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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후기 여주의병의 특징과 의의

경기지방 후기 의병운동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뒤, 식민지화 획책을 꾀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일제는 이 과정에서 경의·경원 철도 부설과 군용지 설치를 이유로 토지를 약탈하고 철도부설과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운반하려고 조선인 역부를 강제 모집하였고, 이 사업이 경기도에 집중되면서 일어난 지역적 반일 분위기가 크게 작용하였다.

후기 여주의병운동도 이러한 경기 지역의 일반적 반일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경기 의병운동은 늦어도 1904년 9월 이전에 창의 움직임이 있었고 그 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면서 반일 의병봉기도 본격화되었다. 여주의 후기 의병운동은 경기지역의 의병운동과 그 맥을 같이하면서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화가 되기 직전까지 약 7년 가까이 쉼없이 이어졌다.

이러한 후기 여주의병운동의 특징을 시기별, 의병구성별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기별로 보면 을사조약 체결 이전인 1905년 5월 앞뒤로 시작된 후기 여주의병운동은 일제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의병 8명이 여주군 대송면을 습격, 군자금을 탈취한 1910년 5월까지 이어졌다. 후기 의병운동의 초기단계에 해당하는 을사조약을 앞뒤한 시기에 여주지역은 경기지역 후기 의병운동의 중심지였다. 맨 앞의 표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이 이 시기 경기지방에서 활동한 것으로 확인되는 의병부대 14개 가운데 8개 부대가 여주를 중심으로 창의하거나 주된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 신분(직업)과 관련해 살펴보면, 자료상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을사조약 체결 이전에 창의한 부대는 대체로 농민, 활빈당 등 민중의병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 창의, 활동한 부대는 민중의병 출신일 개연성이 높은 이기화 부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양반 유생층 출신이다. 즉 이 시기 여주에서 활동한 의병부대의 절대 다수는 을사조약 체결 뒤에 창의했거나 활동하였으며, 전통적인 양반 출신의 의병부대가 주축을 이뤘다.

여주를 중심으로한 경기 남부의 의병운동은 1907년 8월 군대해산과 이에 반발하여 봉기한 원주진위대의 해산군인들이 여주 등지로 이동하면서 경기 남부지역의 의병운동을 한층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특무정교 민긍호가 이끄는 진위대 병사의 주력이 여주 안창에 진출하면서 여주의병운동의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해산군인의 참여로 강화되던 여주의병운동은 1907년 12월과 1908년 1월 사이 서울진공작전을 위한 ‘13도 연합의병’ 결성이 구체화되면서 여주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가 집결지인 양주 등지로 이동하면서 일시 침체되었다.

서울진공작전이 좌절된 뒤 경기지방 의병운동의 중심은 동북부지역과 연이은 임진강 유역, 서북부지역으로 이동해갔으며, 여주를 포함한 남동부지역 의병운동은 전반적으로 침체하였다. 이것은 대개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뒤 의병지도층이 전사, 체포, 귀순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활동근거지를 옮긴 탓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의병항쟁은 간간히 이어졌고 그 맥을 이어 1909년 1월에 접어들면서 여주의병운동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 의병부대는 앞 시기와는 달리 대개 5∼6명에서 10명 안팎의 소부대가 중심을 이루었고 그 활동도 주로 군자금 확보를 위한 투쟁이 일반적이었다. 그만큼 의병활동의 주체적 조건이 어렸음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는 일제의 더욱 강화되고 조밀해진 탄압이 원인이기도 했지만 의병 진영의 주체적 조건도 그만큼 악화되었다. 예컨대 군대해산 뒤부터 ‘남한대토벌’이 단행된 시기에 귀순·체포·전사한 경기의병 지도층은 총 101명으로, 체포 77명, 전사 13명, 귀순 9명, 기타 2명이었고, 그 가운데 여주를 포함한 경기 남동부지역은 총 24명으로, 체포 18명, 귀순 5명, 전사 1명이었을 정도로 의병운동의 인적, 물적 기반이 약화되었던 것이다.

둘째, 후기 여주의병운동의 이러한 시기별 특징은 여주지역이 차지하는 지리적 특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후기 경기의병운동의 초기 단계에서 그 중심지가 여주를 중심한 죽산·음죽·안성·광주·용인·안성·진천 등지로서 경기 남부와 충청북도 북쪽 경계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원주진위대에서 봉기한 민긍호 부대가 서울 공략을 위해 원주에서 이곳으로 진출하듯이, 이 지역은 경기지방에서 내륙산간지방을 통해 호서지방과 원주 등 강원도 내륙으로 연결되는 요충지란 점에서 이 시기 여주지역 의병운동이 호서지방의 의병과 지리적으로 연계되어 활동한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여주의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부표 1) 여주지역 의병운동 지도층의 인적사항 및 활동상황 조사표(1905∼1910)에서 거출지를 확인할 수 있는 양반·유생계층 의병 지도층 15명 가운데 경기도 거출자는 9명(여주 거출자 5명)이며, 나머지는 충청도, 강원도 등지의 거출자라는 사실로도 확인된다. 거출지가 확인되지 않은 의병장을 포함하면 훨씬 많은 의병장이 여주지역과 무관하면서도 이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지역적 연고와 관계 없는 의병부대가 여주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이 지역이 호서북부지방이나 강원 내륙지방에서 정치적 중심인 서울을 향하여 길목일 뿐만 아니라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인근 지역으로의 이동이 용이한 지리적 요충지라는 점 때문이었다. 여주를 중심으로 경기남부지역이 갖는 이러한 지리적 특성이 여주를 후기 의병운동의 중요한 격전지로 자리잡게 한 원인이 되었다.

셋째로 의병장의 신분·계층별 구성을 보면 후기 여주의병운동의 경우 일반적으로 평민 출신의 의병장 계층이 강화되었던 전체 후기 의병운동의 경우와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1904년 이후 후기 의병운동의 지도층 신분구성의 경우 일제측의 조사 자료를 분석한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 1908~1909년 사이에 활동한 의병부대에서 부장을 포함한 전국의 주요의병장 430명 가운데, 70~75% 정도가 평민출신이었던 데 비해, 유생 또는 양반출신의 의병장은 25~30% 정도였던 것으로 조사되었다.1) 경기지방의 경우도 전국적인 현상과 다르지 않았다. 1904년부터 1911년까지 경기지방에서 활동한 의병지도층2) 435명 가운데 신분이나 직업 등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177명의 신분·직업별 구성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특무정교 이상의 장교를 양반·유생계층으로 포함했을 때 양반·유생계층이 31.6%, 중인계층이 4%, 평민계층이 64.4%로 조사되었다.3)

(부표 1)에서 나타나듯이 여주에서 활동한 의병지도층은 51명이었고, 이 가운데 신분이나 직업 등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지도층 31명의 신분·직업별 구성을 분석하면 (표 4)와 같다.4)

(표 4)에서 드러나듯이 사회통념상 양반 및 유생층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의병 지도층은 16명이다. 이 가운데 참판·충주원의관·참봉 등 전직 관료출신이 2명에 지나지 않으며, 그 밖에 직업이 분명하지 않으면서 양반층으로 분류된 자가 14명이다.5) 여기에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의병장으로 전환한 특무정교 이상의 장교출신 2명을 양반계층으로 산정하여 가산하면,6) 여주에서 활동한 양반·유생계층의 의병지도층은 총 18명으로 전체 지도층 가운데 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58.1%에 해당한다. 이는 경기지방 전역에서 활동한 의병 지도층 가운데 양반·유생계층이 차지한 31.6%와 비교하면, 여주에서 활동한 의병지도층 가운데 양반·유생계층이 월등히 높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여주에서 활동한 평민계층 의병지도층은 전체 31명 가운데 13명으로, 41.9%를 차지한다. 이는 경기지방 전역에서 활동한 의병지도층 가운데 평민계층이 차지한 64.4%와 비교하면, 여주에서 활동한 의병지도층 가운데 평민계층이 차지하는 비율은 훨씬 낮음을 알 수 있다. 평민계층 의병지도층을 구체적으로 분류해 보면, 해산·퇴역군인이 4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광부 3명이었다. 농업과 무직으로 분류된 자가 각각 2명이며, 군대해산 이전 의병운동의 주된 군사력을 형성했던 포수와 의병토벌대의 한 축이었던 순검이 각각 1명이었다. 이처럼 여주지역의 평민의병지도층은 다양한 직업군을 포괄하는 평민계층이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주지역의 경우 양반·유생 또는 관료출신의 의병지도층이 다른 지역과 달리 상대적으로 우위를 차지한 것은 이 지역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생각한다. 즉 여주는 일제의 침략과정에서 비명에 간 민비의 출생지로서 전기 의병운동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어느 지역보다도 배일사상이 가장 뿌리 깊은 곳 가운데 하나였다. 때문에 이곳에는 이구채, 조인환, 김정환, 방인관 부대를 포함하여 여주출신 양반이면서 농업에 종사하던 민동식(閔東植)과 심상옥(沈相玉) 등이 창의하였던 것이다.

여주지방에 형성된 이러한 배일사상은 초기 의병봉기에 크게 작용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의 활동이 후기로 갈수록 줄어들고 이에 비례하여 노동자나 광부, 포수·포군 출신의 평민의병장의 등장과 역할이 강화되는 데서 전체 후기 의병운동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후기 여주의병운동은 전체 후기 의병운동과 그 흐름을 함께 하면서도 여주지역의 지리적 정치적 특징을 반영하여 의병운동이 전개되었다. 또 여주지역의 독자적이며 일회적인 항일운동이 아니라 경기 남부지역 의병운동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초기 의병봉기에 여주가 민비의 출생지라는 점에서 반일민족감정과 전기 의병과 같은 척사론이 크게 작용했지만 이 또한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으로 민족적 모순은 물론 사회경제적 모순이 심화되면서 전기 의병의 척사론적 한계를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이는 후기로 갈수록 의병지도층의 구성에서 강화된 평민층의 참여와 대중구성 그리고 투쟁양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후기 여주의병운동의 원동력인 대중의 직업별 구성을 보면 부표 2 여주지역 의병대중(병사)의 인적사항 및 활동상황 조사표(1907∼1910)에서 드러나듯이, 농민·광부·상인·포군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조선 후기 이래 농민층 분해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사회계층이거나 개항 뒤 심화된 제국주의 침략과정에서 파생된 반프로 빈농출신이 대다수였다. 즉 일제의 자본진출과 이에 기생하는 봉건계층의 착취 등으로 피폐되어 가던 사회경제적 조건이 민중을 의병에 참여하게 한 일반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여주의병의 투쟁양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의병들은 일본군과 일진회 등에 대한 공격에 머물지 않고 소작미 탈취와 방곡령 실시 등 반봉건 투쟁도 일상적으로 벌였고 이러한 투쟁양상은 후기로 갈수록 더욱 강화되었다.

이상과 같이 후기 여주의병운동은 의병지도층 구성에서 양반·유생출신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지만 투쟁양상과 의병대중 구성에서 민중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때문에 후기 여주의병운동은 1905년을 앞뒤로 일제의 침략과 봉건적 수탈로 깊어지는 민족적, 계급적 모순 속에서 고통받던 민족적·민중적 저항이었고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의병전쟁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반일민족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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