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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궁운동과 여주 의병

* 환궁운동1)과 여주 의병

심상희가 1896년 4월 부하 포군을 이끌고 귀순하였지만, 아관파천 직후에는 의병을 해산할 뜻이 없었다. 친러 개화파 명성황후 지지세력이 의병을 해산하거나 의병부대에서 떠났어도 1896년 2월 중순 이후부터 경기도 여주, 이천, 양주, 적성, 수원, 용인, 광주 등지에서 의병이 활발하였다.2)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여주 의병 역시 2월 24일과 25일에 정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패배할 때까지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2월 25일 여주지역에 의병이 없다고 하였지만, 심상희가 귀순하는 4월 중순까지는 여전히 활동하였다고 생각된다.

아관파천 이후 여주와 여주 부근 지역 의병의 동향을 『독립신문』에 기록된 의병 관계 기사를 통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3)

아관파천 직후 의병활동이 오히려 더 활발해지자 친러 개화파 정권은 해산 권유와 동시에 의병에 대한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의병 토벌을 위한 친위대의 파견 날짜와 지역, 관련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4)

2월 19일
여주 이천, 친위대 중 2소대. 양주 적성, 친위 2소대.
2월 24일
수원 용인, 강화병 400명.
2월 29일
광주산성, 친위 2대대 중 1소대.
3월 4일
친위 제4, 제5대대 증설.
3월 3일
춘천부, 친위 2소대. 3월 17일 춘천, 친위 양(兩)소대 첨파(添派).
3월 25일
진주 안동, 친위 2대대 중 2개 중대.
5월 6일
강릉부, 친위 1중대.
6월 11일
칙령 제 28호 ‘유사한 지방 각군에 포수를 설치하는 건’ 공포
6월 14일
청주군, 친위 1중대
7월 3일
개성, 친위대병 파견.
8월 26일
영평 포천, 친위 5대대 중 1중대.
9월 10일
유사한 지방에 병참설치에 관한 건.
9월 19일
공주 홍주, 친위병.

의병 진압 관군의 파견 상황을 아관파천 이후 의병봉기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3월 초순에는 특히 춘천 의병의 활동이 활발하였음 알 수 있다. 관군에게 패해 무력화되고 일부가 해산하기도 하였지만 해산하지 않고 각지로 흩어진 의병부대는 1896년 5월에도 춘천 부근 각 군과 경기도 동부와 남부지역에서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5)

1896년 5월 중순에도 여주 의병으로 추정되는 의병들이 장호원과 이천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5월 17일 의병 500여 명이 일본군의 화물을 탈취하고 전신선 10리를 절단하였다. 이 의병은 장호원 북방 10리쯤 되는 이남정(梨南亭)에서 일본군 전신 수비대와 1차 교전한 후 죽산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였지만 화물을 다시 빼앗기고 죽산과 여주 방면으로 패주하였다.6) 5월 20일에도 의병 600여 명이 장호원 수비대를 습격하였다가 10명의 사망자를 내고 여주 쪽으로 패주하였다.7)

1896년 5월 30일 여주와 죽산의 의병 수천 명이 이천읍에 돌입하여 민가 천여 호를 불태우고, 이천군의 조세장부, 문서 등을 역시 불태웠다.8) 이천을 공격한 후 죽산읍에도 들어가 죽산읍을 불태웠다.9) 이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중대장 신우균과 권숙진이 지휘하는 140여 명의 군대가 6월 4일 투입되었다고 한다.10)

1896년 5월 중순부터 6월 초의 시기에 여주, 죽산, 이천 지역에서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11) 여주 의병이 활발하게 활동하자 이에 대응하여 정부는 6월 19일 여주군에 관포군 200여 명을 설치하여 8월 20일까지 존속시켰다.12) 여주군에 관포군을 설치하였다는 것은 이 시기 여주지역에서 의병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의병활동이 활발하여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1896년 6월 11일 「유사한 지방각군에 포수를 설치하는 건」이 칙령 제28호로 공포되고 이에 대한 군부의 세칙이 6월 15일에 공포되는데 이 법령들은 두 가지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의병활동이 활발한 지역과 의병의 위협을 받는 각군에 관포군을 설치하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의병에 들어간 포수를 귀화시키는 것이었다.13) 여주에서 관포군을 설치한 6월 19일이라는 시점은 위의 칙령 28호와 군부 세칙이 공포된 바로 직후였다. 심상희 의병이 자수한 지 두 달 정도 후의 일로서, 심상희 의병 귀순 이후에도 여주지역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1896년 5월 중순 이후 여주 의병은 아관파천 전후의 의병보다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것인데, 이 시기 여주 의병의 구성과 조직, 주도자와 지휘자, 배후 세력 등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 의병의 활동시기가 환궁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는 데서 이 의병이 환궁운동의 주모자였던 민영준, 김병시와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짐작하는 정도이다. 민영준이 민용호 의병을 이용하여 환궁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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