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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내면

북내면에서는 4월 3일 두 군데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 하나는 천송리(川松里)에서 김용식(金用植)이 주도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당우리(堂隅里) 공북학교(拱北學校)에서 이원기(李元基), 최영무(崔永武) 등이 주도한 것이었는데, 이들은 각각 여주군 내로 행진하였다.

김용식(일명 仁瓚)은 신륵사 승려로서 3·1운동이 발발하자 이에 공감하여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는 4월 3일, 천송동에 거주하는 권중순(權重純)·조규선(曺圭善) 및 당우리에 거주하는 조석영(曺錫永)·조근수(趙根洙) 등에게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의 권유에 따라 수십 명의 주민이 집결하자 그는 이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동리를 출발하여 시내로 행진하였다. 도중에 시위군중은 200여 명으로 늘어났는데, 그는 한강 대안에 도착하여 군중을 정렬시키고 이들의 선두에 서서 무명천으로 만든 태극기를 떠받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1) 그러나 배 편이 없어 여주군 내로 진입하지는 못하였다.

김용식은 일제에 피체되어 협박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여 1년형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2)

한편 이원기 등이 주도한 북내면 연합 시위는 짧은 기간이지만 치밀한 조직화와 준비과정을 거쳐 진행되었다. 이원기는 당시 학생으로서 서울 사람들이 만세운동을 벌이지 않고 있는 여주와 이천사람들을 짐승으로 여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즉, 그는 “경성에서는 여주와 이천사람들에게 먹일 것으로 돼지 먹이를 저축하여둔 모양이다.”라는 조롱섞인 말을 듣고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만세운동을 결심하였다.

이원기는 4월 1일, 자신이 몰래 가지고 있던 독립선언서를 참고하여 “경기도 각지에서는 독립운동을 시작하였으니 이 기회에 여주군에서도 오는 4월 5일의 읍내 장날을 기하여 독립운동을 행할 터이므로 그곳의 다락문 앞으로 집합하라”는 요지의 경고문을 기초하였다. 그는 많은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는 경고문을 작성하여 배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날,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조경호(趙經鎬), 원필희(元弼喜), 이원문(李元文) 등이 이원문의 집에 모여 이원기가 기초한 경고문 42장을 필사하였다. 경고문은 조경호가 26장, 원필희가 1장, 이원기가 14장, 심상의(沈相儀)가 1장씩 가지고 배포를 담당하였다. 이원기는 다시 이원문에게 7장을 주었는데, 이원문은 다시 이를 김봉수(金鳳洙)에게 주어 배포를 부탁하였다.3)

그는 4월 2일, 취지에 공감한 강영조(姜永祚)와 이원문이 자기 집으로 오자, 함께 만세운동 때 사용하기 위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일장기를 고쳐 태극기를 만들었다.4) 4월 3일에는 김학수(金學洙), 원필희와 함께 장암리(長岩里) 구장 원도기(元道基)의 집에서 또 다른 태극기를 만드는 등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런데 이때 북내면장 조석영(曺錫永)이 일제에 강제로 연행되는 일이 있었다. 오금리(五今里)에 살던 최영무는 현암리(峴岩里) 사람들로부터 이 소식을 듣고 면장의 방면을 요구하기 위하여 북내면으로 갔다. 면장이 이미 방면되었다고 하자 최영무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원도희의 집을 들러 그곳에서 시위 준비를 하고 있던 이원기 등으로부터 태극기를 건네 받고 함께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이들은 애초 5일의 여주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벌이려던 계획을 바꾸어 이날 바로 결행하기로 하였다. 이원기와 최영무는 장암리, 외룡리(外龍里), 덕산리(德山里)를 돌며 주민들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이에 따라 800여 명의 시위군중들이 당우리의 공북학교로 집결하였다. 이때 면장 조석영이 시위군중들에게 해산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최영무는 오히려 면장에게 만세운동에 동참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리고 최영무는 선두에서 태극기를 들고 시위군중을 지휘하며 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로 행진하였다. 시위대열 중 이원기, 김학수, 강두영(姜斗永), 최명용(崔明用), 강만길(姜萬吉), 강두영(姜斗永) 등 십수 명의 주도자들은 군중이 이탈하지 않도록 독려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이 오학리(五鶴里)를 지날 무렵 일제의 발포로 시위대열은 해산하고 말았다.5)

주도자 중 원필희는 경성농업학교 학생으로서 민족대표인 손병희를 따랐고, 북내면 만세시위의 계획단계부터 적극 참여하였는데, 시위 도중 일제에 피체되었다. 당시 일본 헌병은 보습고개에서 그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총살하려고 하였다. 이때 원필희의 모교 교장이던 일본인 히노 하루기치(日野春吉)이 급히 달려와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헌병들을 만류하여 총살을 모면하였다고 한다.6)

이후 일제는 대대적인 시위 주도자에 대한 체포에 나섰다. 일제는 4월 7일 오후 1시부터 헌병과 보병으로 체포반을 편성하고 신남리(新南里), 오금리, 현암리 일대에서 만세시위 주도자를 체포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 체포반이 현암리에 도달했을 때 200여 명의 주민들이 이들에게 야유를 하고 곤봉을 휘두르고 돌을 던지며 강력히 항거하였다. 위협을 느낀 일제는 주민들을 향해 발포하였다. 일제의 야만적 발포로 말미암아 주민 3명이 적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1명이 부상당하였다.7)

일제에 피체된 북내면 시위 주도자 중 10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최영무와 이원기는 각각 징역 2년, 강두영, 김학수, 원필희는 징역 1년 6개월, 조경호, 이원문은 징역 1년, 최명용, 강만길, 강영조는 각각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모두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최영무(1년 6월), 이원기(1년), 강두영·원필희·김학수(8월)는 결국 옥고를 치렀고, 최명용·강만길·이원문·강영조·조경호는 각각 태(笞) 90의 처분을 당하였다.8)

일제 측 기록에 의하면 북내면 시위가 있었던 4월 3일에는 여주읍내에서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시내를 행진하고 군청으로 쇄도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이는 등 군내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나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다수의 피체자와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4월 3일 여주 만세시위에 대한 일제 측 기록(『三·一運動一次報告』)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경기도 여주에 약 1천의 군중 소요, 헌병으로 진압하여 폭민에 부상 20여 명.9)
  • 여주에서 약 1천 명이 폭동을 하여 이를 진압하여 그들의 부상 20이 있었고, 이날 여주 군내 다수의 개소(個所)에서 운동이 있었음.10)
  • 오후 9시 약 1천 명의 군중이 읍내를 행진하고 군청에 쇄도함으로 수모자 10명을 체포하고 일제 해산시켰으나, 아직 불온의 징조가 있어 경계 중.11)

북내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김용식과 최영무 등 10인의 재판 판결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용식 재판 판결문>12)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신륵사 승려 일명 인찬(仁瓚) 김용식 35세

위의 협박, 보안법 위반 피고사건에 대하여 조선총독부 검사 千綿榮六 관여로 판결함이 다음과 같다.

주문

피고를 징역 2년에 처한다.

압수 물건은 이를 몰수한다.

이유

피고는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을 선언하자 크게 그 취지에 찬동, 스스로 정치 변혁의 목적으로 독립시위운동을 하려고 꾀하여 대정 8년 4월 3일경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권중순·조규선 및 같은 면 당우리 조석영·조근수 등에게 대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쳐 시위운동에 참가하라.”고 권유, 동리민 수십 명을 위의 천송리에 규합하여 같이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이 동리를 출발, 여주 읍내를 향하여 행진 중 도중에서 백수십 명의 군중이 이에 참가하매 합계 200여 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동 읍내의 한강 대안에 이르러 태극기를 떠받들고서 군중을 정렬시켜 피고가 스스로 선창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군중이 따라 부르게 함으로써 안녕 질서를 방해한 자이다.

위의 사실은 피고가 당 법정에서 판시함과 동일한 취지로 공술한 것, 그리고 압수한 판시의 국기에 부합되는 무명천으로 만든 태극기의 존재함에 의하여 이를 인정한다.

법에 비추건대 피고의 소위(所爲)는 보안법 제7조, 조선형사령(朝鮮刑事令) 제42조에 해당하는 바, 위의 범행 후에 발포된 제령(制令) 제7호에 의하면 동 제령 제1조에 해당하므로 형법 제6조, 제8조, 제10조에 따라 신·구 양법을 비교 대조하면 구법인 보안법 제7조의 형이 경(輕)하므로 동 법조를 적용하여 소정형 중 징역형을 선택, 그 범위 내에서 처단할 것이며, 압수 물건은 본 건 범죄의 공용물로서 범인 이외의 것에 속하지 않으므로 형법 제19조에 따라 몰수할 것으로 여겨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대정 8년 5월 9일

경성지방법원 조선총독부 판사 有澤作治

<최영무 등 판결문>13)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오금리 47번지 날품팔이 최영무 35세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오금리 114번지 농업 강두영 21세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오금리 113번지 농업 최명용 27세

일명 명룡(明龍), 석기(石基)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오금리 114번지 농업 강만길 30세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외룡리 298번지 학생 이원기 20세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외룡리 280번지 농업 이원문 19세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외룡리 289번지 강영조 26세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장암리 342번지 학생 원필희 24세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신남리 246번지 면서기 견습 김학수 20세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걸은리 128번지 농업 조경호 19세

상기자에 대한 보안법 위반 피고사건에 대하여 조선총독부 검사 千綿榮六 관여로 심리 판결함이 다음과 같다.

주문

피고 최영무·이원기를 각가 징역 2년에, 피고 강두영·김학수 및 원필희를 징역 1년 6월에, 조경호·이원문을 징역 1년에, 기타 각 피고를 징역 10월에 처한다.

압수 물건 중 영(領) 제1호 태극기, 제3호 경고문, 제4호 선언서 4매, 제5호 태극기는 이를 몰수하고 기타는 제출인에게 반환한다.

이유

피고 이원기·조경호·원필희·이원문은 모두 경기도 여주군에 거주하는 자인바, 동 군민이 목하의 독립운동에 냉담하여 경성(京城) 지방 사람들에게 개돼지로 취급되는 것을 분개하여 군내의 각지에 경고, 대거(大擧)하여 조선독립 시위운동을 함으로써 곁들여 여주 사람의 면목을 세우고자 공모하여 대정 8년 4월 1일 피고 이원기는 그가 가진 증(證) 제4호의 독립선언서를 참고로 하여 “오는 4월 5일 여주 읍내의 장날을 기하여 동 읍내 다락문 앞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할 터이니, 그곳으로 모이라.”는 취지의 문서를 기초하고, 그 밖의 전기한 피고는 이원문 집에서 위의 기초문서에 따라 42매의 경고문(증 제3호)을 손으로 써서 이를 이날쯤 각 곳에 배부하였으며, 피고 강영조 및 김학수는 위의 독립운동 취지에 공명, 피고 강영조는 동월 2일 이기원 집에서 동인 및 이원문과 같이 시위운동에 사용할 한국 태극기(증 제5호)를 만들고, 피고 김학수는 동월 3일 북내면 장암리 구장 원도기 집에서 이원기 및 원필희와 함께 증 제1호의 태극기를 만들어 각각 시위운동 준비에 힘쓰고 있던 차 피고 최영무·강만길·최명룡·강영두는 이웃 동리인 현암리 이민에게 재촉을 받고서 이날 독립시위운동을 결의하여 장암리·덕산리·외룡리를 넘나들어 이민들의 출동을 요구하고 피고 이기원 및 김학수도 예정기일을 변경하여 3일에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최영무 등을 따라 각 이민들을 선동하였기 때문에 이날 북내면 당우리 공북학교 마당에 모인 자가 약 800명의 다수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전기한 피고들(조경호는 제외)은 위의 군중과 같이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면서 여주 읍내로 향해 출발하였는데, 도중 피고 최영무는 증 제1호의 태극기를 떠받들고 선두에 서서 군중을 인솔하고, 피고 이원기·김학수·원필희·강두영은 군중을 감시 독려하며 행동을 장하게 하여 함께 여주군 북내면 오학리까지 가서 독립시위운동을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한 자이다. 이상의 사실은,

1. 당 법정에서 피고 이원기가 ‘금년 4월 1일 이원문 집에서 동인 및 조경호와 같이 경고문을 작성하였다. 이날 조경호의 말에 그가 여주에서 돌아오는 도중 경성에 사는 사람에게 들으니 “경성에서는 여주 및 이천 사람에게 먹일 것으로서 돼지먹이를 저축하여 둔 모양이다.”는 것이어서 “그러면 여주 사람도 조선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수치가 된다.”고 생각하고서, 우선 많은 군중을 모으기 위해서 경고문을 낼 필요가 있다고 헤아려 자기가 증 제4호의 선언서를 토대로 삼아 증 제3호의 경고문을 기초하였다. 그 글 뜻은 “경기도 각지에서는 독립시위운동을 시작하였으니 이 기회에 여주군에서도 오는 4월 5일의 읍내 장날을 기하여 독립운동을 행할 터이므로 그곳의 다락문 앞으로 집합하라.”고 써두었다. 그리하여 전기한 조경호 및 이원문이 위의 원고를 베껴서 경고문 42매를 만들어 그 중 조경호가 26매, 원필희가 1매, 자기가 14매, 심상의가 1매를 배부하기로 되어, 자기는 7매를 이원문에게 교부하니, 그는 김봉수란 자에게 배부할 것을 부탁하였다. 피고 원필희·강영조는 경고문 작성을 돕지는 않았으나 그 곁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이어서 이튿날 2일 이원문 집에서 동인 및 강영조와 상의 후 5일의 시위운동 때 사용하기 위하여 자기 소유의 일장기를 고쳐서 증 제5호의 기를 만들었으며, 동 3일 북내면 장암리 구장 집에서 김학수·원필희와 공모한 끝에 증 제1호의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날 밤 최영무·강만길·최명룡 등이 이민들을 규합하고 있기에 그들을 따라갔더니 최영무는 이민에게 대하여 “출동하지 않으면 방화한다.”는 등의 말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공북학교로 가서 군중 약 300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여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는 취지의 공술.

1. 피고 최영무가 “금년 4월 3일 현암리 사람 5, 60명이 자기 동리에 와서 “어제 북내면장이 인치되었다.”고 하기에, 이 면장의 방면을 요구하기 위하여 북내면으로 갔더니, 이미 면장이 방면된 뒤이었으므로 자택으로 돌아오는 도중 강만길·강두영·최명룡과 만나 이날 만세를 부르기로 되어 사람들을 모으기 위하여 자기는 장암리·덕산리·외룡리를 넘나들어 기세를 보이면서 “출동하지 않으면 방화한다.”고 협박하여 이민들을 선동하였는데, 그 결과 공북학교 마당에 300 인 정도 모였기에 자기가 이원기에게 받은 증 제1호의 태극기를 떠받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여주 읍내를 향하여 행진하였으나, 도중 오학리에서 총소리가 들렸으므로 모두들 해산하였다는 취지의 공술.

1. 사법경찰관의 피고 최무영 제4회 신문조서에, 4월 3일 북내면 면장 조석영이 인치되어서 현암리·오금리의 이민들이 면사무소 앞에 모였는데, 그 중에는 “면장의 귀환이 허락되었다.”고 하며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으나, 자기들의 남은 사람은 어느 술집으로 가서 술을 마셨는데 마침내 기분이 들떠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동리를 떠나올 때 현암리 사람에게 선동을 받았었다. “만세를 부르자.”고 제의한 동지는 최석기·강만길·강두영 외 1명으로서 이들이 서로 전후하여 각 동리를 돌아 당우리의 학교에 이민들이 모일 때까지 같이 이민들을 선동하였으며, 자기는 “집집마다 반드시 1인씩은 나와서 만세를 부르라. 그렇지 않으면 방화한다.”고 협박한 것으로 기억한다는 취지의 기재.

1. 사법경찰관의 피고 이원기 제5회 신문조서에, 4월 3일 원도희 집에서 김학수 및 원필희와 함께 기를 만들고 있는데 최영무가 와서 당신네 학생도 기를 넘겨주고 같이 만세를 부르라고 하기에 장암리를 선동하고 돌아왔다는 취지의 기재.

1. 사법경찰관의 피고 김학수 제2회 신문조서에 4월 3일 자기들이 원도희 집에서 기를 만들고 있는데 최영무가 와서 “만세를 부르자.”고 하기에 그와 합류하였으며, 자기와 이원기·원필기는 최영무와 같이 장암리·외룡리·덕산리의 각 동리를 선동하고 돌아 군중과 함께 당우리로 갔다. 그때 면장 조석영이 해산을 요구하였으나 오히려 최영무는 만세를 부를 것을 강요하였다. 여기서 위의 군중은 이곳을 출발하였는데, 도중에서 십수 명의 군중은곤봉 혹은 작대기를 들고 행렬의 전후에서 낙오자가 없도록 독려하고 있었다. 자기도 군중을 지휘 감독하였다는 취지의 기재.

1. 사법경찰관의 피고(증인) 김진규 신문조서에 그날 공북학교에 모인 자가 5, 600 명 되었는데, 이 군중이 당우리를 떠날 때 최영무·원필희·이원기·김학수 외 수명은 곤봉 같은 것을 들고서 “도주하는 자는 때린다.”는 등의 말을 하면서 일변 위세를 보이고 있었다는 취지의 기재.

1. 사법경찰관의 피고 강두영 신문조서에, 그날 읍내로 갈 때 1인도 도피하여 숨지 않도록 자기는 감시하였다는 취지의 기재.

1. 당 법정에서 각 피고(조경호는 제외함)가 4월 3일 만세를 부르면서 공북학교에서 북내면 오학리로 갔다는 취지의 공술을 종합하여 이를 인정한다.

법률에 비추건대, 본건은 범죄 후의 법령으로 형이 변경된 것이므로 형법 제6조·제8조·제10조에 따라 신구 양법의 형을 비교 대조하여 그 경한 것을 적용할 것이다.

구법에 있어서는 보안법 제7조, 조선형사령 제42조에 해당하고, 신법에 있어서는 대정 8년 제령 제7호 제1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그 경한 구법인 보안법의 규정을 적용하여 소정형 중 징역형을 선택, 그 범위에서 각 피고를 처단할 것이며, 압수품 중 증 제1호, 제3호~제5호는 범죄의 공용물로 범인 이외의 것에 속하지 않으므로 형법 제19조에 의하여 이를 몰수하고, 그 나머지는 형사소송법 제202조에 의하여 제출인에게 반환할 것이다. 따라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대정 8년 5월 20일

경성지방법원 조선총독부 판사 鏡一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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