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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1920년대 사회경제구조의 변화

1910년 일제의 식민지화와 그에 따른 식량 공급지로서의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수행된 수탈농정에 의해 여주의 경제구조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아래에서는 그 변화의 여러 양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이를 위해서 식민지가 된 후 10년 정도가 지난 1920년의 여주 상황을 싣고 있는 『경기도사정요람』을 주로 참고하면서 논의를 전개하려고 한다.

우선 1920년의 여주 농업종사자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표 8)이다.

우선 농업 호수를 보자. 위의 표에 의하면 1920년 당시 여주의 농업 호수는 1만1,413호였다. 이는 (표 1)에 나와 있는 1916년의 호수 1만1,308호보다는 105호가 많고, 1925년의 호수 1만 2,040호보다는 627호가 적은 수치이다. 1925년 국세조사의 수치가 정확하다고 하면, 1920년의 농업종사 호수 1만1,413호는 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1925년의 총세대수가 1만2,040호이므로 1920년의 농업종사 호수의 비중은 1925년과 비교하여도 95%를 상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1만 호 내외의 호수가 1920년 당시 여주 내에서의 농업종사 호수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임은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전업·겸업 농가 호수를 보면, 전업 호수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전업의 비중은 경기도 전체의 평균과 비교해도 매우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전업농가가 많다는 것은 부업 혹은 여타 부문에 관여하는 바가 그만큼 적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농외소득을 기대할 수 없었을 터이고, 그런만큼 자연재난 등에 의한 경제적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하겠다. 즉 농사를 망치면 호구지책을 찾을 곳이 달리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1920년 당시 여주의 경제적 계층분화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 지주·자작·자소작·소작별 농가호수이다. 우선 여주 내의 지주가 경기도내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작 역시 거의 절반에 가까운 높은 수치를 보이면서도 경기도 전체에서의 비중을 비교해보면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반면 자작과 자소작농이 비율은 경기도 전체의 그것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층이 두터움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을 종합해보면 1920년 당시 여주의 계층분화 정도는 경기도의 평균 수준보다 덜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소중농층이 상대적으로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소작호수 46%는 상대적으로 적을 뿐 절대적으로 봤을 때는 매우 높은 수치라고 점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다음으로 식민지 이후 여주 내의 경지에 어떠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다음 (표 9)이다.

(표 9)에서 여주의 경지면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1920년 당시 논과 밭을 합한 여주의 전체 경지 면적은 1만 8,891정보였다(위의 표의 수치는 단보이기 때문에 정보로 환산). 이는 1909년 당시의 6,809.2정보((표 3) 참고)와 비교하면 무려 1만 2,802.4정보나 증가한 수치이다. 대략 10년 사이에 경지가 2배 정도 증가한 셈이다. 10년이란 기간에 1만 정보 이상의 경지가 증가하였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데, 이를 설명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1918년 토지조사사업의 종료이다.

토지조사사업은 1910년부터 1918년에 걸쳐 2,040여만 엔의 경비를 들여 토지소유권·토지가격·지형지모(地形地貌)를 조사함으로써 식민통치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었다. 사업의 가장 큰 역사적 의미로는 근대적 토지소유제도를 확립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사업은 모든 조사대상 필지에 대하여 일물일권적인 토지소유권을 확정하였으며, 나아가 토지소유권자에게 지가 기준의 지세를 부과하는 원칙을 설정함으로써 새로운 지세제도를 창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제도변화 자체는 근대적 성격을 띠지만, 이 제도들이 일제의 식민정책 수행에 봉사하는 성격을 가진 것이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1) 즉 근대적인 토지의 사적 소유권이 법적으로 확인됨으로써 토지의 상품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는 영세한 자영농, 소농 혹은 빈농들의 토지 방매와 조선인과 일본인을 불문한 대지주의 토지겸병을 촉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농촌사회분해의 하나의 기점이 되었던 것이고, 이후 일제강점기 농촌사회 해체, 농업문제 발생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사업이다.

여하튼 사업이 완료된 결과 1차계획 수립 당시 예정했던 276만여 정보, 1,378만여 필지를 훨씬 넘는 487만여 정보, 1,911만여 필지의 토지가 조사되었다. 이 결과는 1910년 말의 경지면적과 비교하면 논은 83.8%, 밭은 79.1% 증가하여 경지 전체로는 80.7%의 증가율을 보였다. 이와 같은 면적 증가는 은결이나 신개간지의 조사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1910년 말의 경지면적은 양안상의 결수에 의해 산출된 것이다. 이 결수의 산정이 실제 면적에 비해 낮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1910년 말의 경지면적은 실제보다 과소평가되었고, 그것이 사업에 의해 경지가 급증한 것처럼 보이게 한 요인이었다.2) 여주의 절대 면적 증가는 이와 같은 토지조사사업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920년 당시 여주의 경지면적은 토지조사사업 결과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논과 밭의 비중을 보면 논의 비중이 56.7%, 밭의 비율이 43.3%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비중 역시 강점 직전인 1909년의 75% 대 25%와 비교하여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10년 사이에 논밭의 비율이 자연적인 요인에 의해서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것인지는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1909년도의 통계수치의 정확성에 문제가 있었을 수 있다. 또 1914년 지방제도 개정시에 타군의 밭농사 중심지역이 여주군 내로 편입되고, 반면 논농사 중심지역이 타군으로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추측건대 강점 이후 일제가 조선의 쌀을 집중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밭을 논으로 만드는 농지개량사업을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었음에도 밭의 비중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을 보면, 1909년 당시의 통계의 정확성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된다.3) (표 9)에 의하면 여주는 경기도내에서 논의 비율이 평균보다 약간 높게 나타나고 있어서 논농사 중심의 답작지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에 못지 않게 밭의 비중도 컸다. 그리고 논의 경우는 일모작이 압도적인 것으로 나타나서, 거의 대부분의 논에서는 일모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4)

다음으로 여주지역 농민들의 계층분화 상태를 볼 수 있는 자소작별 면적을 보면, 무엇보다도 눈에 띠는 것은 논에서 소작지의 비율이 대단히 높다는 점이다. 그 비중은 무려 70%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수치는 1920년도에 이미 지주소작관계가 상당히 발달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점은 여주의 소작지 비율 70%가 경기도 전체에서 보면 오히려 평균을 밑돌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논농사의 경영은 소작제에 의한 것이 압도적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소작제의 발달은 일제 강점에 의해서 단기간에 확산된 것은 물론 아니다. 조선 후기 이래 지주전호제는 꾸준히 확대 추세에 있었다. 그리고 개항 이후에는 미면무역체제가 확립되면서 대지주, 대상인, 관료들의 토지투자와 그 겸병은 더욱 극성하였고, 여기에 일본인들 역시 가담하여 지주소작제는 가일층 확대된다. 이러한 지주제 확대의 흐름은 일제하에서도 식민통치 당국자들이 적극적으로 지주 자본가를 육성 보호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그리고 지주제의 존속을 의도적으로 방치하면서 그 절정에 달하게 된다. 이러한 일반적인 역사 흐름이 여주에도 그대로 관철되어 소작농의 비중이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다. 한편 밭농사에서는 지주소작관계가 논농사에서만큼 발달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비율은 40%에 육박하고 있어서, 밭에서도 소작제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밭농사에까지 지주소작제가 확대되었던 배경의 하나로, 경기도 농지의 많은 부분이 서울의 부재지주 소유와 관계가 깊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다음으로 1920년에 들어서면서 미작면적과 그 수확고에 어떤 변화가 있게 되는지를 살펴보자. 이를 위해서 제시한 것이 (표 10)이다.

1920년 당시의 미작면적을 강점 직전의 상황을 보여주는 (표 4)와 비교해보면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절대면적의 증가를 지적할 수 있다. 1920년대의 면적의 단위는 단보(300평)이기 때문에 강점 직전의 면적 단위인 정보(3,000평)와 비교하기 위해서는 면적을 전체적으로 10으로 나누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여주 메벼의 면적은 9,946.4정보, 찰벼는 804.4정보 등이 되며, 여주 전체의 면적은 1만 806.6정보가 된다. 이는 강점 직전의 5,100정보와 비교하면 여주 전체의 면적이 10년 사이에 거의 두 배 정도가 증가한 셈이다. 절대면적 증가는 비단 여주에 한정된 현상이 아니었다. 경기도 전체를 보아도 강점 직전에는 7만 8,971정보였던 것이 1920년에는 20만 1,540.7정보로 나타나고 있어서 2.5배 정도의 면적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여주의 면적증가를 상회하는 수치이다. 절대면적의 급증과 그에 따른 수확고의 증수(增收) 이면에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토지조사사업의 종료가 놓여 있었다.

다음으로 1920년대 여주의 미작면적 및 수확고에서 두드러진 또 하나의 특징은 찰벼의 비중이 급속히 감소한 것이다. (표 4)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강점 직전까지만 해도 여주는 경기도 내에서도 유명한 찰벼 산지로서 면적의 24%, 수확고의 20%를 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10년 정도 지난 1920년이 되면 그 비중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경기도내에서의 비중이 6%대로 급감하고 있다. 10년 동안의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앞서 살펴보았듯이 1909년 당시의 통계수치에 부정확성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전적으로 수치의 오류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는 없다. 위의 통계수치가 당시의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면, 1909년과 비교한 찰벼 비중의 급감을 초래한 원인의 하나로 일제의 수탈농정을 지적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일제는 정책적으로 찰벼의 재배를 억제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찰벼의 비중이 경기도 전체 차원에서도 크게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찰벼 비중의 감소가 비단 여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경기도 전체 차원에서 진행된 결과였고, 그런 가운데 특히 비중이 높았던 여주의 경우 더욱 급속하게 감소하였던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찰벼 재배의 억제와 짝을 이루어 추진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이 일제에 의한 이른바 ‘우량품종’ 재배의 권장이다. 뒤에서 보듯이 일제는 1910년대부터 미곡을 수탈해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우량품종을 적극적으로 보급해나갔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조선총독부의 산미증식계획 추진으로 나타났다.

산미증식계획은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1920년대에 입안하여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이미 1910년대부터 농사개량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농사개량사업은 신품종의 보급·교체, 화학비료 증투, 경종법 개선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 이 가운데 신품종의 보급·교체를 살펴보면, 신품종의 작부면적은 1920년 이미 57%에 달했고, 1925년 70%, 1930년 72%, 1935년 80%, 1940년 89%였다. 즉 식민지기를 통하여 조선의 재래품종은 대신하여 일본의 신품종이 거의 모든 논에 식부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신품종 보급은 1910년대 급격히 진전되었다. 신품종의 보급과정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특징은 신품종 자체도 소수의 품종으로 교체·통일되어갔다는 점이다. 우량품종 가운데 상위 다섯 품종의 작부면적은 논 총면적의 1920년 47.5%에서 1930년 52%, 1940년 65%로 증가하였고, 특히 1920년대에 비해 1930년대에 그 신장률이 훨씬 급격했다. 또한 상위 5품종 중에서도 시기가 지남에 따라 일정한 교체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1920년대 전반기까지는 조신력과 곡량도가, 1920년대 후반기에는 곡량도와 다마금이, 1930년대 전반기에는 곡량도와 은방주가, 1930년대 후반기에는 은방주와 육우(陸羽) 132호가 가장 많이 재배되는 대표적인 주요 품종으로 각각 부각되었다.5)

이러한 총독부의 농업정책 방향은 여주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1920년에 이미 적지 않은 면적에서 우량품종의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 다음의 (표 11)이다.

(표 11)에서 보듯이 이미 1920년 현재 이미 신품종, 이른바 ‘우량품종’의 재배면적이 5,373정보에 달하여 재래종 재배면적 약 1만 정보의 절반에 육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10년이란 기간에 여주 논의 1/3 정도에서 신품종이 새롭게 재배되기 시작한 것인데, 당시 일제가 농업생산력 확충이라는 명목, 실제로는 미곡 수탈을 위해서 재래종을 급격히 배제해 나가면서 일본종의 보급에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여주에서의 신품종 보급정책은 경기도 전체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경기도 전체에서 보면 5개의 신품종의 비율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비교적 고르게 분포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주의 경우는 조신력이 70%를 점하고 있어서, 조신력의 비중이 상당히 크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경기도 전체에서의 신품종 보급과정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주에서 특별히 조신력을 대대적으로 보급한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여주가 여타의 군들과는 다른 양상하에서 신품종 보급이 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는 있다. 한편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국적인 양상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하면 여주에서의 신품종 보급도 1920년대의 조신력, 곡량도, 다마금 중심에서 은방주, 육우 등으로 대체되어 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여주에서는 1920년 당시 신품종을 보급하기 위한 채종답이 또한 설치되어 있었다. 일제는 1911년부터 우량품종의 재배를 장려해서 점차 그 재배면적을 증가시키고 있었지만, 총독부 입장에서는 우량품종의 퇴화 및 열성화를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1918년부터 우량품종의 보급과 동시에 그 계획을 수립하여 도(道) 종묘장에서 원원종(原原種) 외에 200석의 원종(原種)을 육성하여 각 면이 경영하는 400정보의 채종답에 그 종자로 제공하려고 하였다. 이 계획에 의해서 생산된 1만 석의 종자를 일반 농민과 교환하여 해마다 2만 정보에 파종할 수 있는 종자로 보급 혹은 갱신용으로 제공하려고 하였다. 총독부의 신품종 보급을 위한 이러한 계획에 의해 여주에도 채종답이 설치되었던 것이다. 당시 여주에 설치되었던 채종답에서의 교환 상황을 볼 수 있는 것이 다음의 (표 12)다.

(표 12)에 의하면 여주는 채종답 설치가 상당히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품종의 보급 면적이나 수확고 자체는 경기도 전체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채종답 설치와 관련하여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주 전체의 채종답면적의 비중은 15%에 이르고 있는데, 이는 경기도 차원에서 여주가 채종답과 관련하여 정책적으로 육성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연천, 포천, 가평, 장단, 개성 등등의 곳에서는 거의 채종답이 설치되지 않고 있던 사정을 감안하면 경기도의 여주에 대한 정책적 중요성이 어떠했는지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한편 교환량을 보면 조신력의 경우가 가장 높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여주에서 조신력의 보급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여주의 맥작 재배면적과 수확고에서의 변화 양상을 보기 위해서 다음의 (표 13)을 검토해 보자.

1920년대 여주에서 밭농사의 면적은 8만 1,785단보, 그 비중은 43.3% 정도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표 13)을 보면 밭작물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보리였음을 알 수 있다. 보리의 재배면적은 4만 3,041단보로, 총 밭 면적의 52.6%를 점하고 있다. 밀의 경우는 1만 857단보로 13.3%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두 작물이 경기도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5% 정도를 유지하고 있어서 경기도내에서 평균적인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평균 수확고가 보리와 밀 어느 것이나 경기도 전체 수준을 밑돌고 있다. 그 결과 수확고의 비중이 재배면적이 점하는 비중보다 낮게 나타나고 있다. 1920년대 당시 여주의 밭농사 생산력이 경기도 평균수준보다 낮았음을 짐작케 한다.

밭작물로서 보리 다음으로 중요했던 것은 콩이었고, 팥도 밀농사만큼 재배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다음 (표 14)이다.

콩의 재배면적은 1920년 당시 3만 4,405단보였다. 여주 내에서 밭농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2.0% 정도였다. 콩의 재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팥 역시 13%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팥 농사 역시 드물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콩 및 잡곡의 재배면적은 경기도 37개 군을 감안하면 조금 높은 수치로 볼 수도 있지만, 특징을 부여할 만큼 의미 있는 수치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콩 및 잡곡에 있어서도 생산성이 경기도 평균 수준을 밑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국 여주에서는 밭농사가 적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주요작물은 보리와 밀 콩 등이었다. 그렇지만 생산성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었고, 이후 농사개량, 농기구 개량, 시비 개량 등에 따라서는 생산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상태였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1920년대 당시 특용작물의 재배 현황을 보면 다음 (표 15)와 같다.

1920년 현재 특용작물로서 주목되는 것은 면화, 담배, 들깨 등이었다. 이는 1909년 당시의 특용작물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다만 경기도 전체에 여주의 특용작물 재배면적의 비중은 1909년과 비교하면 하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재래면과 들깨의 경우는 여전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에 반해서, 담배의 경우는 비중이 급격히 감소하였던 사정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감소는 상대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며, 재래면, 담배, 들깨 어느 쪽이나, 10% 이상 20%에 가까운 비중을 보이고 있어서 이 시기에도 여주에서는 경기도내 여타 군과 비교하여 특용작물 재배가 여전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특용작물들의 생산성은 앞에서 보았던 밭작물들의 생산성이 경기도 전체의 평균수준을 밑돌고 있었던 것에 비해서 재래면, 담배, 들깨 어느 것이나 경기도 평균수준을 웃돌고 있다. 이는 여주에서 특용작물의 재배면적 자체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그리고 강점 직전과 비교하여 그 비중이 감소하고 있었지만, 특용작물 재배에는 여주가 상당한 강점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흥미롭다. 추측건대 여주가 특용작물 재배에서의 강점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1930년대 ‘남면북양’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때 여주가 면화 재배지로 크게 주목을 끌었을 것이다.

이상으로 살펴보았듯이, 강점기인 1920년대 여주의 사회경제적 변화의 모습을 요약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우선 농업에 있어서 계층 분화를 보면 경기도내 다른 군과 비교하여서는 상대적으로 그 분해의 정도가 완만하였지만, 그래도 농업종사자의 50%에 육박하는 인구가 소작농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식민지 지주제가 여주에도 그대로 관철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식민지 지주제의 발달은 여주 내 농지의 적지 않은 부분을 대지주(도내 지주, 경성지주, 도외 지주, 특수지주 등을 포함)가 소유하고 있었던 사정의 반영이라고 하겠다.6) 소작농들은 식민지 지주제에 저항하여 소작쟁의를 전개하고 있었는데, 특히 1930년대 두드러지게 증가하고 있었다.7) 식민지지주제의 모순은 일제강점 동안에는 해결을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해방 이후 1950년 농지개혁에 의해서 식민지 지주제는 청산되게 되는데, 여주 역시 이에 의해 지주제의 모순은 비로소 해결되었다고 할 것이다.

다음으로 여주 농지의 전답 비중을 보면 강점 직전의 불완전한 자료에 의하면 논의 비중이 대단히 높게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에는 조사상의 부정확함이라는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한말까지 여주가 답작지대였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1920년의 여주 전답비중을 보면 한말과 비교하여 논의 비중이 감소하고 밭의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1920년 당시에 여주는 여전히 논의 비중이 밭의 비중을 능가하고 있는 답작지대였다.

마지막으로 전답에서의 재배품종을 보면 논농사의 경우 1920년 단계가 되면 재래벼품종이 서서히 쇠퇴하고 있는 반면, 총독부의 수탈농정을 위한 신품종이 점차 그 재배면적을 확대해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1930년대에 더욱 강화되어 재래품종이 거의 절멸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여주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밭작물의 경우에는 한말과 비교하여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재배면적이 크게 확대되고 있었다. 특히 특용작물로서 면화의 재배가 경기도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점이 주목된다. 이러한 재배작물의 구성은 1930년대에 들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면화의 경우 ‘남면북양’ 정책에 의해서 그 재배면적이 더욱 확대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강점기 여주는 식민지 조선이 겪게 되는 총독부의 식민지 수탈농정과 식민지 지주제의 모순이 그대로 관철되는 가운데, 여주 내에 존재하는 특수성으로 인해 경기도내 다른 군과는 다른 변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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