 짓고 사는 날품팔이꾼이 되기도 하고 이곳저곳을 떠돌다 일본·만주 등지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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