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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3·1운동의 배경

여주는 구한말 의병활동이 활발하였던 지역이다. 따라서 경술국치로 인해 여주지방 의병투쟁의 격정은 잠복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은 사화산이 아니라 언제든지 계기가 되면 독립투쟁이라는 용암을 용출해낼 휴화산이었다.

한편 한말의 격렬했던 의병항쟁은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초래하여 독립운동 세력이 사전에 제거당하거나, 또는 잔혹한 탄압으로 크게 위축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의병활동이 활발하였던 여주지방에서 3·1운동은 오히려 다른 지방에 비해 활발한 편은 아니었다. 이는 동학과 의병의 중심지였던 호남지방에서 3·1운동이 저조했던 것과 같은 역사적 배경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제는 3·1운동 당시 경기지방의 민심을 민족자결주의의 영향과 광무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독살설의 유포로 매우 불온한 것으로 진단하였다. 또한 경기지방의 시위군중을 ‘운동자·유식자·뇌동자’로 참여계층의 형태를 구분하고 “이들의 심리상태는 다종 다양하여 거의 귀일되는 바가 없다.”고 파악하였다.1) 일제 헌병대사령부가 조사한 「조선 인간에 주창되는 불평 및 희망」에서도 경기지방민의 불평을 조선인 관리에 대한 대우상의 차별 등 ‘대우상의 불평’을 7개항으로, 조선인에게 행해지고 있는 태형 등 ‘법규상의 불평’을 5개항으로, 부역이 과중한 것 등 ‘징세의 불평’을 2개항으로, 토지 등이 일본인에게 수탈당하는 등 ‘경제상의 불평’을 7개항으로 상세하게 분석하기도 하였다.2)

다만, 여주군의 만세시위를 계획하거나 주도하다가 피체된 인사들의 재판 판결문에는 여주군내 각 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의 구체적인 배경과 양상이 잘 나타나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의병전쟁 등 항일운동의 전통을 들 수 있다. 여주지방 만세시위 주도자들은 대부분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부정하고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였다. 이는 판결문은 물론 일제의 헌병대사령부가 파악한 상기의 자료를 볼 때 여주 지방민들이 일제의 식민지 정책 전반에 걸쳐 불만을 지니고 있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둘째, 서울과 경기 등 인근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주내면의 조병하(趙炳夏)는 민족대표에 의해 독립이 선언되고 각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는 상황에 고무되어 학생들을 중심으로 주내면의 만세운동을 계획한 바 있다. 또한 북내면의 이원기(李元基)는 민족대표들이 발표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이를 토대로 수십 장의 경고문을 기초, 인쇄하여 면내 각 지역에 배포함으로써 만세시위의 지침으로 삼았다. 또한 원필희(元弼喜)는 경성농업학교 학생으로서 고향의 만세시위의 계획단계부터 참여하였고, 시위대열의 선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대신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황재옥(黃在玉) 역시 손병희 등 민족대표의 영향을 받았음을 공술한 바 있다.

셋째, 여주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여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동참의식, 특히 타지역에서는 거의 만세시위가 일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여주에서만 아직 궐기하지 못하였다는 자괴감이 배경이 되었다. 이는 북내면의 경우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즉, 학생이었던 이원기는 서울사람들이 만세운동을 벌이지 않고 있는 여주사람들을 개와 돼지에 빗대어 조롱하는 말에 수치심을 느끼고 분개하여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이 밖에도 사회계층별로 처해 있던 사회경제적 상황에 따라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느낌과 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요인이 다양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사례는 자료의 결핍으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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