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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국민총동원체제의 창출과 사회경제적 수탈

일제는 1930년대 중반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시작하면서 일본 내에서의 체제정비와 함께 식민지에서 인적·물적 지원을 받기 위해 식민지 지배체제를 이른바 전시동원체제로 바꾸어나갔다. 이것은 조선에서 국민정신총동원운동·국민총력운동이라는 명칭으로 추진되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도발한 이래 국가체제를 본격적인 전시체제로 전환한 일제는 1938년 5월부터 ‘국가총동원법’을 조선에서도 시행하였다. 이 법의 목적은 “국방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국가의 전력(全力)을 가장 유효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인적·물적 자원을 통제 운용하는 것”이었다. 결국 조선에서 전시체제로의 전환은 황국신민화, 내선일체의 기치 아래 인적·물적으로 조선을 총동원하는 이른바 병참기지정책의 실시로 나타났다. 조선인들을 직접적으로 전시체제에 동원하기 위한 제반 조치들이 취해진 것이다. 그 하나가 국민생활 통제의 모체로 1938년 7월에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1937년 8월에 국민정신총동원 실시요강이 결정되고,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중앙연맹이 결성되었다. 이 운동의 취지는 국민들에 대한 사상통제와 자발적인 전쟁협력 분위기를 고취하는 데 있었다. 실질적으로는 관제운동이었지만 자발적인 민간운동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각종 민간단체들을 총망라하여 중앙연맹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에 보조를 맞추어 그 이듬해 조선에서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만들어진 것이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1938년 6월 22일 발기인회, 7월 1일 창립총회를 열어 연맹의 취지 및 규약을 결정하고, 임원에 총재, 이사장, 이사, 평의원, 고문, 참의를 두기로 하였다. 이어서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 1주년이 되는 날 조선연맹과 경성부연맹의 발회식을 합동으로 열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그리고 경성부연맹과 강원도연맹 등을 시작으로 한 지방조직의 결성은 9월 18일까지 모두 마쳤다. 조선연맹의 하부조직으로는 행정단위를 기본으로 하는 도연맹, 부·군·도(府郡島)연맹, 읍면(邑面)연맹, 정·동·리 부락(町洞里部落)연맹 등의 지방연맹과 관공서, 학교, 회사, 은행, 금융조합, 공장, 상점 등에서 그 소속인원으로 구성되는 각종 연맹(일종의 직장연맹)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조선인들의 모든 생활을 구석구석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정동리부락연맹과 각종 연맹 밑에 10가구를 단위로 애국반을 만들고 세대주가 반원이 되게 하였다. 이처럼 조선에서의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출범 직후부터 말단 행정단위를 기본으로 하여 주민 조직을 결성하는 데 많은 노력이 집중되었다. 그 결과 1939년 6월 현재 전국 34만여 애국반에 462만여 명의 반원이 조직되었다. 일본의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 시정촌(市町村) 단위의 조직이 없이 출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렇게 말단에 이르는 조직망이 식민지 조선에서 먼저 이루어진 이유는 무엇보다도 대륙침략정책의 수행에서 조선이 가진 위치, 즉 병참기지의 역할을 담당해야 할 조선에서 적극적인 협력을 이끌어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해진 때문이다.1) 이러한 성격을 갖고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①황국정신의 현양(顯揚) ②내선일체의 완성 ③생활의 혁신 ④전시경제정책에의 협력 ⑤근로보국 ⑥생업보국 ⑦총후(銃後)의 후원 ⑧방공방첩 ⑨실천망의 조직 및 지도의 철저 등을 강령으로 내걸고, 황궁요배·신사참배 등 21개의 실천요목을 두었다.

한편 여주군에서도 중앙에서 조선연맹이 결성되던 날인 1938년 7월 7일 국민정신총동원여주군연맹이 결성되었다.2) 결성된 날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여주군에서는 중앙에서 조선연맹이 준비된 것과 같은 시기에 여주군연맹의 결성이 준비되었다. 여주군연맹의 장(長)에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여주군수가 취임하였으며, 바로 위의 상급연맹인 경기도연맹에 가맹하였다.

1939년 7월 현재 여주군에는 10개 면연맹과 294개의 리·부락연맹, 9개의 각종 연맹(직장연맹)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애국반은 1,138개가 만들어졌으며, 총 1만 1,289명의 애국반원이 있었다. 세대주가 반원인 점을 고려하면, 당시 여주군의 대부분 세대가 애국반에 가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여주군연맹을 비롯한 각 지방연맹은 이 애국반을 기저조직으로 하여 궁성요배(宮城遙拜), 근로저축을 당면의 필수사항으로 하였으며, 매월 1일을 애국일로 정하여 시국에 대한 인식, 국체명징, 내선일체의 철저를 더욱 강화하였다.3) 각 가정에서도 매일 아침 궁성요배를 하게 하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얼굴을 씻고 몸을 깨끗이 하고서 가족과 함께 궁성을 향해 절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봉송하는 궁성요배는 현재의 신인 천황에 대한 감사의 예를 드리고, 그런 신이 규정한 생활의 질서를 지켜 살아야 하며,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것은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못박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애국반은 단순히 연맹의 하부조직의 하나로 그치지 않고 전체 조선인의 생활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감시하는 조직으로 기능하였다. 일제의 전시 총동원체제는 일반 주민들의 생활 전반을 철저히 통제하는 것에서 시작한 것이다. 또한 연맹은 국민정신총동원 강조주간, 후방보국 강조주간, 저축보국주간, 경제전(戰) 강조주간, 후방후원 강조주간, 연말연시 보국강화주간, 일본정신 발양주간, 보은감사주간, 근로보국주간 등 각종 주간행사를 계속 만들어 실천을 강요함으로써 힘겨운 침략전쟁을 이끌기 위한 조선인에 대한 통제를 지속하였다.

그러나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대한 조선인들의 ‘자발적’ 참여는 일제가 처음에 의도한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결국 일제는 좀더 강력한 조선인 통제를 통해 자신들이 의도하는 상황과 실제상황과의 괴리를 메우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 국민총력운동으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1940년 10월 일본 내에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를 중심으로 한 신체제운동으로 변하는 가운데 조선에서도 이와 보조를 맞출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조선에서의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조선에서 일종의 신체제 확립을 위한 국민총력운동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1940년 10월 16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전환되었다. 이것은 종래의 운동이 일종의 정신운동에 치중되었던 것에 비해 인적·물적인 측면에서 실질적으로 침략전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드는 것에 좀더 비중을 둔 것이었다. 전쟁수행을 위한 체제확립에 조선 민중들을 직접 참여시킬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국민총력운동의 조직은 표면적으로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조직체계를 거의 그대로 수용하는 형태를 취했다. 중앙과 지방조직 모두 그 이름을 바꾸어 전환시켰던 것이다. 이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경우는 민간인이 조선연맹의 총재였던 데 비해 국민총력운동에서는 연맹 총재에 조선총독이, 부총재에 정무총감이 직접 취임함으로써 명목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었던 민간운동으로서의 성격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운동의 기본방침을 심의 결정하기 위한 국민총력운동지도위원회가 총독부 내에 조직되어 위원장에는 정무총감이, 위원에는 각 국장·관계 과장·조선군 관계자 등이 참여하였다. 이런 현상은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연맹은 도지사가 회장, 내무부장이 이사장, 경찰부장·산업부장 등이 이사를 맡는 형태로 운동의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그 이하 조직의 경우도 각각 그 행정기구의 장을 연맹조직의 장으로 하여 구성되었다. 이처럼 국민총력운동은 총독부의 전조직이 총동원되었으며, 행정조직과 완전히 일체화하여 운동을 진행시켜나갔다.

애국반은 종래의 형태대로 유지되었다. 1942년 4월 현재 전국 36만여 애국반에 448만 명의 반원이 있었다. 세대주가 반원인 점을 고려하면 당시 조선인 모두가 여기에 망라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회사·은행·공장·광산·대상점 등의 단체와 관공서·학교에서도 각종 직장연맹이 조직되었다. 1943년 8월에는 직장연맹의 애국반을 사봉대(仕奉隊)로 고치고, 대·중·소대로 편성하여 직장을 하나의 전투적 조직으로 만들었다. 또한 연맹은 애국반 단위의 상회(常會)를 정례화시켰다. 당시 애국반 활동과 관련하여 주민 모두가 참가하는 집회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였다. 매월 1일에 개최되는 애국일 상회와 매월 7일(이후 10일로 변경)에 개최되는 애국반상회이다. 상회가 개최되는 장소는 각각 달라도 진행 순서는 라디오방송을 이용하여 동시에 진행할 수 있도록 표준화되었다.4) 그리고 애국반을 통해 근로동원, 저축, 공채의 소화 등을 수행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이 조직을 물자 배급과 연결시킴으로써 애국반 조직에 소홀한 조선인들에게는 생활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특히 상회 활동은 상부의 각종 행정지침과 활동방침 등이 개개인에게까지 침투되는 통로로서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이처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일제가 중일전쟁 이후 점차로 침략전쟁을 확대하면서 조선에서도 전쟁동원체제를 구축하고 조선인들을 전쟁에 적극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였다. 이들 단체는 조선인에 대한 사상적 통제와 황민화작업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으며, 이를 통해 조선인의 반발심을 무마하고 전시동원에 대한 협조 분위기를 고취하고자 했다. 전국의 모든 촌락 단위에 이르기까지 짜여진 이들의 조직망 속에 조선인들은 얽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조직망을 통해 조선에서 전시 총동원체제를 구축한 일제는 전쟁인력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고(1938. 2), 조선 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하였다. 지원병제도로 시작한 청년들의 전쟁동원은 1943년 학도지원병제도를 강행하여 학생들마저 전쟁터로 내몰고, 마침내 1944년에 징병제를 실시하여 일제가 패전할 때까지 약 20만 명의 조선 청년들을 징집하였다. 또한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에 의거해 필요한 노동력을 강제 징발하였다. 징발된 사람들은 아주 열악한 환경의 광산, 건축 토목공사장, 군수공장 등에서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가운데 힘든 노동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일제는 이 시기에 여성들도 전쟁에 강제 동원하였다.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동원된 여성들 가운데 일부는 일본과 조선의 군수공장에서 강제 노역을 당하였고, 또 다른 여성들은 전쟁터로 보내져 군위안부로 이용되었다.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된 조선 여성들은 현재 20만 명 정도로 추산될 뿐 정확한 인원조차 파악되고 있지 않다. 이들 여성들은 많은 사람이 전쟁 중에 희생되었고, 이후에도 전쟁 중 입은 정신적·육체적 피해를 극복하지 못한 채 불행한 삶을 영위하여 왔다. 이처럼 1930년대 중반 이후 전시총동원체제를 구축한 일제는 조선에서 각종 전쟁 물자는 물론 모집, 징용, 보국대, 근로동원, 정신대, 일본군위안부 등을 통해 노동력을 강제 수탈하는 등 조선인에게 많은 희생을 강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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