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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교육제도의 변화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일제의 교육정책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한국인을 충량한 일본신민으로 육성하는 것이었다. 1916년 1월 발표된 ‘교원심득(敎員心得)’에 의하면 “제국교육의 본지는 일찍 교육에 관한 칙어에서 명시된 바로서 내지인에 대해서나 조선인에 대해서나를 막론하고 다같이 성려에 입각하여 충량한 국민으로 양성”하는 것이었다.1) 두 번째는 철저한 차별적 교육이었다. “교육은 각 개인이 사람으로서 상응한 지식을 주고, 국가에 대하여 인민으로서 다하지 않으면 안 될 의무를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 이상의 교육은 금일 서두르지 않아도 좋다.”2)는 말에서 표현되듯 조선인은 기초적인 지식만 알면 될 뿐 중등이상의 고급지식을 교육받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곧 조선인은 고등교육에서 일본인과 철저히 차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방침하에 일제는 1911년 「조선교육령」, 「사립학교교칙」을 공포하여 종래 조선인의 교육기관을 대거 공교육체제에 흡수하면서 초등교육기관을 중심으로 교육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여주의 경우 1922년 현재 다음 4개의 보통학교와 1개의 심상소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중 보통학교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초등교육기관이고, 심상소학교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초등교육기관이었다. 1910년 이후 3개의 학교가 생긴 점에서는 일제가 교육기관 설립에 적극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그 내용은 철저히 식민지적인 것이었다. 우선 일본인과 조선인 인구비율당 학교수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조선인 보통학교의 경우 1921년 현재 인구 6만 1,755명에 공립보통학교 4개로 인구 1만 5,439명당 1학교의 비율을 보이고 있는 데 비해 일본인 학교는 인구 132명에 심상소학교 1개로 인구 9명당 1학교의 비율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1만 5천여 명과 9명의 비율은 곧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 정도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은 독자적으로 학교조합을 운영하였으며, 중등교육기관은 군 전체에 1개도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인을 충량한 신민이자 낮은 지적 정도의 우민으로 만들려는 교육정책이 그대로 실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공적 교육기관이 부족함에 따라 여주군민은 다른 방식으로 교육적 수요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 교육기구이었던 서당이 보통학교보다 많은 학생수를 감당하며 1920년대 초반에도 118(생도수 1,106명)개나 운영되었고,3) 교육에서 소외받고 있던 여학생들을 위해 교회 안에 여자야학교가 설치되기도 하였다.4)

식민지적 교육은 교육내용에도 관철되고 있었다. 보통학교에서는 수신, 국어(일본어), 조선어 및 한문, 산술, 이과, 창가체조를 교과목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어 교수시간이 38%나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조선어에 비해 배 이상의 시간을 차지하는 것이었으며, 조선어와 국어를 뺀 나머지 과목은 전체 수업시간의 채 40%에도 이르지 못하였다.5)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이 교육의 중점이었을 뿐 기초적 지식조차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보통학교 교육이 지닌 이런 식민지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보통학교는 지역사회의 여론을 만들어 내는 데 일정한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예컨대 1923년 물산장려운동이 전개되고 있을 때 여주공립보통학교에서는 여학생들에게 조선산 ‘댕기’를 쓰게 하여 토산장려의 분위기를 북돋기도 하였고,6) 졸업생이 중심이 된 학우회는 강연, 연극공연 등을 통해 지역사회의 여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던 것이다.7)

한편 일제의 지배는 계속되었지만 이런 열악한 교육상황은 그 이후에도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1936년의 통계에서도 보통학교만 6개 늘어났을 뿐 중등교육기관 이상은 설립되지 않았다.

학교설립 상황에서 보듯, 일제는 항상 조선을 식민지화한 것이 조선의 발전과 조선인의 문명개화를 위한 것이라고 선전하였지만, 철저하게 순종적인 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본질이었던바, 교육에 있어서도 그 기본입장은 내내 관철되었던 것이다. 조선인의 교육열은 보통학교 수준의 교육을 통해 신민교육으로 변질되고 그 이상의 고등교육은 제도적으로 차단당하는 현실에서 여주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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