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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교통체제의 개편

일제는 합방 이전부터 일본자본의 침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기간산업을 마련하는 데 몰두하였다. 합방 이전에 경인선과 경부선을 완공하였으며 이후 평원선과 경원선을 건설하였다. 또 주요 간선도로를 정비하면서 부산, 군산, 인천, 청진 등 주요 항만도 수축 정비하였다. 그리고 이런 교통망 정비사업은 강점 이후 법제적으로 정리되면서 더욱 확장되었다. 일제는 1911년 「도로규칙」을 제정하여 도로의 등급을 1등, 2등, 3등 및 등외 도로 네 종류로 나누어 도로상황을 규격화하는 한편 지속적인 도로확충과 보수작업에 나섰다. 실제로 일제가 강점기간에 건설한 신작로는 2만 5,500km에 이를 정도였다. 이렇게 일제가 도로에 신경을 쓴 까닭은 정치, 경제, 군사적 지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교통망의 확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식민지 조선의 경제를 일본에 흡수하여 원활한 자원의 이출과 자본의 진출을 하기 위해서는 물류의 중심인 교통시설의 확충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실제로 1921년 산업조사위원회가 개최되어 조선경제의 발전방향이 논의되었을 때 일본인 자본가들이 가장 시급한 사항으로 주장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교통망 확충이었던 것이다. 또 거미줄처럼 펼쳐진 교통망의 건설은 일제 지배를 근대화로 호도하는 좋은 선전재료이기도 하였다. 자신들이 얼마나 조선을 근대화시켰는가를 선전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재료는 없었던 것이다.

전국적인 교통시설 확충, 정비작업은 여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먼저 도로부분에서 여주는 이등도로 1개 노선과 삼등도로 2개 노선이 지나갔다. 당시 1등 도로는 폭원 4칸(7.27m), 2등 도로는 3칸(5.45m), 3등 도로는 2칸(2.63m)이었는데 여주의 경우 1936년 현재 경성-강릉선(江陵線)(2등도로), 이천-광탄선(廣灘線), 여주-흥호리선(興湖里線)(3등도로)이 지나가고 있었다.1)

한편 여주지역 교통망에서 도로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은 철도였다. 일제는 강점 이전부터 주로 군사적인 목표 아래 X자 형의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호남선, 함경선의 철도를 부설, 운영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 조선 산업개발이라는 경제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종래의 기간철도망 이외에 주요 지역간의 물류수송을 담당할 철도망을 필요로 하였는데, 수원과 여주 사이에도 곡물수송 등을 목표로 수려선이 부설되었던 것이다.

수려선 부설은 이미 1910년대 후반부터 제기되어온 문제였다. 경기도 내륙의 곡창지대와 경부철도를 연결하여 미곡의 반출을 원활히 하고 일본인의 진출영역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내륙지방인 여주에서 수원을 연결하고, 다시 수원에서 인천으로 연결되는 철도망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철도의 부설은 부설지역 자본가들의 경제적 이권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원주, 이천, 수원 등지의 상공인들은 경쟁적으로 철도를 유치하려 하였다. 그러나 수려선 부설이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자금부족과 1920년대 초반의 경제불황 등으로 인해 부설논의는 답보상태에 빠졌고, 수려선을 대신할 수원-인천, 수원-강릉 등 다양한 노선이 대체노선으로 검토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논란은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경동철도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수려선 부설에 착수함으로써 일단락될 수 있었다.

수려선을 부설한 경동철도주식회사는 1928년 8월 동경에 설립된 회사로서 일본 본토의 자본으로 설립된 회사였다. 1927년 총독부가 ‘조선철도 12개년 계획’을 통해 사설철도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자 이에 힘입어 일본인 자본들을 투자하여 만들어진 회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정부로 막대한 지원을 받으면서도 자기 자본만으로 철도를 건설하지는 않았다. 초기공사비용으로 200만 원을 책정하였다가 예산이 부족하게 되자 다시 공사비용의 상당부분을 수려선 연변의 용인, 이천, 여주 등의 일본인 상공인들의 투자를 받아 공사에 착수하였다. 이 지역의 일본인 자본가들이 여주지역은 충청도와 경기내륙의 곡물집산지이기 때문에 이 지역의 운송을 장악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익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선 것이었다. 수려선 부설은 2단계에 걸쳐 추진되었는데, 1단계로 수원-이천 구간을 먼저 완성하고, 2단계로 이천-여주 구간의 공사를 진행하였다. 1단계 공사는 용인의 터널공사 구간에서부터 시작해 8개월 만에 종료되어 1930년 11월 30일 개통식을 갖고 12월 4일부터 영업을 개시하였다. 수려선은 개통 당시에는 수원발 5편, 여주발 4편을 운행하였고 1938년부터는 수원발 4편, 여주발 4편으로 편수를 줄여 운행하였다. 수원에서 여주까지는 2시간 30분이 소요되었는데 여객과 화물의 잦은 연발착으로 이용객의 불만을 사기도 하였다고 한다.2) 그러나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경동철도는 화물과 여객의 증가로 상당한 영업이익을 누렸으며, 특히 여객운송이 총수입의 60%에 이를 정도로 주변 인구의 이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편 경동철도주식회사의 철도부설은 수려선에만 머무르지는 않았다. 최종 목표인 인천과의 연결을 위한 수인선이 1937년 완공되었고, 이에 따라 수려선은 수인선과 이어져 여주에서 인천에 이르는 총연장 125.4km의 철도운송망으로 구축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철도망의 구축은 철도 연변에 있는 지역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양 지역간의 미곡의 반출과 수입품 및 공산품의 반입이 활발해졌음은 물론 지역간 인적 교류가 더욱 확대되고 경제생활권이 철도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던 것이다.3)

그러나 개통 초기 상당한 영업이익을 누렸던 경동철도도 1940년부터는 운송수익이 적자로 돌아서 재정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결국 1942년 8월 조선철도주식회사에 매각되어 경동선으로 개칭, 운영되었다. 경동선은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에 접수되었다가 1946년 5월 17일부로 여타 사철과 함께 국철에 흡수되었으며, 1972년 정부의 만성적자노선 정리방침에 따라 3월 31일을 끝으로 폐지되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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