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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일제강점 직전 여주군의 사회경제적 상황

일제의 수탈농정에 의해서 여주의 경제상황이 어떻게 재편되고, 계층구성에 어떠한 변화가 있게 되는지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우선 강점 이전 여주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이다. 여기에서는 1909년도 『통감부통계연보』에 실려 있는 몇 가지 통계수치를 통해서, 강점 직전 여주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계층구성에 대해서 검토하려고 한다.

우선 여주의 직업별 인구를 보면 (표 2)와 같다.

일제강점 직전 여주의 직업별 인구와 경기도 전체에서의 그것을 비교해보면 당시 여주의 계층구성의 특징을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경제적인 측면에서 접근해보면, 당시 농업인구는 그 비율이 92.2%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여타의 어업, 공업, 광업 등은 백분율을 표시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대단히 미미한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상업에서도 경기도 전체 평균치의 절반 정도에 머물고 있어서 상업 역시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못했음을 추론케 한다.1) 이는 강점 직전까지 여주가 경기도 내에서도 여타 군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농업 의존도가 매우 높은 곳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일가)는 농업노동자로 보이는데, 이 일가의 비율 역시 경기도 전체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대단히 낮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무직자가 0명으로 파악되었다. 농업노동자 및 무직자가 이렇게 상대적으로 적게 나타나는 것은 농촌에서의 계층분화가 그만큼 더디게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결론짓기에는 위의 통계수치의 정확도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므로, 대체적인 윤곽을 확인하는 선에서 그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사회적인 측면을 보면 무엇보다도 양반과 유생의 비율이 경기도 전체 수준을 상회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는 여주가 경기도내 여타 군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양반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경기도내 다수의 양반이 경성에 거주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여주의 양반 비율은 경기도내 여타 군과 비교하여 매우 높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강점 직전 농업이 경제생활의 중심이었던 여주지역의 경제구조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농업종사자 및 경지면적 등의 통계수치를 아래에 제시하였다.

우선 강점 이전 여주의 면수(面數)를 보면 16개 면이었다.2) 이 16개 면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서 10개 면으로 재편된다. 다음으로 농업종사자는 7,513호, 5만1,567명으로 조사되었다. 이 조사 수치는 앞의 (표 1)과 서로 조응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즉 (표 1)과 대비해서 보면, 호수의 경우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수치로 보인다. 반면 인구의 경우에는 (표 1)에서는 당시 여주의 인구를 43,994명이라고 했는데, (표 3)에서는 같은 해 농업종사자 인구만 5만 명이 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 이상의 농업종사자는 있을 수 없다. (표 1)과 (표 3) 가운데 어느 하나의 수치는 오류일 것으로 생각된다. 추측건대, (표 1)에서 1916년도 인구 수치(5만 7,428명)가 당시 사실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면, 이 1916년도 인구와 맥락이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은 (표 3)의 농업종사자수이다. 이러한 추론에 입각하면 위 표의 농업종사자수는 당시의 실제 농업종사자를 더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위의 표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농업종사자에 대한 구체적인 경영 분류, 즉 지주, 자작농, 소작농, 일고(日雇) 등의 분류가 없기 때문에 당시까지의 농업에서의 계층분해 정도를 짐작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강점 직전 여주의 경지면적 상황을 보면, 여주의 경제구조=농업구조를 좀더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위의 표에 의하면, 당시 여주는 답작(畓作) 중심지역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경기도 전체에서 논의 비중이 56.7% 수준인 데 반해서 여주의 답작 비중은 73.1%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경기도 전체의 답작 비중을 크게 상회하는 것으로, 강점을 전후한 시기 여주의 경지는 대부분 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주의 1면당 경지면적은 425.58정보로, 경기도의 평균 규모인 305.83정보보다 훨씬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1호당 경지면적 역시 경기도 전체의 평균 규모보다 높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결과들은 여주가 당시 경기도내에서도 대표적인 논농사 중심의 미작지대였음을 짐작케 한다. 단 1호당 평균경지면적이 경기도 평균을 상회한다고 하여서 이를 근거로 여주 농민의 경제수준이 그만큼 상대적으로 나았을 것이라고 결론 내리기에는 주저된다. 상대적으로 나았을 개연성은 있지만, 구체적인 소유에서의 계층분해 정도, 그리고 지주, 자작, 자소작, 소작 등의 경영구조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는 농민의 평균적인 경제수준에 대해서 단정짓기 곤란하다.

다음에는 강점을 전후한 시기의 농업중심적이었던 여주의 경제구조 속에서 구체적인 농업생산물의 종류와 그 생산규모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자. 우선 1909년 당시 여주의 미작(米作) 면적과 그 수확고를 표시한 것이 다음의 (표 4)이다.

위의 표에 의하면 1909년도 당시 여주 내에서 쌀 농사를 짓는 면적은 5,100정보였는데, 이 수치는 (표 3)의 4,980정보와 비교했을 때, 육미(陸米) 재배면적 120정보가 더해진 수치와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앞의 표에서는 육미를 제외하였음을 알 수 있다. (표 4)는 강점 직전까지 여주지역 논농사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특징으로는 첫째, 조선 재래의 품종들이 재배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뒤에서 보듯이 1920년대를 전후하여 일제의 수탈농정은 신품종 장려정책으로 나아가면서 재래품종이 크게 쇠퇴하게 되는 상황과 연관지어보면 그 특징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음으로 찰벼의 비중이 대단히 높았던 점 역시 하나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여주 내에서 찰벼의 재배면적 비율은 46.3%, 수확고에서의 비율은 45.5%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1909년 당시 대략 절반 정도의 논에서 찰벼 농사를 짓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찰벼의 이와 같은 비율은 경기도 전체에서의 그 비율, 즉 재배면적에서는 12.4%, 수확고에서는 10.7%로 대략 10%를 약간 상회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대단히 높은 수치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결과 1909년 당시 여주의 찰벼 농사는 경기도 전체 재배면적의 24.1%, 수확고의 20.6%를 점하고 있었다. 당시 경기도 전체 군이 37개였음을 감안하면, 여주에서의 찰벼 농사의 집중도가 얼마나 높았던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강점 직전 여주 논농사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찰벼 중심의 미작지대’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찰벼 농사가 여주지역에 집중되었던 원인을 확실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다만 찰벼는 메벼보다 고급품종이었음을 감안하면 여주지역 농지의 비옥도가 그만큼 경기도내 여타 군과 비교하여 좋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추론을 해본다.

다음으로 미작 이외의 농업 생산물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표 5)는 보리농사의 면적과 그 수확고를 보여주고 있다.

위의 표에 의하면 여주에서는 보리와 밀농사도 짓고 있었고, 그 면적도 적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보리와 밀은 밭에서도 재배하였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밭이 아닌 논에서 벼와 이모작의 형태로 재배하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다음으로 살펴볼 콩 및 잡곡, 그리고 특용작물 등의 재배면적만으로도 (표 2)에서의 밭농사 면적을 상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1909년 당시 벼-보리, 혹은 벼-밀의 이모작이 여주지역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고 하겠다. 그러면 이모작이 이루어진 논의 면적은 어느 정도였을까. (표 4)의 논 면적과 (표 5)의 맥작(麥作) 면적을 비교 검토해보면, 전체 논의 25% 정도를 최대 면적으로 하면서 그 이하의 면적에서 이루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이모작을 하는 경우 밀보다는 보리를 훨씬 많이 재배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표 6)과 (표 7)은 콩, 잡곡과 특용작물의 재배면적과 그 수확고를 보여주고 있다.

(표 6)과 (표 7)은 주로 밭농사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강점 이전 여주는 경기도내에서도 대표적인 논농사 중심지역이었지만, (표 3)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밭농사도 대략 전체 경지의 25% 선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표 6)에 의하면 밭작물로는 주로 콩이 재배되고 있었고, 이 외에 팥과 조가 재배되었다. 그리고 드물게 피, 수수 등을 재배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용작물로는 면화, 담배, 들깨 등이 재배되고 있었지만, 그 비중은 군내 경지면적에서 그리 크지 않았다. 그리고 특용작물로 대마와 저마는 전혀 재배하지 않고 있었다.

잡곡 및 특용작물의 재배면적 및 수확고는 미작이 발달한 여주 내에서는 그 비중이 벼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나고 있지만, 경기도 전체에서 보면 재배면적과 수확고에서 꽤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흥미롭다. 콩 및 잡곡도 재배면적과 수확고에서 경기도 평균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 그렇지만, 더욱 주목을 요하는 것은 특용작물들인데, 특히 면화의 경우 경기도내 재배면적 및 수확고의 20%를 상회하고 있다. 담배와 들깨 역시 면화만큼은 아니지만,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자연적 조건이 경기도 내 다른 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특용작물 재배에 적합해서 여주 내에서 집중적으로 특용작물 재배가 이루어졌을 수 있다.3) 둘째는 특용작물 재배의 목적과 관련되는데, 과연 재배의 목적이 자가 소비용인지 아니면 시장 판매를 염두에 둔 상업적 농업이었는지에 따라서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질 수 있겠다. 추측건대 이 두 목적을 모두 염두에 둔 재배였을 것이다. 즉 면화나 담배 재배의 면적과 그 수확고 그리고 경기도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자가 소비용도 있었겠지만, 분명 상업적 농업의 성격도 일정 정도 띠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다만 그 시장으로 출하되는 수량이 어느 정도인지, 또 그것이 여주 근처 군에 한정된 판매인지, 아니면 적어도 경기도내 차원에서의 판매인지는 알 수 없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강점 직전 여주는 찰벼 중심의 미작지대로, 90%를 전후한 군민이 농업 종사자였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구조하에서 25% 정도를 차지하는 밭에서는 콩, 면화 등의 작물이 재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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