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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서울진공작전 좌절 이후 여주지역 의병운동

1908년 1월 ‘13도 연합의병’의 서울진공 계획이 실패한 뒤 경기지방의 의병운동은 오히려 앞 시기보다 더욱 활발한 고양기를 맞게 되었다. ‘13도 연합의병’의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뒤에도 경기지방의 의병운동이 오히려 더욱 고양된 것은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에 참여했던 많은 의병부대들이 흩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경기도에서 활동한 것도 한 원인이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의병운동 진영의 주체적 조건이 이전 단계에 비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즉 ‘13도 연합의병’의 서울진공작전이 가지는 전술상의 문제, 참여한 대다수 의병장들이 전사하거나 체포, 이탈하는 사정과 맞물려 의병장 구성에서도 평민의병장이 대거 등장하는 등 민중적 성격이 강화되면서, 1908년 3월 이후 경기 의병운동은 반일항쟁을 더욱 고양시켜 나갈 수 있었다. 또 일제가 파악한 정보에 의하더라도 양주·영평·포천 등 경기지방의 의병운동은 1908년 3월 이후 수적인 면에서도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지의 의병부대들이 서로 연합하여 일제 침략의 지방 거점인 헌병분견소나 수비대분견소를 직접 습격하는가 하면 미곡반출의 금지와 군량징발 등 더욱 공세적인 양상을 띠었다.1)

서울진공작전이 좌절된 뒤 경기지방 의병운동의 중심은 동북부지역과 연이은 임진강 유역, 서북부지역으로 이동해갔으며, 여주지역을 포함한 남동부지역 의병운동의 움직임은 전반적으로 미미했다. 이는 군대해산 뒤 활동했던 대다수 의병부대가 ‘13도 연합의병’에 참여한 사정과 맞물려 민긍호의 경우와 같이 전사 또는, 심상희처럼 체포되거나 이인영처럼 이탈 또는 조인환, 이은찬의 경우처럼 동북부지역 등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표 2)는 여주에서 활동하다가 서울진공작전이 좌절된 뒤부터 1909년 10월 ‘남한대토벌’ 시기까지 전사, 체포되거나 이탈, 이동한 부대를 정리한 것이다.

(부표 1)의 활동시기에서 드러나듯이 군대해산 이후부터 ‘남한대토벌작전’이 행해진 1909년 10월까지 여주에서 활동한 의병부대는 39개 부대였다. 아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가운데 27개 부대의 의병장이 이 시기에 전사,체포 또는 의병대열에서 이탈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활동 근거지를 바꾸었다. 즉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뒤 전사한 의병장 2명, 체포된 의병장 9명, 귀순한 의병장 5명, 활동상이 드러나지 않은 의병장 4명, 다른 지역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긴 의병장 7명이었다. 여주에서 이 시기 활동한 것으로 조사된 나머지 12개의 의병부대 가운데, 이구채, 윤성필, 최치선, 경구현, 방인관, 김봉학, 김병규, 김현복 부대 등 8개 부대는 자료상으로도 구체적인 활동이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진위대 상등병 출신의 김치수(金致洙)가 이끄는 부대를 포함하여 4개 부대(부표 1 순번 44∼47 참고)만이 이 시기에 구체적인 활동상을 보였다. 이와 같이 경기지방 의병운동이 고양되는 가운데, 군대해산 이후 폭발적인 공세를 취하던 여주 의병운동은 서울진공작전 뒤 절대적인 열세를 보인 것은 대개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뒤 전사, 체포, 귀순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활동근거지를 옮긴 탓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의병부대 이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이 시기에도 여주지역에서는 의병항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1908년 3월에 들어서면서 여주 의병운동은 수세를 면치 못했다. 3월 9일 의병 60여 명이 여주 북방4리 지점에서 기병 제1중대의 습격을 받아 싸웠으나 27명이 전사했다.2) 16일에는 의병 2명이 장호원 동방 3.5리 지점인 능곡(陵谷)에서 충주 수비대에게 체포되었다.3) 23일에는 원주진위대 상등병 출신 김치수가 이끄는, 대부분 진위대 병사로 구성된 의병 18명이 원주군 도수암촌(道守菴村)에서 여주군 곡수시장을 습격, 목면 상인에게 군자금을 징발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4) 한편 군대해산 뒤 여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학생 출신 김정한은 23일 지기인 정낙인(일명 정낙진)에게 부하를 넘기고, 정낙인은 부하를 수습하여 원주 방면으로 이동하였다.5) 26일 의병 10여 명은 3척의 범선에 나누어 타고 여주 남쪽 4리 한강 좌안에 있는 의암(衣岩)에서 곡물을 징발하다가 여주수비대의 공격을 받아 2명이 숨졌다.6)

그런 가운데 1908년 4월부터 10월 사이 수많은 의병들이 줄지어 체포되거나 전사하였다. 1908년 4월 10일 여주의병장 심상희가 경시청에 체포되었다.7) 장호원 서쪽 탑촌(塔村) 동장 김명호(金明浩)는 장호원 분견대가 철수한 뒤 의병을 이끌고 장호원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밀정을 앞세운 이천 수비대장에게 4월 17일 체포, 사살되었다.8) 1908년 4월 이후 토벌을 강화한 일본군을 피해 4월 11일 의병 30여 명이 여주군 근남면 금곡리를 거쳐 원주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를 탐지한 헌병 4명이 여주수비대와 힘을 합해 추격에 나섰으나 종적을 감춘 뒤였다.9) 1908년 5월 24일 이름 모를 의병장이 장호원 북방10리 지점에서 장호원 수비대 척후의 공격을 받아 체포되었다.10) 6월 3일에도 의병장 이하 4명이 장호원 남쪽 30리 지점에서 장호원 분견대에서 내보낸 토벌대에 붙잡혔다.11) 6월 9일 의병들이 여주군 미곡면(味谷面) 익수동(益壽洞)에서 여주분견대와 교전하였다.12) 13일에는 의병장 이상봉(李相奉)과 그의 부하 2명이 체포되었다.13) 18일에는 김태지(金泰之) 부대의 의병 1명이 여주분견소에 귀순하였으며,14) 25일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의병 1명이 여주분서 순사에게 죽임을 당했다.15)

1908년 10월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한장수색대(韓裝搜索隊)를 편성, 여주지역의 의병소탕에 나섰다. 군대해산 뒤 여주에서 활동했던 정대무, 정봉준, 이구채, 이은찬, 방인관 등의 부하들이 일본군의 수색에 걸려들어 체포되었다. 10월 5일 여주군 지내면(池內面)에 잠복하고 있던 정대무의 부하 이태순(李台純), 정봉준의 부하 이성관(李成寬)이 체포되었다.16) 같은 날 이구채의 부하 이광근(李光根)이 몸을 피한 사이 이구채의 부하 김용석(金用石)이 여주경찰서 10여 명으로 구성된 한장수색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후 9일까지 여주군 강천면 양전리 출신 변영준(邊榮俊), 김성윤(金聖允), 와평동 출신 강이영(姜利永), 조영실(趙永實), 곽종옥(郭宗玉), 이칠봉(李七奉) 등 이구채의 부하 7명이 체포되었다. 6일 이은찬의 부하 간매동 출신 곽경구(郭敬九)가 체포되었으며, 근남면 출신 방인관의 부하 서수(徐銖)가 체포되었다.17)

여주 의병들은 일제의 토벌이 강화되는 1908년 10월, 강원도나 충청북도 접경지대로 잠시 몸을 피해 있으면서 때론 군자금 징발을 위해 여주를 습격하는 등의 활동으로 명맥을 이어나갔다. 1908년 10월 13일 의병 4명은 여주군 고량면(古梁面) 사곡(沙谷)을 거쳐 원주 방면으로 이동하였다.18) 10월 29일에는 의병 8명이 오전 0시 여주군 근동면 우만리(牛晩里)와 신대리(新垈里)를 각각 습격하여 군자금 징발한 뒤, 오전 3시 근동면 흔암리(欣岩里) 민가에서 군자금을 징발하였다. 밀정의 보고를 접한 여주 헌병분견소 헌병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의병들이 충청북도 천포 방면으로 사라진 뒤였다. 그 뒤 여주수비대 5명, 헌병대 7명, 경찰서 5명으로 구성된 토벌대가 주변을 샅샅히 뒤졌지만, 토벌대는 천포를 근거로 활동 중인 김정환(金鄭煥)의 부하들로 경기도 말을 사용하고 결발(結髮)한 20~40세 가량의 소유자라는 정보만 얻었을 뿐이었다.19)

이와 같이 ‘13도 연합의병’의 서울진공작전이 무산된 이후 “경성 이남, 즉 경기도 남반부는 대략 평온하여서 겨우 때때로 화적배의 출몰이 있을 뿐”이라고 일본군이 보고할 정도로 여주를 비롯한 경기 남부지역의 의병운동은 거의 소강상태에 이르렀다.20)

그러나 1909년 1월에 접어들면서 여주 의병운동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1월 11일과 12일 사이 의병 10여 명이 여주군 내에서 음죽군 일본 헌병분견소 헌병과 교전을 벌였다.21) 이러한 사실은 1909년부터 “근일에 여주 각면에는 의병이 점차 창궐하여 군수전을 거두어 가므로 인심이 공황(恐慌)하다더라.”고 『대한매일신보』에서 보도하였듯이,22) 여주뿐만 아니라 죽산·용인·양성·이천·광주 등지에서 10~20명으로 구성된 이름 모를 의병부대가 자주 출몰한다는 보도가 줄을 이었다.23)

1909년 4월 이후에도 의병들의 소부대 활동은 계속되었다. 12일 의병 5명이 여주군 근동면 흔엄리(欣嚴里)를 습격하였다.24) 5월 28일 의병 12명이 30년식 보병총 3정을 휴대하고 여주에 출몰하였다.25) 1909년 7월 3일 의병 4명이 장호원 동북 4리 지점에서 장호원 헌병분견소 헌병들과 충돌한 끝에 2명이 사로잡혔다.26) 그런 가운데 8월 18일 의병장 김동원(金東元)이 여주에서 체포되었다.27) 이렇듯 1909년 1월에 접어들면서 여주 의병운동은 다시 살아나는 듯했으나, 끝내 퇴조의 기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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