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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창씨개명정책과 여주지역의 동향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 이후 일제는 조선 내에서 전시총동원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작업으로써 이른바 ‘황국신민화정책’을 취하였다. 황국신민화정책이란 조선인을 ‘황국’의 신민으로 만들겠다는 것으로 조선인을 일본인화하겠다는 것이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이래 일시동인(一視同人)·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일선융합(日鮮融合) 등의 구호를 내세우며 조선인의 동화(同化)를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것에 비추어보면, 황국신민화정책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더욱 강화된 구호를 내세우면서 황국신민화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은 황국신민의 서사 제정,1) 육군특별지원병령, 제3차 조선교육령, 창씨개명 등의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황민화정책 가운데서도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창씨개명이었다.

창씨개명이란 1939년 11월 9일 제령 제19호 「조선민사령 중 개정의 건」과 제20호 「조선인의 씨명에 관한 건」 등 법령의 공포로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6개월 동안 조선인의 일본식 ‘창씨(創氏)’를 강요한 일련의 조치를 말한다. 당시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창씨개명에 맞추어 발표한 담화에서 “동조동근(同祖同根)의 내선(內鮮) 양민족이 혼연일체가 되는 마당에 개인의 칭호를 동일형식에 의거하고자 하는 요망이 대두되는 것으로 보아 질과 표리의 관계인 형식에서도 내선일체의 구현이 고조에 달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동조동근의 양 민족이 동일한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창씨개명은 이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 주장을 뒤집어보면, 창씨개명은 징용·징병 등을 통하여 조선인을 강제동원하였을 때 조선인과 일본인의 칭호가 다른 데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시행되었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사법상에 있어서 내선일체 구현은 씨명의 공통, 내선통혼(內鮮通婚), 내선연조(內鮮緣組)의 3항목을 거론할 수 있다.”고 하여, 사법상의 내선일체를 위하여 씨명을 같이 할 필요가 있으며, 내선의 통혼을 위해서도 창씨개명은 필요한 조치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반도인의 진지하고 열렬한 요망에 대하여 반도인이 법률상 내지인 식의 씨를 칭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은 개정의 중요한 요점”이라고 하여, 미나미 총독은 조선의 친족체계 개편이 조선인의 요망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 말은 창씨개명에 대한 조선인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창씨개명은 미나미 총독의 언급대로 조선인의 ‘열렬한 요망’에 부응해 실시된 것은 아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월별 창씨 신청건수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총 호수 428만 2,754호 중 2월에 창씨를 신청한 호수는 1만 5,746호로 전체의 0.36%에 불과하다. 신청기한 6개월의 절반에 해당하는 5월 20일까지 창씨를 신청한 총 호수는 전체의 7.6%에 불과한 32만여 호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총독부는 자신의 위신을 걸고 친일 지식인을 철저히 이용하는 한편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이 가입하고 있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통하여 강제적으로 창씨개명을 밀어붙였다. 이에 후반부 3개월 동안 약 300만 호를 창씨시켜 창씨호수는 총 320만 116호로 창씨율 79.3%를 달성했다.

조선인들의 강한 문벌의식과 자신의 성씨에 대한 애착을 생각할 때 많은 반발이 뒤따른 것은 당연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6개월 동안 전체 호수의 약 80%가 창씨를 완료했다는 사실은 일제가 이를 얼마나 강제로 집행했는가를 충분히 짐작케 해준다. 이처럼 창씨개명은 조선 민중의 열렬한 요망에 부응해 추진한 것이라는 일제의 주장은 허구에 불과할 뿐이며, 그것을 시행할 때도 관헌을 동원하여 협박을 가하고 강제로 실시한 것이다. 즉 창씨개명은 조선인에게 일본의 천황제적 가족제도를 강요하는 민족말살정책이었으며, 조선 민중의 노동력동원과 징병 등 군사상의 목적에 이용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여주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여주군의 창씨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여주군이 속한 경기도 지역의 상황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창씨개명이 시행되던 당시 경기도의 전체 46만여 호 중 5월 20일까지 창씨를 한 호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전체의 7.1%인 3만 2천여 호에 불과했다. 하지만 총독부의 강압적인 조치로 인해 결국 8월 10일까지 33만 6천여 호, 78.7%가 창씨를 하였다. 이러한 경기도 전체의 상황에서 여주군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1941년 1월 조선신문사에서 발행한 『창씨명감(創氏名鑑)』에 수록된 여주군민의 현황을 살펴보는 것으로 여주지역의 창씨개명에 대한 검토를 대신하고자 한다. 이 책은 조선신문사에서 경기도 각 부·군(府郡)의 조선인 저명인물의 본래 성명과 창씨명, 주소, 직업, 생년월일 등을 망라해 일반의 편의를 제공할 목적으로 발행한 것이다. 1940년 8월 10일 현재의 상황을 정리한 이 책에는 263명의 여주군민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여주군민 263명의 주소는 가남면이 68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금사면 57명, 대신면 55명, 점동면 48명, 북내면 29명, 주내면 2명의 순이다. 그리고 능서면, 흥천면, 개군면, 강천면은 각 1명씩이다. 한편 이들의 직업을 살펴보면, 공리(公吏)가 139명으로 가장 많고, 농업 62명, 지주 46명, 관리 4명, 교원 4명, 면장 3명, 의생(醫生) 2명, 양조업·상업·무직 각 1명순이다. 그리고 이들의 창씨 형태를 보면, 이름은 그대로 두고 성만 바꾼 경우가 173명, 창씨명이 원래의 성명과 전혀 다른 경우, 즉 본래의 성명을 모두 바꾼 경우가 90명이다. 이 책에 수록된 인물들이 어떤 기준으로 선별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의 간행 의도대로 이해한다면, 이 자료에 수록된 인물들은 당시 여주군에서 지역사회의 여론을 만들어가던 사람들일 것이다. 따라서 향후 이들 인물들에 대해 세밀한 조사를 한다면 당시 여주군의 상황을 좀더 풍부하게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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