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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3·1운동의 성격과 특징

여주의 3·1운동은 출발도 늦고 시위 횟수도 많지 않는 등 타지역과 비교해볼 때 그리 활발하지는 못하였다. 우선 도내 타지역과의 비교를 위해 3·1운동의 고전적 기록이라 할 수 있는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경기도 지방의 3·1운동 상황을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3·1운동에 관한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다. 물론 일제 측 자료가 있으나, 대부분 왜곡되어 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3·1운동 직후에 임시정부에서 수집, 정리한 자료를 근거로 작성된 것이다.1) 그러나 이 또한 정확하지는 않으나, 현재로서 3·1운동의 대강을 이해하기 위하여 참고하여야 할 자료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여주는 경기도 관내에서 시위 횟수는 강화, 장단과 함께 2회로 최하위이며, 참가 인원도 적은 편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위에서 서술한 실제의 시위 횟수나 참가 인원이 다름은 물론이다.

또한 다른 지역보다 만세운동이 늦게 점화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경기도의 3·1운동은 발원지인 서울과 인접한 관계로 서울과 가까운 곳부터 전개되어 먼 곳으로 파급되는 양상을 보인다. 또한 철도 연선을 따라 대도시에서 중소도시와 농촌지역으로 확산되어갔다. 따라서 3월 1일에는 개성과 수원이 서울과 동시에 일어났으며, 상순에는 고양과 강화, 인천, 양평, 파주로 파급되었고, 하순에 이르러서는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도내 전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2)

여주에서는 3월 하순 주내면의 조병하가 만세시위를 계획한 바는 있으나, 실행되지는 못하였고 4월 1일 금사면 이포에서 3천여 명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 이래, 4월 3일 북내면과 대신면의 시위로 그치는 양상을 보인다. 즉, 타지역보다 늦은 4월 1일에 시작하여 시내 전 지역으로 확산되지 않은 채 4월 3일에 종료되고 마는 것이다. 이는 한강이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지리적 특성이 제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4월 3일 김용식이 주도한 시위대가 읍내로 진입하지 못하고 대안의 백사장 시위로 그치고 만 것은 그 좋은 예라 할 것이다.

한편 4월 7일 북내면 현암리와 동월 11일 개군면 주읍리에서 일제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이는 만세시위가 아니라, 시위 주도자를 체포하러 온 일본 헌병과 보병 연합 체포조에 주민이 저항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또한 여주에서 만세시위가 활발하지 못한 이유로 일제의 사전 탄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일제는 만세시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여주 헌병분대장과 군수가 여주 관내의 유력자를 초치하여 설득하거나 천도교도의 집 등을 사전에 엄밀하게 사찰하는 등의 탄압을 하였다. 조선헌병대사령부는 이러한 방법을 ‘미연 방지를 위해 유효했던 수단’이라고 보고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주 분대장은 학생들의 선동에 의하여 민심이 동요되었음을 알아차리고, 미리 관내의 유력자를 초치하여 군수와 함께 이유 곡직을 간곡히 타일렀다. 또한 그들의 기선을 제압하고 나아가 천도교도의 집을 수사하여 엄밀히 사찰을 한 결과 일이 크게 벌어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3)

이처럼 여주의 만세시위는 출발이 늦고 일부 지역에서 단발적 시위로 종료되는 양상을 보이긴 하였으나, 그 규모가 컸고 또한 격렬한 시위양태였음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4월 1일 금사면 이포 시위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즉, 3,000여 명의 대규모 시위대가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자, 일제가 발포를 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이 같은 이포 시위와 함께 4월 2일과 3일에 걸쳐 여주에서 격렬하게 전개된 만세시위를 경기도 만세시위에서의 ‘광포(狂暴)’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4)

일제는 북내면 시위 때에도 발포하여 시위 군중을 해산시켰다. 일제는 강화, 가평, 양주지역에서 다수의 군중이 모였지만 ‘하등의 폭거’가 없었던 것은 한말 의병 봉기시 무력으로 진압했던 경험이 효력이 있다며 ‘고압수단’의 효과가 컸다고 발포를 정당화하고 찬양하였다.5) 즉, 일제는 시위가 격렬성을 띠면 지체없이 야만적인 사격을 가하였던 것이다. 여주의 만세시위에서 일제의 발포 빈도가 높고, 또한 현암동과 개군면 주읍리에서 시위군중을 체포하기 위해 출동한 일제와의 충돌은 여주 주민의 강렬한 투쟁정신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여주의 만세시위 횟수는 비록 타지역에 비해 적었으나, 도내 전 지역에서 전개된 283회의 만세시위 중 폭력 대 비폭력 비율이 45% 대 55%였고, 일제가 발포한 지역이 52군데(18.4%)6)라는 점을 감안하면 여주 시위의 격렬한 양상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위 횟수에 비하여 많은 피체자와 사상자가 발생하였던 것이다.7) 일제의 각종 보고서에 여주의 형세가 ‘불온’하다며 경계를 늦추지 않은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여주의 격렬한 시위양태와 함께 봉화만세운동을 특징적 시위양상으로 들 수 있다. 봉화만세운동은 장터나 관공서 등 공개된 장소에서 일제와 대치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 동리 단위로 주민들이 모여 봉화를 피우고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군경이 출동하면 스스로 해산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 방법론은 직접 일제와의 대결을 피하였다는 점에서 소극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시위군중의 단결감과 연대감을 강화하는 동시에 타지역으로 널리 만세운동을 전파하고 호응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운동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경기도에서는 3월 하순부터 4월 상순에 걸쳐 고양·시흥·광주·부천·수원·개성·장단·파주·김포·양주·진위·이천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봉화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8) 여주는 마을 단위로 전개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여주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계층에 대한 분석은 재판 기록이 남아 있는 사람이 13명밖에 확인되지 않아 이것만 가지고 전체적으로 일반화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13명 중 농업이 8명(61.5%)이고, 학생이 2명(15%)이며, 나머지는 승려, 날품팔이, 면서기 견습이 각각 1명씩이었다. 승려와 면서기 견습생이 만세시위를 주도한 것은 특이한 예이며, 3·1운동의 거족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자료의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도내 피기소인의 계층별 구성이 농업이 75.1%, 지식인·청년·학생이 11.2%였다는 사실9)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시위 주도자 13명의 연령은 20대 6명(46%), 10대 4명(31%), 30대 3명(23%) 순이다.

경기지방 3·1운동 통계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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