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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목 가문의 의병봉기

* 민영목 가문의 의병봉기1)

1896년 의병 중에서 명성황후의 복수를 목표로 하여 일어난 의병으로 주목되는 것이 이춘영 의병이다. 이춘영은 1896년 1월 12일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홍주, 춘천, 안동 등지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봉기하지만 며칠 정도 앞서 일어났다.2) 이춘영 의병부대는 나중에 유인석 의병부대로 이어졌다. 1월 12일 원주에서 시작된 이 의병은 이춘영(지평 곡수 거주, 덕수 이씨, 당시 28살)이 중심이 되어 이필희(대장), 이범직, 안승우3), 서상렬(軍師), 원규상 등이 지도부를 구성하였고, 주력군은 포군대장 김백선이 지휘하는 지평 포군 수백 명이었다. 원주 안창역4)에서 모여 원주로 진격, 관아를 점령하여 원주군수가 충주로 피신하였으며, 1896년 1월 22일 단양의 장회촌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여 관군을 패퇴시키기도 하였다. 이 장회촌 전투는 1896년 의병으로서는 관군과의 최초의 전투였는데, 이춘영 의병은 관군을 패퇴시킬 만큼 탄탄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선유위원 내부협판 유세남과 지평 군수 맹영재의 반의병 활동 결과 지평 포군이 반 이상이나 돌아감으로써 이춘영은 의병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이필희가 대장에서 물러나고 서상렬은 재를 넘어 풍기로 갔으며, 이춘영은 나머지 포군을 이끌고 제천으로 들어가 며칠 후 유인석 부대에서 중군을 맡았다. 이춘영은 중군을 맡은 지 20여 일 만인 2월 23일 가흥전투에서 전사하였다.5)

그렇다면 이춘영은 어떤 사람이기에 제일 먼저 거의하여 관군과 전투를 벌였을까? 유인석과 그의 문인이 모여 ‘처의삼사’를 논의할 때 이춘영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것, 유인석을 비롯한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망명(去而守之)’을 결정하고 실제로 짐을 꾸려 요동을 향해 길을 떠났을 때 거의한 점 등으로 보아 유인석의 문인이라든가, 같은 화서(華西) 학통이라는 것만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여기서 이춘영이 여흥 민씨의 외손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6) 이춘영의 할머니가 민치문의 딸로서 덕수 이재신(監役)에게 출가하였고 그들의 아들이 이민화, 그리고 민화의 아들이 춘영이었다. 그런데 갑신정변 때 죽은 민영목이 ‘치문-달용’의 둘째 아들이었고 나중에 민영목의 양자가 되는 민형식(閔亨植)은 민영목의 친조카이었다. 다시 말해 이춘영의 할머니가 민영목의 고모이고, 이춘영의 아버지 민화와 민영목은 내외종 사촌간이었다. 이춘영과 민형식은 촌수로는 6촌이었다. 민영목은 명성황후 집안의 방계의 계후손이 되었고, 다시 친조카(넷째 동생인 영필의 둘째 아들) 형식을 입양하였다. 명성황후 집안은 자손이 번창하지 못하여 계후손마저도 3명(영익, 종식, 형식)뿐이었는데 민형식이 그 중 한 자리를 차지했으니, 명성황후가 각별히 아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한편 이춘영과 함께 거의한 이범직은 1894년 여름에 강원 감사 민형식을 찾아가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마땅히 생각’할 것을 제의하였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7) 이것은 이춘영, 이범직 등이 민형식과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으로 민씨 정권이 몰락한 것과 관련하여 사람들은 당연히 민형식이 모종의 조치를 취해야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춘영 부대의 지평포군을 지휘하였던 포군 지도자 김백선이 삼전(三田) 민씨(閔氏)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음이 「종의록」에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민(閔, 민의식)은 장교가 되기를 원하다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선봉(김백선)의 종사가 되려고 막하(幕下)로서의 예를 심히 공손히 지키니 金(백선)은 본시 농촌의 상민이라, 평일에 삼전 민씨를 우러러 보기를 하늘과 같이 하다가, 지금 민(閔)이 문득 이렇게 하니 마음에 기뻐하며 감사하고 … [( )는 필자]

삼전 민씨는 ‘삼전동에 사는 민씨’의 의미로서 ‘삼전’은 여주군 주내면(현재 여주시 창동) 삼전동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이고 ‘삼전동에 사는 민씨’는 민치문의 집안을 가르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흥민씨족보』에 보면 민의식의 아버지인 영륙의 묘가 삼전동에 있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삼전 민씨’는 더 구체적으로 치문, 달용, 영목과 그의 양자 형식 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위 자료는 또한 민의식(1869년 4월 12일생)과 김백선이 매우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기도 하다. 민의식이라는 이름은 『여흥민씨족보』에 여럿 나오지만 민용호가 민의식을 3종손으로 부르기 때문에 이를 충족시키는 출계 관계는 달용의 서자 영륙의 아들인 의식뿐이다.8) 적파와 서파의 차이는 있지만 민영목과 민의식은 삼촌, 형식과 의식은 사촌 사이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춘영, 김백선, 민의식 세 사람은 ‘삼전 민씨’를 고리로 하여 결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춘영은 민형식과 연계되어 봉기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민형식 역시 양자로서 집안의 사정상 직접 의병에 나설 수는 없는 처지였고, 그 대신 이춘영과 민의식을 내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춘영 의병부대와 유인석 의병부대에는 덕수 이씨의 참여가 주목된다. 이춘영, 거의 당시 대장을 맡았던 이필희, 안승우의 장인 이민정 등은 모두 덕수 이씨이다. 때문에 덕수 이씨로서 여흥 민씨와 관련되었던 인물들이 의병에 참여할 가능성은 매우 크다. 그 중에서도 민승호의 부인 쪽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종의 외삼촌이기도 한 민승호는 민치록의 양자로 입양되어 명성황후의 양오빠가 되었는데 그의 세 번째 부인이 덕수 이민성의 딸(1851년생)이다.9) 이민성의 아들 중에 이근영이 있는데, 유인석 부대에도 이근영이라는 인물이 있었다.10) 명성황후의 복수를 목표로 하는 의병이라면 이민성 쪽에서도 참여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하겠다.

이춘영 부대에는 심리섭, 홍병진, 이근영 등 세 사람이 참여하였다가 3월 중순 의병부대를 떠났다. 이들이 떠날 때 의병에 들어온 지 두달 여 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춘영이 거의할 때 함께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심리섭은 심상훈의 아들, 홍병진은 홍계훈의 종손, 이근영은 민승호의 처남이다. 심상훈, 홍계훈, 민승호 이 세 사람은 모두 명성황후 세력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심상훈은 고종과 이종사촌이지만, 고종보다는 명성황후 계열의 인물로서 민승호가 심상훈의 외삼촌이며, 대원군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홍계훈은 알려진 대로 임오군란 이후 황후의 총애를 받은 이래 을미사변 때 광화문을 지키다 피살된 대표적인 명성황후 세력이다.

이춘영 의병은 명성황후의 복수를 위해서 여주 삼전동의 민영목 집안을 중심으로 민승호의 처가, 심상훈, 홍계훈 등 네 집안에서 각각 이춘영, 이근영, 심리섭, 홍병진 등의 인물을 보내어 성립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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