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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심상훈의 입각과 심상희 의병의 귀순

아관파천을 기점으로 하여 1896년 의병 운동의 성격이 달라졌다. 의병의 우선적인 목표가 고종의 경복궁 환궁이었기 때문에 의병은 친러 개화파 정권을 반대하고 친러 개혁을 반대하였다. 이에 따라 친일 개화파 정권이 아니라 친러 개화파 정권이 의병을 진압하게 되었다.

친러 개화파 정권이 의병을 진압하게 되면서는 아관파천 이전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던 친러 개화파 명성황후 지지세력이 의병을 해산하거나, 의진으로부터 이탈하였다. 여주 의병을 배후에서 조종하였고, 이춘영 의병에 아들을 들여보냈던 심상훈도 서서히 의진을 이탈해갔다.

심상훈은 유인석 의병부대에서 먼저 이탈하였다. 이춘영 의병부대에 심상훈, 홍계훈, 민승호 집안에서 심리섭, 홍병진, 이근영 등을 들여보낸 사실은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이들은 이춘영의 종사였다가 나중에는 유인석의 종사가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1) 심리섭이 1896년 3월 16일에, 홍병진은 3월 19일에 이승휘(孟山 고을 원을 지냈고 충주 烏甲에 거주)와 함께 각각 유인석 부대를 떠나서 서울로 갔다. 그후 심리섭은 선유위원이 되어 4월 11일 의병 해산을 요구하는 동시에 해산하지 않을 경우 외국군대가 공격할 것이라고 협박하는 서신을 유인석 부대에 보냈다. 이근영은 언제 떠났는지 확인되지는 않지만 4월 25일 심리섭, 이근영, 홍병진, 이승휘 등 4명이 함께 제천으로 내려와 그 다음날 관군측 대장 장기렴과 함께 나타났고, 4월 28일에는 칙유를 가지고 의병부대로 들어왔다.2)

심리섭 등이 의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때 이춘영 의병의 배후세력이었던 심상훈이 점차 러시아 쪽으로 기울고, 4월 22일 탁지부 대신에 임명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유인석이 ‘역당’으로 간주하는 이범진 등으로부터 심상훈이 탁지부 대신에 임명되었으니, 그의 아들이 의진에 머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심상훈의 탁지부 임명 한 달여 전에 의진을 떠난 심리섭은 탁지부 대신 임명과 동시에 선유위원이 되어 다시 내려왔다. 의병측에서는 심상훈을 의병에 끌어들이기 위해 심상훈과 작은 아들을 대장소로 불러들였고, 5월 4일 심상훈은 유인석 의진에 와서 하룻밤을 묵고 갔다.

심리섭 등이 의병을 떠난 시기는 이춘영의 전사, 김백선의 처형, 민의식의 이탈 이후로서 명성황후 세력이 의진에 남아 있지 않을 때였다. 게다가 유인석은 아관파천의 기본 성격을 권력쟁탈전으로 보았고, 따라서 아관파천으로 인해 달라진 것이 거의 없으며 의병과 적대적 관계라고 보았다.3) 이에 따라 유인석은 이범진, 이완용, 이윤용, 박정양 등 아관파천 주모자들을 ‘역당’ 또는 ‘역도(逆徒)’로 보고 그들에 대해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4) 아관파천에 대해 부정적으로 대하고, 아관파천 세력과 적대적 관계가 되어가자 아관파천 이후 유인석 의병은 주위로부터 협조가 끊어지게 되었다.5) 따라서 유인석 부대는 군수물자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6)

유인석 의병이 이범진 등을 역당으로 몰아 집권세력과 적대적 관계가 되는 상황에서 황후 지지세력으로 친러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이들로서는 더 이상 의병부대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7)

또한 여주 의병대장 심상희는 심상훈이 탁지부 대신에 임명된 4월 22일과 비슷한 시기에 귀순하였다. 심상희는 아관파천 직후인 2월 18일에 내려진 의병 해산 선유조칙과 2월 27일에 내려진 의병해산 선유조칙을 받아들이지 않고, 2월 29일에 의병 해산 불가와 역적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지만8) 4월 중순경에 이르러 결국 선유조칙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심상희와 부하 포군들은 4월 16일부터 5월 5일 사이에 귀순하여 관포군(官砲軍)이 되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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