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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갑오개혁에 반대하는 의병의 봉기

1896년 의병 중에는 갑오개혁에 반대하여 봉기한 의병도 있었다. 갑오개혁 반대 의병은 아관파천 이전과 이후의 구분 없이 계속적으로 일어났다. 갑오개혁이 1894년 6월 21일 이후 일본에 의해 강요되고 개화파에 의해 추진되는 데 대한 반발이었다. 1895년 봄부터 시작된 개혁(23부제 실시, 지방군대의 폐지, 대전납의 실시와 징세기구의 변동, 세무주사 제도 실시)으로 지방 지배체제가 무너지고 군수와 이서층으로부터 징세권이 박탈되었으며, 구 관속의 70% 이상이 도태당하게 되었고, 지방군인 거의 대부분이 실직하게 됨에 따라 개혁으로 인해 직접 피해를 받게 된 전현직 관료층, 이서층, 포수층(지방군인) 등이 의병 대열로 모여 들었다.

전현직 관료층은 대전납(代錢納 : 금납화의 과도적 형태) 실시로 인한 기득권의 상실, 군수로부터 징세권의 박탈, 지방 지배체제의 변화(「국왕-수령」 체제가 「내부대신-관찰사-군수」 체제로 변화) 등에서 오는 충격으로 인해 의병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서층은 대전납 실시, 결호전(結戶錢) 제도 실시, 징세권 박탈 등에서 오는 기득권과 경제적 기반의 상실, 실직 등으로 인해 의병에 참여하였다.

여주지역에서는 특히 호전(戶錢)에 대한 강제징수가 주목된다. 1896년 2월 5일 심상희가 의병을 일으켰던 여주지역에서는 의병들이 14개 면 154개 동리에서 호전을 강제로 거두어 갔다.1) ‘병신춘호전중비도늑봉조(丙申春戶錢中匪徒勒捧條, 1896년 봄 호전 중 의병이 강제로 거두어 간 조목)’라는 제목 아래 주내면 등 14개 면, 154개 촌동리마다 늑봉 호전 액수(총액 3,885량 4전 5푼)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상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2)

그런데 ‘병신춘호전중비도늑봉조’라는 제목 아래에 기록된 내용 중에 의병이 늑봉한 것 외에도 민간 건몰이 있었다는 것과 1896년 봄 관찰사 선유시 영수증을 확인하여 면제할 뜻으로 각동 민인에게 알렸다는 것 등이 있다.3) 민간 건몰은 민간에서 없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관찰사가 인정한 것이라면 단순한 건몰일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이서층이 거둔 다음 건몰해버린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어쨌든 여주지역 의병이 전체 220여 개 동리 중에서 2/3가 넘는 154개 동리에서 호전을 강제로 받아간 사실은 여주군 거의 전체가 의병에 참여하거나 협조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관찰사도 인정한 것으로서, 매우 이례적인 경우이다. 군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결전이나 호전을 세무주사 등으로부터 탈취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동리마다 의병들이 다니면서 호전을 걷고 어떤 증거를 남겼다는 것은 단순한 군자금 충당을 위한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이서층이 호전 징수 체계에서 배제된 데 따른 불만이 늑봉, 건몰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여주지역 의병의 호전 강제 징수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시행된 결호전 제도 중 호전 제도 시행에 대한 반발이었다. 금액(총액)으로 보면 결전(結錢 : 전답에 부과하는 세금)이 훨씬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결전에 대해서는 의병이 강제 징수에 나서지 않고 호전에 대해서만 강제 징수에 나서고 있는 것은 1896년 여주지역 의병이 결호전 중에서도 특히 호전에 대해 반발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호전제도 실시에 대한 양반층의 불만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원래 양반은 부담하지 않았던 군포(軍布)가 갑오개혁 때 ‘호전’이라는 이름으로 양반에게도 부과되자 그 동안 면세 특권을 누려 왔던 양반층이 반발하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 호포제도 또는 호전제도가 가지는 신분제적 갈등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호전제에 대한 반발에서는 징세권 회복 이외에도 조세제도의 붕괴가 성리학적 질서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는 인식이 나타나고 있었다. 호전은 호당 3량씩이었고, 봄과 가을 두 차례에 나누어 내도록 되었다. 대전납과 결부된 결호전제도로 시행되었지만, 이 시기 호전은 대원군 집권시기의 동포제(洞布制)와 같은 것이었다. 호전은 1호당 3량씩으로 정해지지만 집집마다 일률적으로 3량씩 내는 것이 아니라, 읍의 납부총액을 결정한 다음 동리 단위로 그것을 나누어 내는 형태였다.4) 그런데 모든 읍에는 호총(戶摠)이라 하여 그 동안 내려온 징세 관행이 있었는데 이 호총을 무시하고 실제 호수(戶數)를 다시 조사하되 특히 그 동안 호포를 물지 않던 호를 일일이 파악하여 호적에 올리도록 하고 있었다.5) 이러한 일은 향회 조규와 향약 규정에 의해 면회와 리회, 그리고 면과 리가 맡도록 규정되고 있었다. 즉, 면과 리가 호구와 산업의 조사를 맡고, 호전의 읍총(邑總)을 면동리 별로 분배하는 것은 향회가 맡았다.

호포를 물지 않던 양반층이 호전을 내야 한다는 것은 면세특권층에서 납세층으로의 변화를 의미하였고, 그것은 곧 신분제의 붕괴를 의미하였으며, 호포전은 신분제의 붕괴를 피부로 느끼게 해주었다. 물론 동포제였기 때문에 여전히 면제받을 여지는 있었으나 면제여부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면리의 행정기구 및 향회에서 또한 양반층이 배제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었다. 면세특권의 상실과 정치적 소외를 가장 실감 있게 느끼는 부분이었다.

무엇보다도 호전제도의 실시가 농민군의 요구를 개화파 정부가 받아들였다는 데 불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봉준은 호포를 1호당 2냥씩 정해서 봄, 가을에 두 차례에 걸쳐 내게 해달라고 건의한 적이 있는데6) 이에 비해 개화파 정부는 호포전을 1호당 3냥씩으로 정하여 봄, 가을 두 번 내도록 하여 세액만 차이가 있을 뿐, 농민군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호전제도가 이렇게 농민군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라면 양반의 면세특권을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세금 액수로 보면 그야말로 얼마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호전에 대한 양반유생층의 반발은 의외로 크고 광범위하였다. 경상북도 각 군에서는 “지난날 호적을 면하던 구습으로 호포(戶布) 돈을 준수(準數)히 물까 염려하고 의심하여 백단(百端)으로 호적하기를 모탈(謀奪)”하였다고 한다.7) 비록 1896년 의병이 일어난 지역은 아니지만, 강화지역에서는 호전이 전에 없던 동포제를 창출(刱出)하였다고 하여 거납하고 세금액수를 줄여줄 것을 호소하였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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