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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과 여주지역의 동향

1894년 2월 17일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은 임술년 이래 전국 수많은 군현에서 발생한 농민항쟁과 성격이 같았다. 지방관의 지나친 조세 수탈에 농민들이 항쟁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가 난민들을 왕조정부에서 사교로 배척해온 동학도라고 해서 심하게 탄압하자 전봉준은 동학 조직을 결속시켜서 대대적인 봉기에 나서게 되었다.

고부 항쟁의 지도자 전봉준은 무장의 동학 대접주 손화중을 찾아가서 대대적인 봉기를 주장하여 동의를 받고 김개남 등과 함께 농민들을 소집해서 무장봉기를 준비하였다. 4월 25일 무장에서 창의문을 선포한 동학농민군은 고부로 진격해서 관아를 점거하였다. 이 때 무장에서 멀리 떨어진 금산과 더불어 충청도의 회덕과 진잠에서도 동학농민군이 호응하였다. 교조신원운동을 적극 주장하면서 정치운동으로 전환을 꾀했던 교단의 고위간부인 서장옥 계열의 동학조직이 움직인 결과였다.

경기도 일대의 동학조직은 1차봉기에 합세하지 않았다. 동학의 교세가 컸던 충청도 대부분의 군현과 마찬가지로 교단의 봉기지시가 없었을 뿐 아니라 호남 군현의 봉기소식이 전해지 뒤에도 2세 교주 최시형이 반대한 까닭에 호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1894년 여름에 왕조정부는 삼남 일대에서 동학 조직의 활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 전주화약 이후 전라도에서 민정기관 집강소가 관부를 대신하여 폐정개혁에 나서고 있어도 제어할 능력이 없었다. 무장한 농민들이 관치질서를 붕괴시키고 있어도 대응하지 못하고 있던 지역은 충청도 대부분의 지역과 경상도의 충청·전라 접경 군현, 그리고 강원도의 여러 군현도 같은 상태였다. 경기도의 남부 여러 군현에도 동학에 가담한 농민들이 증대되고 있었다.

이 시기 경기도 여주의 한 농민이 동학에 입도해서 활동하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1)는 그러한 사정을 전해주는 실례가 된다. 황만기라고 하는 이 농민은 평민 신분으로서 임학선(任學善)에게 이끌려서 동학에 들어간다. 강제로 입도했다고 자료에는 기록했으나 임학선의 지시를 순종하는 것을 보면 동학교도로 활동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갑오년에 입도한 신입도인이라고 해서 모두 원민(寃民) 범주에 넣어서는 안 되는 근거가 되는 자료이기도 하다.

경기도 남부 일대의 동학은 어느 규모로 커졌을까? 경상도 고성부사를 지내고 서울로 올라가는 한 관원의 기록은 이를 잘 알려준다.

“용인(龍仁)길로 올라가기로 작정하다. 16일 용원(龍院)에서 점심을 먹고 비석이 세워진 길가 여관에서 묵었다. 사과(司果) 이진우(李鎭祐)가 김해로 내려가다가 와서 숙박했다. 서로 만나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깊은 밤에 문밖 마을 안에서 남녀가 글을 읽고 암송하는 소리가 났다. 이(李)사과가 ‘길에서 책을 읽는 저 소리는 무슨 소리요?’하고 물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고성(固城)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겪고 본 것인데 등짐 진 사람이나 머리에 짐을 인 사람이나 밭가는 사람이나 나무하는 사람이나 입을 열고 끊이지 않고 하는 것이 저 소리입니다. 처음에는 매우 괴이하고 두려웠으나 들은 지가 오래되어 지금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여관주인이 옆에 있다가 말하였다. “이 지역은 저 소리의 종계(終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를 지나 위로 가면 백암(白巖) 땅에서 간혹 이 소리가 들리지만 더 위로 가면 들리지 않습니다.”2)
이 기록은 9월 중순의 상황을 알려주는 것이다. 충청도 땅은 이미 동학의 영향 아래 들어간 지 오래되었고, 경기도의 많은 군현도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안성, 죽산, 이천 등 이웃 군현과 함께 여주의 형세도 마찬가지였다.

삼남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인 경기도 남부 군현에 동학의 세력이 확대된 것을 왕조정부도 주목하였다. 호남과 호서의 동학농민군이 대규모 봉기를 결정한 9월에 들어와 왕조정부는 관군을 통괄해서 지휘할 최고기구로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을 설치3)하고 정예 경군을 가장 먼저 경기도 남부 군현으로 파견했다.

그 방식은 경군 지휘관을 지방관으로 임명하면서 군현 경내의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이 방침에 따라 장위영(壯衛營) 영관(領官) 이두황(李斗璜)을 죽산부사에 임명해서 장위영 병대를 이끌고 가게 했고, 또 경리청(經理廳) 영관 성하영(成夏泳)을 안성군수에 임명해서 경리청 병정을 지휘해서 가게 했다. 죽산부사 이두황의 진중일기(陣中日記)를 보면4) 9월 말 경기도 남부는 동학농민군이 봉기해서 요지에 둔취하고 있는 등 관군 정예병이 파병되지 않고는 관치질서의 회복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동학교단의 기포령에 따라 무장을 강화하고 군수전(軍需錢)과 군수미(軍需米)를 모으는 시기였던 것이다.

지평에서는 경기도 일대의 동학농민군을 견제하기 위해 민보군이 결성되었다. 전감역 맹영재(孟英在)가 지휘하는 민보군은 지평뿐 아니라 경기도의 인근 군현, 그리고 충청도의 동학농민군을 제압하는 유력한 군사력을 갖추었다.5)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넘어오는 동학농민군도 맹감역의 민보군에게 밀려서 위축되는 형편이었다. 여주와 이천을 비롯한 경기도 남부 군현에서 합류한 동학농민군은 이두황의 장위영 병대가 진압준비를 하던 때에 남하하기 시작했다. 음죽에서는 9월 25일 관아를 포위하여 무기를 탈취해갔고, 29일에는 진천 읍내로 들어간 안성과 이천의 동학농민군 대부대가 현감과 관속을 결박해서 위협하고 무기고를 깨뜨려서 무기를 남김없이 가져가버렸다. 이들은 덕산면 구말 장터6)에서 취회를 하며 세력을 더욱 증대시켰다. 10월 6일에는 읍내에 들어온 동학농민군에 의해 괴산 읍내가 불에 타서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때 청주성을 공격한 동학농민군이 무심천에서 청주 병영의 관군과 여러 날을 대치하고 있었다. 청주목사와 병사의 구원 요청을 받은 양호도순무영은 죽산과 안성의 장위영과 경리청 병대에게 즉각 청주로 직행하도록 명을 내렸다. 죽산 비봉산(飛鳳山) 중턱에 자리 잡은 장위병은 우마(牛馬) 60필에 병정 1천여 명의 규모를 이끌고 출진하였다. 군수에 들어가는 비용은 여주목·이천군·음죽현·양지현의 4개 군현에서 공납하는 조세를 전용해 사용하기로 탁지아문(度支衙門)과 협의를 하였다. 10월 9일 장위영 영관 이두황은 이들 군현에 공문을 보내 할당된 액수를 갑오년의 세금 중에서 획정해서 급히 가져오도록 명을 내렸다. 여주 관아는 다음날 여주에 분정(分定)된 군수비용 2만량을 곧 보내겠다는 문장(文狀)을 보냈다.7)

여주와 이천 등지에서 남하한 동학농민군은 보은으로 내려갔다. 청주를 거쳐서 갔던 자취가 어느 기록에도 남지 않은 것을 보면 괴산에서 미원을 지나 보은으로 행군한 것처럼 보인다. 보은 장내리는 읍내와도 가깝고 숙박 시설 마련도 어려워서 대규모의 동학농민군이 둔취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래서 강원도와 경상도 등 각지에서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영동과 황간으로 분산해서 주둔하였다.

북접농민군은 영동과 황간에서 무장 강화와 군수미 확보에 주력한 뒤 통령 손병희의 지휘 아래 논산으로 행군해서 전봉준의 남접농민군과 합류하였다. 북접농민군의 편제를 보면 경기도의 동학농민군이 차지했던 위치를 알게 된다. 선봉에는 안성의 정경수(鄭璟洙)포를 배치하고 청색기를 들게 하였으며, 이종훈(李鍾勳)포가 좌익을 맡아 백색기를 들게 하였고, 음즉 이용구(李容九)포를 우익으로 삼아 흑색기를 들게 했고, 이천의 전규석(全奎錫)포는 후군으로 삼아 홍색기를 들게 하였다.8) 1890년대에 입도해서 동학의 중진에 들어가는 홍병기, 임순오, 임학선 등은 군사지도자로서 일선에 참여하지는 않고 있었다.

남북접연합농민군의 공주 우금치 공격은 일본군과 관군을 격파하지 못해서 결국 실패하였다. 북접농민군은 수많은 희생자를 낸 뒤에 후퇴해서 장수와 무주를 거쳐 영동 보은으로 되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루면서 행군하였다. 보은 장내리가 불에 타서 폐허가 된 것을 본 동학농민군은 북실에서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들어갔다가 일본군과 민보군의 기습을 받아 또다시 많은 희생자를 내고 괴산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경기도에서 간 사람들은 괴산 일대에서 흩어져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여주의 동학교도들은 교주 최시형을 호종하고 지키는데 노력하기도 했다. 다음의 판결문처럼 임학선의 지시에 의해 한 교도가 강원도 지역까지 찾아가 최시형을 만나고 있었다.

京畿 驪州郡 平民 黃萬己 年 三十九 被告 黃萬己는 去 甲午五月에 東徒 任學善의 脅勒을 受야 入道야 선卽歸化얏다가 昨年 七月에 또 任學善의 言을 聽고 尙道之地에 大宗先生을 義不可不見이라야 逃命한 崔時亨을 訪見고 魚鮮을 饋遺얏고 (최시형과 같은 죄명) 大明律祭祀編一應 左道亂正地術 (동편동조 위종자율) 笞一百 懲役終身9)

‘보국안민’과 ‘척왜양창의’를 기치로 결집한 동학세력이 농민들의 합세 아래 ‘폐정개혁(弊政改革)’과 ‘반일전쟁(反日戰爭)’을 위해 봉기를 했다가 근대무기의 우세한 화력을 이기지 못하고 패배한 동학농민혁명의 과정에 여주의 동학조직도 일정하게 참여하였다. 실패한 혁명과 패배한 전쟁이었지만 여주민들이 가졌던 변혁에의 의지와 반침략 운동은 계속 이어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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