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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1930년대 이후 지주소작제의 실태와 소작쟁의

지주소작제는 1920년대에 이미 여주에서도 심각한 모순을 드러내고 있었다.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식민지 지주제의 모순은 폭발 일보 직전으로까지 치닫게 된다. 지주소작제의 모순과 이로 인한 농민 몰락, 농촌 분해의 현실을 그대로 두고는 더 이상 식민지 통치가 불가능할 정도로 한반도 곳곳에서 소작쟁의와 적색농민조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총독부에서는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이른바 ‘농촌진흥운동’을 정책으로 수립하고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는 실질적으로 전시효과를 노린 것 이상이 되기는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독부가 농촌진흥운동과 함께 ‘소작령’을 통해 지주제의 모순을 일정 정도 완화하는 정책을 수립해서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지주소작제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여주의 경우도 식민지 지주제의 문제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는 지주와 소작농민의 존재를 살펴보고 결국 소작쟁의로 귀결되었던 당시의 사정을 검토하려고 한다.

우선 대지주의 존재부터 살펴보자. 여주 내 대지주의 토지소유 상황을 알려주는 자료는 현재로서는 1938년 5월에 작성된 「경기도지주명부(京畿道地主名簿)」가 유일하다(단, 조사 내용은 1937년 6월 말 현재 상황임). 이 명부는 30정보 이상 소유 대지주를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다.

「경기도지주명부」에 의하면 여주 내 농지를 소유한 지주로 기재된 사람들은 크게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재지지주(在地地主)로서, 여주 내에 거주하면서 여주 내에서 30정보 이상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둘째는 경성의 부재지주로, 거주지는 경성이지만 여주 내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경우는 여주 내 소유 농지가 반드시 30정보 이상일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경기도 수준에서 30정보 이상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으면 명부에 기재되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도외(道外) 지주, 일본인지주, 특수지주 등으로 도외지주는 말뜻 그대로 경기도 이외의 도에 거주하면서 여주 내에 농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특수지주는 회사, 학교, 사원 등을 가리킨다. 이 세 그룹에 속한 대지주 명단과 주소 그리고 그들이 소유농지면적 및 소작인 수를 제시한 것이 (표 16), (표 17), (표 18)들이다.

여주 내 농지 소유와 관련 있는 대지주들의 특성을 살펴보기 위해서 위의 세 표를 기초로 작성한 것이 다음의 (표 19)다.

(표 19)에서 우선 각 그룹별 지주 수와 평균 농지소유면적을 보면, 재지지주는 15명으로 평균 55.9정보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경성의 부재지주는 38명으로 수적으로는 가장 많은데, 평균 소유면적은 50.4정보로 세 그룹 가운데서는 가장 적다. 마지막으로 도외·특수지주는 8명으로 평균 52.5정보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61명의 대지주 평균소유면적은 약 52정보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지주의 다수는 50정보 이하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100정보 이상을 소유한 대지주가 넷씩이나 존재하면서 평균소유면적 규모를 크게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비록 100정보 이상의 대지주가 4명이 있었지만, 다수의 지주가 50정보 내외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1930년대 여주 내의 식민지 지주제가 소수의 거대지주 혹은 초거대지주를 중심으로 발달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중소지주를 중심으로 발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주 내 지주제의 이러한 특징은 당시의 지주들이 거의 대부분 조선인이었던 사실과 일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주 내 지주의 면면을 보면 일본인지주가 한두 명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인이다. 그런데 식민지 지주제의 확대를 주도하고 있던 것은 일본인지주·자본가들이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조선에서 토지를 매입한 일본인지주·자본가는 30정보 이상의 대지주가 되면 1인당 평균 소유면적이 한국인지주의 그것보다 3배나 되었으며, 500정보 이상의 초거대지주가 되면 일본인지주는 그 수에 있어서도 한국인지주수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인지주는 1920년대 중반을 분수령으로 모든 토지소유계층에 걸쳐 점차 쇠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일본인지주의 수는 그 후에도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1)

그러나 이처럼 식민지 지주제 확대의 중요한 축이었던 일본인지주 자본가들에게 경기도내에서의 토지겸병에는 여타 지역에 비해 제약이 존재하였다. 경기도는 대대로 서울의 고위관료와 대상인 등 상당한 재력가들의 집중적인 토지매입지역이었다. 이들은 식민지에서도 많은 경우 재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중소농 혹은 빈농의 경우와는 달리 생활고로 인한 토지방매가 활발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런만큼 경기도내에서 일본인들의 토지겸병 기회는 영호남 혹은 북선(北鮮)지방에서의 그것에 비해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여주 내 농지소유자의 대부분이 조선인 지주, 그것도 경성의 부재지주들이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대지주 소유농지의 논밭비율을 보면, 61명 대지주의 평균 논밭비율이 72% 대 28%였다. 이는 (표 9)에 보이는 여주 내의 평균 논밭비율 56.7% 대 43.3%과 비교하면 논의 비중이 매우 높은 것이다. 세 그룹 모두에서 여주 평균의 논밭비율을 상회하는 가운데서도 특히 둘째 그룹인 경성의 부재지주들은 논 편중이 더욱 심하여서 75% 대 25%의 수치를 보이고 있다. 이는 당시 대지주들의 토지겸병이 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러한 특징은 개별지주가 사례에서도 확인되는 특징이다. 즉 당시의 대지주들은 논을 집중적으로 매입함으로써 농지규모를 확대하고, 그리고 거기에서 거둔 미곡을 상품화함으로써 자본 축적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대지주의 존재는 다수의 소작농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1920년 당시 여주 내 순소작농의 비중이 46%에 이를 정도로 식민지 지주제는 소작농을 불가피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 자체가 지주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사정에 더해서, 중세적인 지주소작제를 온존시킴으로써 경영의 합리화를 극대화하고, 이를 통해 최대한으로 수탈해가려는 식민지의 농정책이 그대로 관철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주의 경우도 소작농의 문제는 심각하였다. 당시의 소작문제를 엿볼 수 있는 자료로는 1932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출간된 『조선의 소작관행』을 들 수 있다. 이 책에는 여주의 소작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몇 가지 통계 수치가 게재되어 있다. 우선 1930년을 전후한 시기 여주의 농업경영에 있어서 경영형태별 호수 및 그 비율을 보면 다음 (표 20)과 같다.

1930년을 전후한 시기 여주의 소작문제가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1920년 무렵의 그것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1920년 무렵의 경영형태 별 호수를 보여주는 (표 7)에 의하면 자작농·자작겸소작농·소작농의 비율이 10%·41.3%·46.4%였다. 그런데 10여 년 정도가 지난 1930년 무렵에는 위의 표에서 보듯이 4.7%·29.3%·66%로 나타나고 있다. 자작농과 자작겸소작농이 크게 감소한 반면 소작농은 이 두 계층에서의 감소분을 흡수하여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1920년대라는 10년 동안에 농촌분해, 농민몰락의 현상이 크게 악화되고 있던 저간의 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식민지 지주제하에서 급격히 증가하고 있던 소작농들의 실제 농업경영은 어떠한 모습을 띠고 있었을까. 이러한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보기 위해서 제시한 것이 다음의 소작농민 관련 각종 통계수치들이다. 우선 소작농 1호의 소속 지주 및 소작지면적을 보면 다음의 (표 21)과 같다.

(표 21)을 보면 당시 여주의 소작농들은 보통 3명의 지주에게서 소작지를 차경(借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면적은 보통 1.5정보(4,500평)였고, 그 가운데 밭의 면적은 약 5반보(1,500평)였다. 소작지 차경이 가장 열악한 경우는 2반보 즉 600평에 그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소작농은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할 것이다. 소작지 차경에서 탈락해서 농업노동자로 살거나 혹은 고향을 등져야 했던 사람들이 이 시기에는 많았기 때문이다.

여주의 소작기간의 대강을 보여주는 것은 다음의 (표 22)이다.

소작기간을 보면 여주의 경우 논밭 모두 부정기 소작 비율이 경기도 평균을 상회하고 있고, 전국 평균과 비교하면 그 상회 정도가 더욱 크다. 경기도는 부재지주가 많았기 때문에 부정기소작이 전국 평균보다는 높다는 특성이 있는 가운데, 여주는 경기도 평균보다도 더욱 높은 부정기 소작 비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기 소작은 강점 이전에는 영소작의 성격을 어느 정도 갖고 있으면서 소작농에게 유리한 점이 없지 않았지만, 식민지 지주제로 편입되면서는 소작농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지주의 뜻에 따라 잦은 소작농민 교체로 농업경영이 극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소작료는 어느 정도 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 다음의 (표 23)을 보자.

생산고에 대한 소작료 비율을 보면 우선 여주의 경우에 타조가 조사되어 있지 않은 점이 눈에 띤다. 타조방식의 납부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조사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경기도내에서 타조가 조사되지 않은 지역은 여주가 유일하다. 타조가 없다는 것 역시 부재지주의 존재와 크게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소작료율을 보면 최고의 소작료는 수확량의 72%를 거두어가는 것이었고, 최저의 소작료는 수확량의 40%를 수취하는 것이었다. 보통은 50%, 즉 병작반수의 소작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실제의 소작료 수취는 50% 이상이었을 것이다. 잡다한 공조(公租) 공과와 수리조합비 등을 소작인에게 전가하는 것이 당시의 하나의 관습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제 부담을 감안하면 보통의 소작료율도 50%를 상회하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소작료 납부방법을 보면 다음의 (표 24)와 같다.

제국주의 국가에게 식민지 조선의 경제적 위치가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였기 때문에 현물납의 비중이 높았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전국적으로 그리고 경기도 차원에서도 모두 현물납이 90%를 상회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현물납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여주의 경우는 소작료 납부방식으로 현물납이 100%를 차지하고, 대금납이나 금납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주 지역에서는 소작료를 현물인 쌀 혹은 나락으로 내는 것이 하나의 철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열악한 소작관행 속에서 농사를 지어야 했던 소작농들의 실제 생활 수준은 어떠했을까. 당시 소작농의 실제 생활 정도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현재로서는 없기 때문에 춘궁 농가 호수와 그 비율을 검토해봄으로써 간접적으로 소작농민들의 생활수준을 살펴보자. 이를 위해서 제시한 것이 다음의 (표 25)이다.

(표 25)를 보면 1930년 무렵 여주 내 소빈농의 경제적 상태가 지극히 불안하였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자작농을 제외하면 자작겸소작농과 소작농은 경기도 평균과 전국 평균의 춘궁민 비중을 크게 앞지르고 있다. 이는 그만큼 여주 내 소작농의 경제적 상태가 전반적으로 열악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소작농의 경우는 무려 88%가 춘궁농민이고, 일반 농민의 70% 정도가 춘궁농민이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정도가 되면 소작농민의 존재, 다시 말하면 식민지 지주제의 문제가 단순히 경제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이를 넘어서서 정치사회적인 문제로 비화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소작농민들은 식민지 지주제의 문제에 대해서 한없이 인내심을 발휘하지는 않았다. 소작농민들은 저항의 한 형태로 소작쟁의를 빈번하게 일으켰다. 1930년대 여주 내에서 발생한 소작쟁의 통계를 보여주는 것이 다음의 (표 26)이다.

1930년에서 1939년 사이에 여주 지역에서 소작쟁의는 무려 357건이 발생하고 있었다. 총 발생건수를 보면 여주 인근 지역의 그것보다 많은 편이 아니다. 그러나 1930년에 경기도내에서 발생한 소작쟁의의 절반 이상이 여주에서 발생한 사실이 주목된다. 1931년에도 발생건수는 11건이지만, 경기도내에서 54건이 발생하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이 역시 주목되는 사실이다. 그런데 1930년과 1931년 이후 소작쟁의가 1932년을 제외하고 계속 발생하고 있었지만, 인접 군의 그것에 비하면 빈번한 것은 아니었다. 이를 보면 1930년~31년에 발생한 여주 내의 소작쟁의의 구체적인 배경과 그 주체, 성격 등은 알 수 없지만, 이후 여주에서 소작쟁의의 전개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1930년대 다발하고 있던 소작쟁의의 성격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 대규모적이고 전투적인 것은 소수였고, 일반적으로 소수의 소작인이 지주 혹은 마름에게 소작료 인하 및 소작기간 보장 등을 요구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요구들은 1930년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1933년 농지령과 소작쟁의조정법 등이 만들어지면서 소작농민들의 요구가 법의 테두리로 들어오게 되면서 공식 통계로 잡히게 된 결과 수백 건에 이르는 소작쟁의 발생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상으로 살펴보았듯이 일제강점기하에서 여주는 식민정책에 의해 경제구조가 크게 재편되어갔다. 그것은 작물재배에서 재래품종의 쇠퇴와 신품종의 보급, 토지조사사업 결과 경지 면적의 확대 등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식민지 지주제가 굳게 존립하는 상황에서 토지가 소수의 대지주에게 집중되면서 대다수의 농민은 농토에서 배제되어 소작농민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농지를 차경(借耕)할 수조차 없는 이들은 고향을 떠나 각지를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해야 했다. 지주소작제의 심각한 문제는 통치 당국자들도 인식하고 있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지주제가 온존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대부분이 미봉책에 그칠 뿐이었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지주제의 타파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식민지하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고, 결국 해방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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