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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신사건립과 신사참배 강요

명치유신을 통해 천황제를 기축으로 한 근대국가 체제를 수립한 이후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으로 조선을 침략한 일제는, 조선 민중들에게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조선의 각종 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제반 정책을 실시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침략·수탈을 합리화하고, 조선 민중들의 민족의식을 희석시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 관립신사(官立神社)의 설립 계획이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부터 1915년까지 조선신사(朝鮮神社) 신영준비비(新營準備費)를 예산에 편성하여 일본 제국회의(帝國會議)의 협찬을 거쳐서 확정시키고 각 방면에 걸쳐서 조사를 실시하였다. 1913년에는 건축 전문 기술관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 내의 유명한 신사의 구조·형식 등을 조사하여 참고 자료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1914년 1월부터는 총독부의 토목국과 내무부 관계 직원들이 수차례의 합동 회의를 갖고 신사 조영(造營)에 따르는 제반사항을 심의하였다. 여기서 신사의 설립 위치는 경성부 안에 두기로 하고 후보지 여러 곳을 조사한 결과 남산의 한양공원으로 최종 결정하였다.1) 또 제신(祭神) 문제도 상당한 논의를 거쳐 천조대신(天照大神)과 명치천황(明治天皇)으로 결정하였다.

수년에 걸쳐 조선신사 설립에 관한 준비와 기초 조사를 끝낸 조선총독부는 1918년 3월 신사 조영 경비를 4개년 계속비로 예산에 편성하고, 같은 해 12월 조선신사 창립에 관한 청의(請議)를 일본 내각 총리대신에게 제출하였다. 그리고 1919년 7월 18일부로 일본 내각고시 제12호로 조선신사 창립을 확정 공포하였다.2) 그리하여 남산 한양공원 주위에 용지 20만 평을 확보, 1920년 5월 27일 지진제(地鎭祭)를 행함으로써 공사에 들어가 1925년에 완공하였다. 그 명칭도 격을 높여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바꾸었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민간신사(民間神社)를 제도적으로 공인하여 관·공립화하기 위하여 신사에 관한 각종 법령을 마련 신사 제도의 확립에 힘을 썼다. 1915년 8월 16일자 총독부령 제82호로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을 제정 발포하여 모든 신사의 창립과 존폐는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기존의 신사들도 총독의 인가를 받도록 하였다. 또 1917년 3월 22일에는 총독부령 제21호로 「신사(神祠)에 관한 건」을 발포하여 신사(神社)로 공인받지 못한 소규모 집단의 소사(小社)라도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그 관리를 규정하여 보호 육성하였다. 당시 신사(神社)는 숭경자(崇敬者) 30인 이상이 창립 허가를 낼 수 있음에 비하여, 신사(神祠)는 “공중(公衆)에 참배케 하기 위하여 신지(神祗)를 봉사(奉祀)하는 것”으로 10인 이상이면 설립 허가를 얻을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3)

이러한 총독부 방침에 의하여 그때까지 일본거류민들에 의해서 각지에 설립되었던 거류지 신사들의 대다수가 총독부로부터 공인되어 신사(神社)로서 인가되었고, 아직까지 신사가 없던 지방에는 신사(神祠)라도 세우려는 기운이 일어나게 되었다.4) 그 결과 1916년에 17개이던 신사(神社)가 1920년에는 36개, 1925년에는 42개, 1930년에는 49개로 늘어났다. 또한 1917년에 11개에 불과하던 신사(神祠) 역시 1920년에는 46개, 1925년에는 108개, 1930년에는 182개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신사 증가의 영향으로 여주군에서도 주내면(州內面)에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제신(祭神)으로 한 신명신사(神明神祠)가 1929년 7월 16일부로 창립허가를 얻어 설립되었다. 당시 경기도 지역에서는 광주군 중대면과 시흥군 영등포읍의 신명신사가 1917년 11월 27일에 창립허가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신사(神祠) 설립이 본격화되었다. 이어 설립된 부천(1917), 포천·파주·용인(1918), 고양·진위·안성(1922), 연천·장단·수원(1924), 강화(1925), 이천(1927), 여주·양주·부천(1929) 지역의 신사(神祠)를 포함해 1930년까지 경기도 지역에는 모두 17개의 신사(神祠)가 설립되었다.5) 이후 신사는 계속적으로 설립되어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6월 말에는 경기도 234개 부읍면(府邑面)에 7개의 신사(神社)와 155개의 신사(神祠)가 존재했다.6)

이처럼 일제는 한국의 국권을 완전히 강탈하고 본격적인 식민지 경영에 착수함과 동시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비롯해 각 지역에 신사(神社·神祠)를 설립하고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특히 1930년대 접어들어 농촌진흥운동과 더불어 정신교화·심전개발(心田開發) 운동을 권장한 일제는 조선 민중을 대상으로 황국신민화 정책을 실시하는 가운데 신사 중심의 활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총독부에서는 각 도에 통첩을 보내 신사의 설립을 행정적으로 지원하게 하는 한편, 신사를 지을 때도 토지를 강제로 수용할 수 있도록 토지수용령을 개정하였다. 또한 1936년 8월 신사에서 도·부·읍·면(道府邑面)으로부터의 신찬폐백료(神饌幣帛料)를 받을 수 있도록 하여 신사의 관공립적 성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신사제도를 개정하였다. 그리고 총독부에서는 1면(面) 1신사 정책을 추진하여 전국 각지에 신사의 건립을 장려하였다. 이러한 제반 정책에 힘입어 각지에 신사 설립이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해마다 신사를 중심으로 한 행사나 참배자수가 급증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학교는 물론 종교단체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결국 신사참배 강요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여 조선인을 모두 ‘충량한 제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조선총독부 지배정책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었으며, 이것이 전시 총동원체제하에서는 애국반 등 각종 조직을 통해 더욱 강제적인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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