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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민경혁 후손의 민용호 의병부대 참여

민용호 의병부대에 관여하였던 여흥 민씨는 동식(東植), 항식(恒植), 병성(丙星), 의식(義植), 치남(致南) 등 모두 5명이다. 민동식은 1896년 2월 17일 민용호에게 와서 3월 4일 강릉 수성장이 되어 재곡을 관리하였고, 민용호가 간도지방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함께 다니다가 여주로 돌아왔다.1) 민병성은 배자와 겨울옷을 보내왔다는 기록만이 보이지만 군사비의 상당량을 조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여주 심상희 부대의 선봉장 이겸성이 민병성을 운량관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민병성은 상당한 재력가였던 것 같다.2) 민항식은 직접 의병부대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으나 편지 등으로 연락하고 있었다.3) 민의식은 김백선이 유인석에게 처형당한 이후 민용호 부대에 들어와 한 달 가량 머물다가 돌아갔다고 한다.4) 5명 중 민치남은 확인할 수 없었다. 이 5명 외에도 1897년 1월 26일 민용호가 충식(忠植), 병태(丙台)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5)

동식, 항식, 병성, 의식, 충식, 병태 6명 중에서 의식을 제외한 다섯 사람의 혈통을 『여흥민씨족보』에서 찾아보면 5명 모두 민경혁의 장자 치요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6) 그런데 민영준의 양자인 형식(衡植)이 민경혁의 2자 치순의 후손이라는 사실과 민용호가 경혁의 3자 치우에게 ‘입양’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식, 항식, 충식 등은 민영준의 양자인 형식과 8촌 사이였고 민용호 의병에 관계한 여흥 민씨들은 모두 경혁을 동조로 하는 8촌 이내의 사이인 것이다. 게다가 민용호는 스스로를 ‘척계폐부지신(戚係肺腑之臣)’7)이라고 하고 있다.

민영준의 양자인 민형식과는 경혁을 동조로 하는 당내라는 사실에서 민용호 의병부대는 민형식을 통해 민영준이 배후세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민경혁의 2자 치순의 후손인 민형식을 중심으로 하여 민경혁의 장자 치요의 후손들이 재정을 부담하고, 3자 치우에게 ‘입양’된 민용호가 의병대장으로 나섰던 것이다.

민영준은 1894년 당시 정권의 실질적인 실력자로서 병조판서와 경리청 당상을 겸하고 있다가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 이후 섬으로 유배되었다. 얼마 후 탈출하여 평안도 지역으로 도망갔다가 청군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으나, 이준용과의 교환 조건으로 귀국하여 처벌을 받았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 일본을 거쳐 청나라에 머무르다가 1895년 8월 초 귀국하였다. 당시 민영준은 정계에 다시 복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부정축재에 관한 여론이 널리 퍼져 있었고, 거의 모든 정치세력이 그의 복귀에 경계를 하였다. 특히 일본측의 견제가 대단하였다. 이 시기 황후 시해를 계기로 한 의병이 봉기한다면 민영준은 당연히 그 주도자 중의 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했다. 때문에 민영준은 의병과 관련한 모든 행동에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1895년 10월 11일의 춘생문 사건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숨어 지내며 아관파천 계획을 수립, 지휘하였던 이범진이 민영준에게도 계획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민영준은 이를 거절하였다.

민영준은 민형식(閔炯植)과 함께 민씨 세력의 핵심인물로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는 일이라면 마땅히 먼저 나설 것으로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관파천 직후인 2월 14일 민영준과 민형식에 대해서 법부에 의한 의법조치가 지시되고, 이틀 후인 16일, 두 사람은 교동군 10년 유배형을 받아8)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아관파천을 모의할 때 이범진은 민영준에게 내통하여 함께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민영준이 이범진에게 가세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관파천이 성공한 후 이범진 등은 당시의 음모가 탄로날 것을 우려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영준 등이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어서 언제 다시 등장하여 정권을 위협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민영준과 민형식을 유배형에 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9)

안경수와 김종한은 교동에 유배된 민영준을 유배에서 풀어줄 것을 이범진에게 교섭하는 한편, 민영준의 입각을 목표로 한 환궁운동을 1896년 5월에 전개하였다. 5월 중으로 환궁을 성사시키려 하였다는데 민용호가 추진한 6월 1일 호가환궁(護駕還宮, 임금의 가마를 호위하여 경복궁으로 돌아간다는 뜻) 계획과도 시기가 비슷하다. 민영준은 민경혁의 후손을 중심으로 하는 민용호 의병으로 하여금 6월 1일의 호가환궁 계획을 추진하도록 하는 한편, 중앙 정치세력으로 하여금 자신의 유배형 취소와 입각, 고종의 경복궁으로의 환궁을 추진하게 하였던 것이다.

관군의 진압으로 환궁운동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려 하자 민항식과 민병성은 민용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不如還歸田園)”든가 “때를 기다려 움직이는 것이 낫겠다(不如待時而動)”고 하여 해산할 것을 종용하였다.10) 민항식과 민병성이 해산을 종용하자 민용호는 민동식에게 돌아가라고 하였다. 이들의 해산 종용은 결국 군자금을 그만 대주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민항식, 민병성 등이 민용호에게 해산을 권유한 것이 6월 초, 또는 중순경이라고 생각된다. 5월 22일 민영준이 교동군 유배에서 풀려났기 때문에 구태여 의병이라는 강공책을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895년 9월 16일 여주 청심루에서의 유통 게시는 바로 1895년 9월 신응조의 거사미수 사건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된다. 1895년 9월 송근수와 함께 거의를 모의하였다가 발각되었다는 신응조는 민경혁의 외손자이다.11) 신응조는 이종사촌 대원군보다는 황후에 더 가까웠다고 한다. 황후의 복수를 위해 1895년 9월 송근수와 함께 거의하려 하였던 신응조라고 한다면 경혁을 동조로 하는 8촌 이내의 여흥 민씨들(동식, 항식, 충식, 병성, 병태 등)이 거사할 때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다만 신응조는 고령으로 기력이 매우 쇠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응조는 자신이 직접 나서는 대신 산청 출신의 보부상 민진호를 앞세웠던 것으로 보인다.12) 산청의 민진호는 1886년 부친상을 치른 후 일찍이 고리대업에 손을 댔다가 가산을 탕진하였고, 산으로 피해 화전을 일구어 먹고 살다가 서울로 떠난 후 1894년 무렵 여주 민병성가에서 내려와 있었다.13) 산으로 피한 이후 몇 년의 행적이 확실하지 않은데, 혹시 이 기간 중에 보부상이 되어 여주의 민씨가를 드나들었던 것은 아닌가 추측된다.14) 보부상이었던 민진호가 여주지역 민씨와 관련을 맺고 있다가 신응조의 지시를 받고 유통을 게시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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