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HOME 주제 역사 일제강점기의 사... 일제강점기의 사... 일제의 구관조사...

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일제의 구관조사와 전통의 왜곡

일제는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동원해 조선·대만·만주 등의 역사 제도 관습 등에 대한 조사작업을 광범위하게 전개하였다. 이것은 물론 식민지배를 위한 기초자료를 축적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일제의 조선에 대한 조사는 1876년 개항을 전후한 시기부터 군사적·상업적 침투를 목적으로 한 군인·상인들에 의하여 다양한 경로로 시작되었다. 이후 통감부를 설치한 일제는 1906년 부동산에 관한 관습조사를 시작하였으며, 1908년에는 법전조사국을 설치하여 조선의 민사(民事) 및 상사(商事) 전반에 걸친 관습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조사사업은 조선을 완전히 강점한 이후부터는 조선총독부 취조국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취조국관제를 보면 취조국의 첫째 임무는 ‘조선의 각반의 제도 및 일체의 관습을 조사’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30인 이내의 위원을 두어 조선의 제도 및 구관(舊慣)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912년에 취조국이 폐지되면서부터 조사업무를 총독부 참사관실에서 관장하게 되었다. 참사관실에서는 구관 및 제도의 조사가 범위가 넓고 사항이 복잡함으로 우선 민사에 관한 관습부터 조사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법제조사세목과 관습조사세목을 작성하고, 전적(典籍)조사 및 현장조사 등을 통해 친족, 상속, 유언, 물권, 채권 등의 사항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였다. 또한 1913년에는 정무총감 명의로 각도장관과 도경무부장에게 민간보유도서, 금석문, 판문 등의 조사 수집에 대한 통첩을 발송하였으며, 이외에도 읍지, 고문서 등도 수집하게 하였다. 그 결과 1천여 종이 넘는 금석문을 비롯해 각종 고문서들이 수집되었다.1)

일제의 총독부 관제개정으로 1915년부터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이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1915년 4월 30일자로 공포된 칙령 제62호에 의거해 중추원은 1915년 5월 1일부터 종래 참사관실에서 진행하던 조선의 제도 및 구관에 관한 조사사업을 넘겨받게 된 것이다. 중추원은 구관 및 제도에 대한 조사방침을 수립한 후 1915년 말부터 구관조사의 일환으로 조선반도사(朝鮮半島史) 편찬에 착수하였고, 1919년에는 조선사회사정조사(朝鮮社會事情調査)를 시작하였다. 1921년부터 부락조사를 시작하였고, 구관급제도조사위원회(舊慣及制度調査委員會)를 설치하였다. 또한 중추원은 1921년부터 조사분야를 민사관습·상사관습·제도·풍속의 네 분야로 구분하고, 이어서 각 분야의 조사항목을 조정하여 조사를 진행하였다.

중추원에서는 민사관습의 조사항목을 사권(私權)의 주체, 사권의 객체, 사권의 득상변경(得喪變更), 물권, 채권, 친족, 상속, 유언 등으로 편성하였다.2) 그리고 상사관습에 대한 조사는 종래 구관조사라는 이름 아래 포괄적으로 행해지다가 중추원에서 1923년부터 따로 조사항목을 두고 독립적으로 조사하게 되었다. 상사관습의 조사항목은 ①상업단체(육의전·보부상·시장 등), ②상인(상인의 종류·영업소 등), ③상업사용인(사용인의 종류·사용인의 권리 의무), ④대리상(代理商), ⑤회사, ⑥상행위(매매·운송영업·창고영업 등), ⑦수표(어음 등), ⑧해상(海商)(선박 및 선박소유자·선원·수상운송·해난구조 등) 등이었다. 사실 조선의 상사관습에 관련된 조사는 명치 초기부터 일본 상인들과 군부에 의해 시작되었기 때문에 중추원에서 조사를 시작할 때는 이미 70% 정도 조사가 완료된 시점이었다. 그리고 조선민사령의 시행과 일본법의 적용 확장 등이 이루어지면서부터 조선에서 별도의 상사에 관한 관습법이 필요없게 되어 1932년부터 중추원에서는 상사관습의 조사를 중지하였다.

제도에 대한 주요 조사항목은 국제, 왕실, 구역, 관직, 관원, 내무, 외교, 군제, 재판, 재무, 지방자치 등이었다. 풍속에 대한 조사는 총 25개의 조사항목을 편성하였다. 그것은 복장, 음식, 주거, 차·여·선(車輿船), 출생, 관혼상제, 예속(禮俗), 직업, 학문, 예의(禮儀), 장의(葬儀), 가정의 일상, 종교(불교·유교), 미신, 절행(節行), 의약, 미술, 악·가·무(樂歌舞), 오락 및 유희, 족보, 농업 및 어업, 무복(巫卜) 및 술객(術客), 성명, 연중행사, 잡(雜) 등이었다.3)

한편 1920년대 말부터 일제는 조선의 각 자연촌락 단위까지 직접 내려가 현장조사를 수행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선 민중의 노동력을 좀더 원활하게 동원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또한 조선 민중들에 대한 철저한 통제와 ‘황국신민’으로의 개조가 대두되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많은 자료의 축적이 더욱 필요하게 된 것이다. 즉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동원·수탈하고,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각 마을단위에까지 이르는 조사가 필수적인 조건이었던 것이다. 특히 조선 민중들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무시킬 수 있다고 판단되는 각종 민속놀이를 비롯한 여러 문화유산을 탄압하기 위해서라도 직접적인 현장조사를 통해 이를 자신들의 의도에 맞게 정리하고 왜곡시킬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4) 결국 이러한 필요성에 부응하여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를 비롯한 일군의 연구자들과 일본에서 온 연구자들 등 일본의 대표적인 학자들이 현장조사에 직접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써 『조선의 귀신』, 『조선의 점복과 예언』, 『조선의 풍수』, 『조선의 유사종교』, 『조선의 시장』, 『조선의 취락』 등 다양한 보고서들이 연달아 출판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일제의 조선에 대한 각종 조사사업의 결과는 조선인의 일상생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한 법원(法源)으로, 식민사관의 구축을 위한 기초자료, 일본의 국교(國敎)인 신도(神道)를 조선에 적용시키기 위한 기초 자료 등 다양한 방면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이들 자료는 조선인들에게 조선인의 정체성(停滯性)과 저열성 등을 강조하여 일제의 식민통치가 정당한 것이라는 사상을 주입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아직까지도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굴절된 기록들이 우리 고유의 전통으로 둔갑하여 유포되고 있는 경우도 있다.

맨 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