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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아관파천 관련 의병의 봉기

1896년 2월 5일 여주 장날 심상희1)가 주도하는 여주 의병이 봉기하였다. 일본군과 3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이 싸움에서 측량사 2명, 공부(工夫) 4명, 상인 1명 등 일본인 7명을 살해하였고, 여주 의병측의 사망자는 7~8명이었다. 이천과 장호원의 중간 지점(여주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에도 수천 명의 의병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2)

2월 7일 오후 2시 30분부터 의병 약 500명이 일본군과 두 번째 전투를 벌였고, 또다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의병측은 10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일본군 군조(軍曹)는 당시 상황을 “전주가 60개 남짓 잘리어 쓰러져 있었으며 여주 남쪽에 있는 그 폭도들은 대단했고 그곳 부근의 인심이 매우 불온했다. 이를 요약해보면 여주 이남에 비해 그 이북의 전선 피해는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3)고 전하였다.

여주 의병은 2월 10일 일본군과 세 번째 전투를 벌였다. 의병의 세력이 맹렬하여 일본군은 이번에도 퇴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특히 근방의 촌락에서 의병에게 호응하는 바람에 일본군은 간신히 장호원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일본군 정찰대는 이 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근방의 촌락 인민들도 모두 적도에 가담한 것 같았으며, 도처에 적도 아닌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상황으로 미루어 생각건대 여주의 적도는 나날이 어디선가 와서 가담하고 그 세력이 급격히 증가하는데, 여기에 연도 선로의 인민이 가담하는 추세에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차후 얼마나 큰 세력을 구축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4)

이 지역 부근의 일본군 수비대는 송차진에 9명, 곤지암에 9명, 이천에 16명, 장호원에 8명, 가흥에 19명으로 이 병력만으로는 의병을 격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편 선로의 개통도 어렵고, 전신선 복구는 더더욱 어려웠다고 한다. 이에 일본군은 대구, 낙동으로부터 25명, 부산으로부터 1개 중대를 가흥지역으로 파견하였다.5)

2월 15일에도 이천과 장호원간 ‘당바이’ 부근에 의병의 출몰이 끊이지 않는다는 보고도 있고, 2월 17일 의병의 숫자가 약간 줄어들었다는 보고도 있지만,6) 여주 의병은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2월 24일과 25일 이틀 동안 관군과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받고 패퇴하였다. 이 때 여주 의병은 서울과 장호원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여 양쪽 다 지고 말았다. 장호원 쪽에서는 여주 의병 600여 명이 일본군 수비대 90여 명과 교전을 벌였다. 24일에는 2시간의 교전끝에 일본군을 패퇴시켰지만, 오후 4시 30분부터 이어진 전투는 밤새 계속되어 25일 오후 2시 30분에 의병측의 패배로 끝났다. 이 싸움에서 의병측은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원주 방향으로 갔다. 이천 쪽의 싸움에서도 의병은 9명의 사망자를 내고 24일에 이미 패퇴하고 말았다. 이때 여주의 과반이 전화를 입었다고 하며, 26일 현재 여주와 장호원에는 의병이 전혀 없다고 하였다.7)

여주 의병의 배후는 심상훈으로 알려져 있었다.8) “심상희라는 자는 심 탁지부 대신의 조카인데 심 탁지는 은밀하게 이와 상의한 바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고 하거나 “충청도 여주에 거주하는 민씨족을 교사해서(심상훈도 폭도 거괴의 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짐) 폭도를 도발시켜 우리의 전신감시대를 습격케 하여”라고 하는 것 등이 그것이었다.9)

심상훈은 아관파천의 실질적인 주모자 이범진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범진의 춘천 의병과 심상훈의 여주 의병이 개화파 정권을 전복하려 한 것은 일본 공사관의 다음과 같은 보고에 잘 나타나 있다.

이번 사변이 노국공사관의 후원에 의해 정동파인, 즉 이범진 등의 음모에서 나온 것임은 명료한 사실입니다. 애당초 범진 등이 먼저 춘천 폭도를 유기(誘起)해서 비밀리에 이들과 기맥을 통하여 크게 일을 벌이려는 경황(景況)을 나타냈습니다. … 또 충청도 여주에 거주하는 민씨족을 교사해서(심상훈도 폭도 거괴의 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짐) 폭도를 도발시켜 우리의 전신감시대를 습격케 하여 동주(同州) 남북에 있는 100여 리 간의 전선을 절단시켰고, 황해도 평안도에 있는 건달패를 몰아세워서 11일을 기해 각처에서 폭동을 일으키게 하려 한 형적이 있습니다.10)

심상훈의 여주 의병과 이범진의 춘천 의병은 친일 개화파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을 공동 목표로 하였다. 춘천과 여주의 의병은 아관파천 직전에 일본군을 공격하여 인명피해를 입히고 전신선을 파괴하여 통신을 두절시키는 등 활동양상이 비슷하였다.

먼저 아관파천 이전의 일본인 피해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 공사관은 2월 11일의 아관파천을 전후하여 의병에 의한 피해건수가 갑자기 증가하였다고 보고 있었는데, 2월 8일 이전에 피살된 일본인은 18명으로 1월 27일 1명, 2월 4일에 8명, 2월 5일에 7명, 2월 6일에 1명, 2월 8일 1명 등 18명이 아관파천 직전에 피살되었다.11) 이 중 9명은 2월 5일부터 8일까지 여주 의병이 살해한 것으로 일본인 측량사 3명, 전신 공부 5명, 상인 1명이었다. 9명은 1월 27일과 2월 4일 춘천 의병이 살해한 것이다.12) 춘천과 여주 의병에 의한 일본인 피살자 18명은 1896년 ‘복수보형(復讐保形)’ 의병에 의한 실질적인 전체 일본인 피살자 34명의 절반이 넘는 숫자이다. 또한 이 시기 의병에 의해 피해를 입은 전신수비대 관련자(전신공부, 육군고려행자, 병사, 측량수 등)는 모두 23명으로서 전체 피해자 53명의 40%를 넘는다.

다음 전신선 절단, 전주 파괴 활동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여주 의병은 2월 5일 봉기와 동시에 전신선을 절단하고 전신주를 쓰러뜨려 경부선 구간의 전신 통신을 마비시켰다. 여주지역에서 일본 전신선의 피해 상황은 전신선 절단이 10리라고 하거나 전신선 파괴가 수십 리 또는 ‘남북 100리’에 걸쳤고, 쓰러뜨린 전신주는 60개였다. 전선을 절단함으로써 경부선 구간의 전신 통신을 마비시켰다. 이들은 우체부도 공격하여 우편선로도 불통시켰다.13)

춘천 의병에 의해서는 경원선 구간에서 2월 3~7일 사이에 수십 리에 걸쳐 전선이 파괴되고 여러 곳에서 전주가 모두 소각되어 경원간(京元間) 통신이 두절되었다.14) 의병들의 전선 절단 활동은 경부선 구간에서 여주지역과 연결되는 가흥과 태봉지역에서도 활발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유인석 의병부대가 전선 파괴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15)

경부선 구간에서 전신시설에 대한 공격은 이천·여주·가흥 사이의 구간과 태봉 등지에서 가장 치열하였는데 가흥과 태봉지역은 일본군의 통신소가 있어서 그 통신소를 공격하려는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통신소를 공격하여 전신 기계 등의 시설을 파괴하는 것은 전선 절단이나 전주 파괴보다는 훨씬 효과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전신을 불통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춘영과 함께 봉기하였던 서상렬이 재를 넘어가 문경과 예천을 중심으로 하여 태봉을 공격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주 의병의 전신 절단, 전신주 파괴 등 통신 선로 방해는 친일 개화파 정권에 대한 일본의 지원을 차단하고 서울에서 부산이나 원산을 통한 일본과의 전신 연락을 두절시키려는 데 그 목표를 두었고, 실제로도 일본측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우선 경부간 전신선이 불통됨으로써 일본은 당분간 인천에서 부산까지 전령선을 운행하여 서울, 인천, 부산을 거쳐 부산에서 본국과 전신 교신을 하였다.16) 전신선이 불통된 구간에서 서울로 연락할 사항은 인편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본 공사관의 보고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에 서울 인천 사이에서도 의병이 일어나고 있었다고 하는 바17) 경부간 전신 불통과 관련된 것이라고 추측된다.

무엇보다도 전신선의 절단이 러시아 공사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노국공사관(露國公使館)의 사주에 의해 전선을 절단하였다고 이범진은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1896년 2월 17일 일본 공사가 본국에 보고하고 있고,18) “가흥 장호원 간의 전신선을 절단한 것은 러시아 공사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한 것은 이범진이 궁내관리에게 사변 후 직접 얘기한 바”19)라고 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은 의병들로 하여금 전신 시설을 공격, 파괴하게 함으로써 서울 주재 일본 공사관을 본국으로부터 고립시키려 하였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20)

이것은 적어도 2월 17일 이전에 전선이 절단되는 지역(경원간, 여주)에서의 의병봉기가 러시아 공사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범진이 밀접하게 관련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경원간 지역과 여주지역의 의병이 아관파천 주도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은 명성황후 계열의 중앙정치세력이 개화파정권 타도라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중앙에서 전체 계획을 수립하였고, 이에 따라 각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키도록 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21) 중앙의 작전 계획에 따라 각 지방별로 역할을 분담하고 있었던 것으로 아관파천 직전인 2월 8일에 일본 공사관이 입수한 정보에 다음과 같은 서울, 인천, 원산, 부산 등 네 도시에 대한 공격 계획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날짜를 잡아 일시에 봉기해서 경성에는 춘천에서, 인천은 충청도로부터, 부산은 경상도 및 강원도 남부로부터, 원산항은 강원도의 반절 부분과 문천(文川) 이북에서 내습하려는 방법이 이미 결정되었다.22)

중앙의 정치세력과 연결된 각지의 의병이 전국적으로 봉기하자 친일 개화파 정부는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1월 17일 포천에서 최익현을 체포, 압송하여 구금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친위대를 파견하여 무력으로 진압에 나서는 한편, 선유사를 보내어 설득, 회유하였다.

관군을 파견하여 진압한 지역은 1월 21일 홍주, 1월 25일 안동, 1월 31일 춘천, 2월 6일 여주 등이다. 홍주는 관군 파견 이전에 이미 이승우의 반의병 활동으로 해산한 상태였다. 안동은 1월 28일과 29일 이틀에 걸친 접전 끝에 관군이 안동부를 점령하고 의병을 해산시켰다.23) 1월 31일에는 춘천 방면으로 친위대 1개 중대를 보냈으나 제압에 실패하여 다시 2개 중대를 추가로 파견하여 2월 6일과 8일 사이에 의병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여주 의병에 관한 관군의 진압 여부는 확인되지 않지만, 2월 6~8일 사이에는 진압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친일 개화파 정부의 신속하고 강경한 진압 조치로 인해 의병봉기는 초기에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최익현의 구속, 원주(단양) 이춘영 부대의 무력화와 함께 홍주부, 나주부, 안동부, 춘천부 등의 지역에서는 의진이 패배당하였고 관군이 주둔하였다. 이에 따라 의진들은 근거를 잃고 사기가 저하되어 애초의 ‘복수보형(復讐保形)’ 즉 서울로 들어가 국왕을 구출한다는 목표를 수행할 수 없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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