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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여주농민항쟁의 전개와 성격

철종 말년인 1862년에 적어도 삼남 71개 이상의 군현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각 군현에서 일어난 항쟁이 너무 많아서 관변 기록에도 보고된 군현조차 다 적지 않을 정도로 생존을 둘러싸고 분투하던 농민들이 잇달아 항쟁에 나섰다. 종래 농민들은 불만이 있으면 관아에 여러 사람의 이름을 적어 함께 호소하는 등소(等訴) 방식으로 그들의 주장을 표시하였다. 농민항쟁은 그런 차원을 넘어서서 직접 폭력을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항쟁의 형태는 각 군현이 비슷했다. 장날에 주막과 같이 사람이 모이기 쉬운 곳에서 봉기의 주도자들이 계획해서 농민들과 함께 떼를 지어 관아에 몰려가 항의하였다. 민회(民會) 또는 향회(鄕會)를 열어서 농민들이 공통의 주장을 확인하고 집단으로 읍내로 몰려가는 경우도 있었다. 읍내에 들어가서는 평소 과다한 조세 수취로 민심을 잃은 향리를 구타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각종 문서를 불태우며 관아의 건물을 부수었다. 익산과 같은 군현에서는 수령을 들어내 군현의 경계 밖에다 버리기도 하였다. 왕명을 받고 온 지방관을 거부한다는 과격한 표현이었다.

이와 함께 주목되는 것은 읍내의 부민들을 공격하는 일이었다. 농민들이 봉기하게 된 동기는 삼정 수취 등에 연관된 것으로, 이것은 지주들과 직접 관계되지 않았지만 이들에게 공세를 취한 것은 평소의 반감 때문이었다. 19세기에 들어와 시장이 늘어나고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농촌경제의 모습이 크게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농민 가운데 몰락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그 대신 부자는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지주는 빈농이나 유민을 자기 소유지에 정착시켜서 작인(作人)으로 지배하며 향촌사회의 단단한 세력가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지주들 중에는 경작조건이나 지대(地代)를 수납할 때 작인들에게 모질게 대하여 인심을 잃은 사람들이 있었다. 불법으로 남의 땅을 빼앗거나 헐값으로 사들인 지주들은 생존에 허덕이던 농민들에게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더구나 읍내에 살던 향리들의 집은 종종 공격 대상이 되었다. 향리 중에는 읍내에서 큰 집을 가지고 윤택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주요한 조세 수취를 책임을 졌거나 족징(族徵) 인징(隣徵) 등을 통해 철저하게 세금을 걷던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농민항쟁의 와중에서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읍내의 민가가 난민에 의해 파괴되거나 불살라지는 경우는 대개 이들의 집을 대상으로 한 분풀이 성격을 띠었다.

농민 봉기는 자연발생으로 일어났지만 읍내를 들이치는 일은 이를 조직하고 주도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기 마련이었다. 몰락양반이나 농촌 지식인이 주도층이 되어 농민들을 이끈 군현도 있었지만 재지(在地) 명망가가 이끌던 곳이 있기도 하였다. 이들은 민회(民會)를 열어서 농민들의 의사를 집약해서 투쟁을 이끌어나갔다. 중앙에서 안핵사나 선무사가 파견되면 이들 명망가가 직접 항쟁농민들의 요구를 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농민항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조세를 둘러싼 폐단이었다. 농민들은 여러 명목의 조세가 토지에 집중 부과되는 수취방식인 도결(都結)로 고통받았다. 화폐로 세금을 내는 제도가 일반화되는 추세에서 매년 책정되는 결가(結價)가 갈수록 높게 부과되어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결가는 군현마다 각기 다르게 책정되었다. 이웃 군현보다 결가가 높게 책정된 군현에서는 농민들이 지방관과 향리들에게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왕조정부는 유례없는 농민들의 항쟁에 민감히 대응하였다. 항쟁이 벌어진 군현의 지방관을 파직하고 안핵사와 암행어사를 파견해서 원인을 파악하고 사태를 수습하였다. 진주 경상우병사 백낙신(白樂莘)과 진주 목사 홍병원(洪秉元)을 처벌하고 전라감사 김시연(金始淵)의 관직을 삭탈하는 등 봉기지역의 수령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민란 주도자들은 35명이나 체포하여 효수하였으며 57명의 적극 가담자가 정배되었다.1)

왕조정부에서는 농민항쟁의 원인이 삼정문란이라고 보고 유생들에게 널리 삼정개혁책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에 따라 개혁을 추진할 기구인 삼정리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고 개혁안을 반포하고 시행하였다.

임술년의 농민항쟁 와중에 고종이 왕위에 오르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농민항쟁은 수그러든다. 흥선대원군은 농민들의 불만을 제거하는 과감한 혁신정책을 폈다. 농민들에게 토호행위를 자행했던 불량양반과 수탈이 심한 탐관오리를 징치하였다. 그리고 삼정 운영면에서 드러난 문제를 고치기 위해 면세전을 조사해서 줄이거나 무명잡세(無名雜稅)를 금지하고 진상제도(進上制度)를 폐지하는 조치와 함께 양반에게도 군역세를 납부하도록 하는 호포제를 시행하였다. 그렇지만 전근대의 조세제도가 갖는 폐단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권강화책을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경제정책에 실패하고 이어 권좌에서도 물러나게 된다. 대원군 집권기에도 농민항쟁은 황해도의 풍천, 경상도의 칠원·고성·영해, 전라도의 광양 등지에서 일어났지만 임술년과 같이 일시에 여러 지역에서 빈발한 것은 아니었다. 대원군의 뒤를 이은 민씨정권의 부패와 무능으로 인하여 1880년대에는 다시 여러 지역에서 농민들이 불만을 터뜨리게 된다. 1883년에 경상도 성주에서 결가를 높게 책정한 까닭에 농민들이 항쟁을 하였고, 1884년에는 전라도 가리포 첨사가 침탈을 일삼아 농민들이 난을 일으켰다. 또 황해도 안악에서는 군민들이 관정(官庭)에 난입하면서 읍내에 살던 향리의 집들을 부수는 일이 일어났다.

여주에서 농민들이 항쟁을 일으킨 것은 1885년 2월 18일이었다. 이때는 고종 22년으로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청군(淸軍)의 개입으로 실패한 그 다음해였다. 외국군대의 개입은 국내정치에 외세의 영향을 크게 미치게 하였다. 서울에는 수천에 달하는 청의 군대가 주둔하게 되었고, 청의 실권자인 직예총독 이홍장의 명을 받아 서울에 온 원세개(袁世凱)는 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함을 가지고 내정과 외교를 간섭하였다. 국왕인 고종은 정변을 겪은 직후이기 때문에 국정을 장악하기 어려운 시기였고, 조정의 관료들도 정사를 펴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바로 그러한 시기에 여주민의 항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여주민들이 항쟁한 원인은 즉각 도결(都結)로 보고되었다. 또 오랫동안 조세 수취를 맡은 향리가 중간착복해온 것이 얼마나 심했는지 “한 고을 대소시민(大小民人)이 모두가 원한을 품고 있었다2)”고 표현될 정도였다. 항쟁민에게 원성이 높았던 대상은 향리 윤보길(尹甫吉) 삼형제와 김윤석(金允錫), 그리고 감역(監役) 한용덕(韓用德)3)이었다. 이 중 윤보길은 표적이 되었다. 그럴만한 원인이 있는 것이지만 여주민의 항쟁 원인은 한 개인의 문제만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사정이 있다. 수취관계를 둘러싼 오래된 문제가 그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1876년 여주 출신의 판부사 홍순목(洪淳穆)이 고종을 만나서 여주목의 전세미와 대동미를 10년 동안 상정가로 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그뿐 아니라 여주에서 재해를 입은 토지도 면세전으로 남겨주도록 청했다. 그 이유는 세종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을 관리하는 까닭에 무거운 조세를 줄여주어야 아전과 백성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고종이 허락하자 이로 인해 여주목의 전세미 900석과 대동미 1,300석은 곡식 값이 올라도 정해진 값만 바치면 되는 혜택을 입었다.4)

이 조치는 여주목의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이었다. 능침(陵寢) 관리가 쉬운 것이 아니었지만 흉년이 거듭되고 곡식값이 크게 올라서 오히려 세금이 줄어든 형상이었다. 홍순목이 고종에게 요청하기 이전에도 여주는 상정가로 세금을 낸 적이 있었다. 1870년(경오), 1871년(신미), 1872년(임신) 1873년(계유) 4년 동안 감영에 내는 영수미(營需米)를 납부할 때였다. 이때에는 매호 8전5푼씩 돈으로 납부하고, 쌀 1두1합2작씩을 결부(結賦) 중에서 줄여 주었기 때문에 농민들이 거의 4~5전씩 혜택을 입었다. 조정에서 취한 이 조치는 전국 각 군현에서 일시에 시행한 것이 아니라 경기도의 몇 고을에 한정된 부득이한 정사(政事)였다. 농민들은 이를 환영하고 다투어 영수(營需) 명목의 세금을 납부하였다.

1874년 가을에는 영수미를 상호(常戶) 30부 이상 소유자 8백호를 호당 쌀 1두5승씩 책정하고 돈으로 받아 상납하였다. 이전보다 절반 가까이 오른 셈이었다. 일정한 시기에는 현물을 기준으로 내고 다시 상정가로 내는 식의 수취 방식의 변경은 여주민에게 혜택을 준 것이었지만 이전보다 크게 오른 과중한 세금을 갑자기 더 내게 되면서 불만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1876년에 들어와서 홍순목의 노력에 의해 전세와 대동미까지 상정가로 납부하게 된 것이다.

홍순목이 특별히 여주의 조세 수취와 농민생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가 여주에서 대대로 산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판부사 홍순목이 영의정에 오른 후 1882년에 다시 고종에게 청을 해서 앞으로 10년 동안 여주의 세금 납부를 상정가로 정하도록 만들었다.

“여주는 두 분의 능을 받들어 모시는 곳으로서 楊州의 규례대로 조세 대신 돈으로 바치게 하였는데 그 법이 시행된 지 오래 되면서 간혹 본래 정한 곡물로 조세를 바치게 하였기 때문에 끝내 완전한 판국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곳은 신이 조상 때부터 살아오던 고향이므로 백성들의 폐해를 잘 알고 있습니다.…그런데 작년에 다시 곡식으로 만들어 고을에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이번에 가서 흉년든 형편을 직접 보았는데 백성들의 정상은 대단히 불쌍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다시 10년 동안 돈으로 대납하게 함으로써 조정에서 돌보아 주는 혜택을 베풀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5)

이것은 다른 군현에 비해 또다시 커다란 혜택을 준 것이었다. 두 능침을 관리하는 공력과 비용이 적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상정가 납부는 현물을 기준으로 조세를 납부하는 다른 군현에 비해 크게 유리한 제도였기 때문이다. 군현간 형평을 고려하지 않고 영의정이 자신의 출신 군현에 더 혜택을 거듭 주려고 했던 이러한 노력은 두 방면에서 문제를 야기한다.

하나는 여주목에서 조세를 수취하는 향리가 중간에서 착복하는 기회를 늘려준 것이었다. 바로 윤보길로 대표되는 간리(奸吏)가 그 틈을 타서 농간을 쉽게 부리게 되었다. 이미 1882년 봄에도 환곡을 둘러싸고 강력한 항의가 제기된 적이 있었다. “환미 600석을 윤보길이 투식(偸食)했다.”는 말이 경내 백성들에게 분분하여 끝내 민회에서 그 사실을 조사한 일이 있었는데 세력 있는 향리였던 윤보길은 이처럼 여주민에게 반감을 사고 있었다.

둘은 국가재정이 악화되어 여주에서 10년 동안 상정가로 거두는 조치를 폐지하려는 움직임이 의정부에서 나왔던 것이었다. 여주를 비롯한 몇 군현에서 상정가로 받는 세금이나마 본래 방식으로 돌려서 더 받으려고 한 것은 궁색한 것이기는 하지만 금납으로서는 재정이 터무니없이 줄어들어 약속한 10년 기한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서로 상승작용을 해서 여주민의 항쟁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여주농민항쟁의 조사과정에서 작성된 한 자료6)를 보면 조세 수취를 둘러싸고 나온 여러 문제점들이 나온다. 이 자료는 윤보길에 이어서 여주목의 조세수취를 담당한 도서원(都書員)이 상급관청에 세곡을 상납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포함하여 윤보길의 죄상을 기록한 것이다. 1885년의 항쟁이 어떤 과정을 거쳐 폭발한 것인지 그 원인을 잘 드러내고 있다.

여주에서 부과하는 조세는 전세(田稅)와 대동미가 중심이지만 이와 함께 강화병영으로 납부하는 포량미(砲粮米)와 감영에 납부하는 영수미가 있었다. 여주의 전답 결총은 논 1,000결과 밭 1,000결 합계가 2,000결7)로서 전세는 논 1결당 쌀 4두, 밭은 1결당 콩 4두씩 받아들여 경창(京倉)에 직접 납부하게 되어 있고, 대동미는 전답 2,000결에 결당 쌀 12두씩 거둬들여서 감영과 여주목 관아에서 사용할 액수를 제외하고 역시 경창에 납부하도록 되어 있었다.

결총 2,000결은 호조에서 책정해서 여주에 분담시킨 세액(稅額)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즉 실제 세금을 걷는 장부상의 단위가 아닌 것이다. 윤보길은 정확하게 조사한 토지면적과 소유자를 기재한 장부를 가지고 따로 세금을 걷었을 것이지만 그것을 후임자에게 전해주지 않은 것 같다.8) 따라서 전세와 대동미 명목으로 거둔 실제 총액이 얼마였고, 그 가운데 여러 해에 걸쳐 중간에 사라진 세곡이 얼마였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9)

더군다나 결당 일정 액수를 더 걷어서 수천 석의 세곡을 경창으로 납부하는 과정에 들어가는 운반비 등 잡비로 쓰도록 했던 것이 관행이었다. 하지만 경강(京江)에 가서 하선하는 비용과 경창으로 운반하는 마태가(馬駄價)가 얼마나 나오는지 미리 알 수 없었고, 서울에 머물 동안에 사용할 식비의 규모 등도 예상할 수 없었다. 1884년 3월에는 의정부에서 이 잡비의 액수를 규정해서 전세 상납시에는 131석, 대동미 상납시에는 150석을 쓰도록 했으나 사실상 일을 맡은 향리가 마음대로 올려 사용해도 제어할 길이 없었다. 강화병영으로 들어가는 포량미도 운반 과정에 들어가는 허다한 잡비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하였다.

또한 당시에는 정비(情費)라고 해서 뇌물이 공공연하게 통용되었다. 농민들은 세금을 걷는 향리들에게 대두(大豆)로 뇌물을 바치는 것이 보통이었고, 경창에 세곡 운반을 맡은 향리들은 서울에 가서 미곡으로 뇌물을 주고 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10)

여주민들이 큰 부담을 졌던 것이 영수미였다. 경기 감영으로 봄가을에 미곡 40석을 납부하는 것이었는데 원액보다 여기에 첨가하는 부비(浮費)가 더 많았을 만큼 운영에 많은 문제가 드러나고 있었다. 영수미를 걷는 방식은 대동미를 거둘 때 곡(斛)당 화인(火印) 1두, 관두(官斗) 3두를 가첨(加添)하는 것이었다. 그 위에 영내 용정비(用情費)와 일꾼들의 점심을 비롯한 경비와 수고비를 합해서 쌀 30여 석을 더 거두었다.

본래 이렇게 거둔 영수미를 석당 8량씩으로 정해서 합계 320량과 잡비 88량을 마련하는 것이 ‘기백년 항정(幾百年 恒定)’이라는 향리의 표현처럼 관행이었다. 그런데 몇 십 년 동안 초실(稍實)한 결민(結民)들에게 직접 돈을 징수해오고 있었는데 이것은 과거의 관행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읍례(邑例)였다. 즉 이때는 30부 이상 토지를 소유한 농민 700호를 뽑아서 호당 8전5푼씩 거둬들였던 것이다. 이를 합하면 595량으로서 항정(恒定)한 것보다 187량이나 더 많은 액수였다.

1884년 8월 1일 여주목에서 영수미를 매호 8전 5푼씩 걷는다고 영을 내렸다. 그것은 전례에 따라서 시행하는 것으로 여주민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8월 24일 관아에서 갑자기 이를 번복하는 영을 다시 내렸다. 상정가로 받았던 대동미를 본래대로 현물을 기준으로 납세하라는 것이었고, 영수미도 역시 대동미와 함께 본래의 제도대로 납부하라는 지시였다. 갑신년 가을 수취를 앞두고 전례대로 시행령을 내린 지 불과 며칠 후에 과거처럼 도결(都結)로 돌아가려는 방책에 대하여 농민들은 분노하게 되었다.11) 즉시 민회를 소집하여 여주목사에게 등소(等訴)하며 반대하였으나 이것은 여주목의 향리나 목사가 바꿀 수 있는 조치가 아니었다.

이해 8월 21일 의정부에서 윤정구가 국왕 고종에게 여주, 풍덕, 죽산, 포천 등지에서 전세와 대동미를 결전으로 받았던 것을 현물세로 돌리자는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린다.

“호조와 선혜청 아문의 쌀 변리가 원래 넉넉하지 않은데 근래에는 한 해의 수입이 더욱 줄어든 관계로 각 항목에 지급할 것이 적체되어서 마침내 수습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에 대해 말로만 근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기전(畿甸) 몇 고을에 기한을 한정하여 돈으로 대봉(代捧)하게 한 것은 비록 부득이한 정사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정식 규정에 의한 부세법(賦稅法)의 뜻은 본래 엄중한 것입니다. 현재 경비가 이와 같이 궁색하다면 어찌 변통할 도리가 없겠습니까? 여주, 풍덕, 죽산, 포천, 삭녕, 양지 등 고을에서 바치는 조세 곡식에 대하여 기한을 한정하지 말고 모두 갑신년부터 전례와 같이 본색으로 수납하여 조금이나마 보충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12)

국가 재정이 어렵기 때문에 경기도의 6개 군현에서 세곡 대신 액수를 줄여서 금납화하도록 한 것을 현물세로 다시 돌려 조금이나마 재정을 더 확보하자는 궁색한 정책이었다. 전에 영의정이었던 홍순목이 줄여놓은 조세 액수를 다른 군현과 마찬가지로 올리겠다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군현의 관아에서 조세 수취가 진행되는 시점에 뒤늦게 결정한 것은 농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구나 대동미를 현물로 내야 한다면 대동미를 거둘 때 첨가해서 받았던 영수미도 현물로 납부할 수밖에 없었다.13)

여주 관아에서는 경기 감영의 공문서가 오기를 기다려서 처리하기로 하였다. 11월에 “현물세 상납은 조정에서 국왕에게 보고를 하고 시행하는 일이라”는 공문서가 내려왔다. 그리고 12월 1일에 처음 “각 호의 전납(錢納)은 8전5푼으로 해당 호가 읍에 내는 방역결전(防役結錢)14)을 제외하고, 다시 전례에 따라 쌀 1두5승씩 납부하라.”고 경내에 영을 내렸다.

여주민들은 엄동설한이 닥쳐왔으니 해빙을 기다려서 영수미와 대동미를 합해서 상납할 뜻을 감영에 올렸다. 그러자 감영에서 여주민들의 감정을 더 크게 거슬리는 공문을 보냈다. “시가에 따라서 대납할 것”이라는 제목이었다. 1883년과 1884년은 연이어 극심한 흉년이 계속된 해였다. 곡식값도 폭등하였다. 수확기인 가을엔 그래도 값이 헐하지만 세금을 납부해야 했던 겨울에는 크게 올랐다. 그래도 1884년 말인 세전(歲前)에는 매결(每結) 대전(代錢)이 55량이었는데 세후(歲後), 즉 1885년 정월부터는 매결 70여 량이라고 했다.

여주민들은 해를 넘겨 1885년에 들어와서도 세금내기를 거부하였다. 정월달에 세금을 낸 것이 불과 700여 호뿐이었다. 抗租(항조) 거납(拒納)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2월에 다시 창고를 열어 세미(稅米)를 받았는데 나흘 동안에 걷힌 것도 100여 석뿐이었다. 시가에 따라서 영수미를 낸다면 그 액수는 급등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는 미곡의 시가가 70량이라고 하였다. 종래의 항정가(恒定價)가 8량인 것과 비교하면 거의 9배가 되는 액수였다.

여주민들이 조정을 대상으로 불만을 터뜨릴 수는 없었다. 따라서 조세수취를 말단에서 담당했던 향리들이 당면 표적이 되었다. 이미 “1884년 10월 이후 도결을 폐지하고 예전 제도를 복원해서 내게 될 현물세는 윤보길, 김윤석, 한감역댁 3인이 돈 3만 냥을 맡긴 것으로 해결되었다더라.” 하는 말15)이 민간에 퍼졌다. 이것은 이들이 여주민들에게 얼마나 인심을 잃었는지 보여준다.

실제로 1884년 겨울 여주 농상계(農桑契)에서 이민상(李敏庠), 조병선(曺秉善), 곽승현(郭承鉉)이 앞장서서 농민들의 봉기를 선동하는 통문이 준비되고 있었다. 여주목 아전 윤보길이 공전(公錢)과 군포(軍布)를 축내고 그것을 메우기 위해 오랫동안 정액 이상으로 결가를 수취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남징(濫徵)에 대한 불만은 토지를 소유한 양반들도 상민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양반들도 같이 참여하였다.

농상계를 이끄는 사람들은 전 현감 조병직(曺秉直)의 집을 찾아가서 모임을 갖고 그를 우두머리로 추대하였다. 조관(朝官)을 지낸 조병직은 농민들에게 신뢰를 받는 인사였다. 또 감역(監役)을 지낸 박규호(朴圭浩)도 이들과 뜻을 같이하였다. 이들은 농민들을 격동시키는 통문을 작성하고 주도자들을 밝혔다. 통문에는 이민상, 박규호, 조병선(曺秉善), 이병두(李秉斗), 곽승현, 신필근(辛弼根), 경희(慶熙) 등이 서명했는데 통수(通首)는 조병직이었다.16)

여주목사 김영덕(金永悳)은 농민들이 봉기하는 데 이르기까지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농민들의 원성은 현물세를 기준으로 세금을 상납하라는 조정의 조치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오래 계속되어온 여주목의 수취 구조를 문제시한 것이라서 당장 그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포흠(逋欠)의 당사자는 여주의 세력 있는 아전 윤보길이었기 때문에 목사가 쉽게 다룰 상대가 아니었다.17) 윤보길은 이미 1879년(기묘)에 향리직을 퇴임하고 서관(西關)에서 해를 보내거나 영남을 돌아다니며 모친상에도 관문(官門)에 오지 않고 있었다.

1885년 2월 18일 마침내 여주의 농민들은 무리를 지어 몽둥이를 들고 관정(官庭)에 돌입하였다.18) 목사에게 호소하는 방식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읍내에 들이닥친 농민들은 퇴리(退吏) 윤보길은 찾지 못하고 그의 두 동생을 붙잡아 태워죽이기에 이른다. 또한 읍내의 집 14채를 헐어서 파괴했는데 그 중에는 읍리 김윤석과 전 감역 한용덕의 집도 포함되었다. 파괴된 집들은 읍내의 부호와 향리들의 집이었는데 여기서 농민들이 재화와 전곡을 빼앗아간 것이 얼마인지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관아의 옥으로 가서 옥문을 부수고 억울하게 갇힌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한바탕 읍내에서 분풀이를 한 다음에 항쟁민들은 해산하였다. 통문을 돌릴 것을 주장한 주모자들인 이민상, 조병선, 곽승현은 도피해서 몸을 감추었다. 관헌의 추적에 대비한 것이었다. 통수였던 조병직은 집에 머물러 있었고, 다른 양반 신분들은 일이 전개되는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사건은 즉시 감영에 보고되었다. 경기감사 심상훈(沈相薰)은 여주 민요(民擾)의 책임을 물어 목사 김영덕을 파출(罷黜)시키자는 장계를 올렸다. 2월 27일자 『일성록』에 전재된 장계를 보면 목사가 의외의 변란에 대한 책임을 오로지 질 수 없으나 용서할 수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농민항쟁의 그 와중에 능향(陵享)에 참석하지 못한 일을 들어 파출해서 죄를 묻자고 하였다. 경기감사의 요청에 의해 국왕은 28일부로 여주민의 항쟁을 조사하는 안핵사에 양주목사 윤성진(尹成鎭)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여주목사 김영덕을 파출해서 정배하도록 하고 안핵사를 임명하는 같은 날에 이태진(李泰鎭)을 후임목사로 선임하였다.

안핵사 윤성진은 즉각 여주사태의 조사에 나섰다. 조사는 두 방면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항쟁의 원인을 조사하는 일이었다. 통문의 내용을 확인하는 것은 물론 항쟁에 나선 백성들을 붙잡아 조세수취를 둘러싼 문제에 관하여 공초를 받았다. 둘은 불법 항쟁을 벌인 주모자들을 파악해서 체포하는 일이었다. 통문에 나열된 서명자를 조사하는 것과 함께 옥문을 깨고 죄수를 탈옥시킨 범법자를 추적하였다.

안핵사의 원인 규명은 비교적 정확하였다. 먼저 당시 여주의 세금 수취를 책임진 도서원에게 조세와 관련해서 항쟁민들이 가진 불만을 밝혀내도록 했다. 도서원은 전세(田稅), 대동세, 포량미, 영수미 등으로 구분해서 결총과 납세액을 들고, 수취과정에서 나타나는 각종 폐단을 제시하였다. 영수미의 금납에 따른 백성들의 혜택과 현물세로 환원하면서 그 액수를 다시 금납화를 하는 것에 따른 부담의 가중을 낱낱이 예로 들었다. 여주민들이 1884년 말에 통문을 돌릴 만큼 불만이 커졌던 과정도 이에 따라 확인되었다.

도서원이 지적한 불만의 원인 제공자는 역시 윤보길 삼형제였다. 입역(入役) 이후 삼형제 향리는 환곡·결세·군역 삼정과 관련된 문제는 물론 허다한 관아의 일에 간섭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온갖 방식으로 백성들에게 해를 끼친 장본인이었다. 윤보길은 이미 1879년에 향리직에서 영구히 퇴직하였으나 그 이후에도 용렬한 두 동생은 관아의 일을 알지 못하면서 읍사(邑事)에 사사건건 간섭해왔다. 도서원 역시 윤보길이 국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결론을 맺었다.

안핵사 윤성진은 윤보길을 체포하여 양주 감옥에 수감해서 심문하는 동시에 항쟁에 참여했던 여주민들에게 소란을 일으키게 된 원인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윤보길의 죄상은 15가지나 거론되었다. 그 죄상들을 한마디로 집약하면 여주목에 세력을 가진 한 향리가 7년에 걸쳐 법조문을 가지고 오랫동안 마음대로 농간을 부린 것이었다.

폭력 항쟁을 벌인 주모자에 대한 조사는 관아에 난입하거나 통문에 이름이 오른 인물들을 조사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관아에 난입해서 옥을 부수고 죄수를 풀어준 이병두와 신필근은 체포하여 수감하였다. 경희(慶熙)는 과거를 보러간 것이라고 하였으나 옥에 함께 간 것을 감추지 못하여 그 종적이 드러났다. 그렇지만 전 현감 조병직을 비롯한 다른 서명자들의 죄는 덮어둔 채 따지지 않았다.

안핵사 윤성진의 조사는 매우 소홀하였다. 양반 가담자에게만 조사를 소홀히 한 것이 아니었다. 양주 감옥에 갇혀있는 윤보길조차 철저하게 문초하지 않았다. 조사 보고와 함께 범법자 처리를 알리는 보고를 올리자 곧 조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3월 29일 의정부에서는 고종에게 여주목 안핵사 윤성진을 파면시키고 다른 안핵사를 차출해서 급히 파견하자는 건의를 하였다.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오로지 법과 기강일 뿐”인데 안핵사가 경중을 구분해서 조처하지 않고 “엉성하고 소홀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안핵사가 변명한 이유를 의정부의 관료들이 납득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통문에 이름이 오른 인물들조차 덮어두려고 하였다. “서로 혹 아는 사이 같기도 하다”라고 하거나 “어찌 소란을 피울 줄 알았겠는가?” 라고 말하며 의심할 것이 없다고 하였고, 조관(朝官)은 공초를 받으려고 붙잡아들이기를 청하지 않았으며, “더러는 소란이 일어나기 쉽다고 하여 한번 묻고는 돌려보내”는 정도였다.19) 전 현감 조병직과 전 감역 박규호은 물론 윤보길과 함께 조세 남징에 책임이 있는 전 감역 한용덕도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았다.

경기감영에서도 이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했다. 3월 4일자로 감사가 교체되었는데, 경기감사 심상훈과 충청감사 박제관(朴齊寬)이 서로 부임지를 바꾸는 인사이동이 있었던 것이다.20) 감사의 상환(相換)은 인수인계가 늦어지는 관계로 서로 부임지로 떠나지 못하여 사실상 한동안 여주 안핵사의 업무는 감사의 관심 밖에 있었다. 의정부에서 상세히 챙긴 것도 그 때문으로 보인다.

사실상 이때 안핵사 윤성진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민심을 생각하면 윤보길을 처형해야 되겠지만 여주의 강력한 향리 집안의 저항을 고려하면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항쟁의 책임자들인 통문 서명자를 체포하여 처벌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여주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인물들이라서 이들을 처벌했다가는 또다시 여주민들의 항쟁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었다.

윤보길은 형조(刑曹)를 움직일 만한 힘이 있었다.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윤보길의 아들 윤칠룡(尹七龍)은 “양주감옥에 갇혀있는 아비를 감영으로 이감시켜서 공정하게 조사를 받도록 해달라”고 형조에 탄원하였다. 형조에서는 이 탄원을 받아들여서 고종에게 윤보길의 구명을 청원하였다. 여주의 한 향리 집안이 형조와 국왕에게 직접 연줄을 넣어서 죄인을 구명하는 저력을 보인 것이었다.

역설이긴 하지만 여주 출신 영의정 홍순목이 고종을 차대(次對)하는 자리에서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이 연줄을 놓아가지고 마음대로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있다고 말한 바가 있다.21) 어떤 연줄을 가지고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윤보길의 집안은 형조를 통해 고종을 움직이는 데 성공하였다. 고종이 6월 25일 “윤보길이 범한 죄의 경중은 상세하게 조사하지 않으면 안 되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고 신문하되 만일 잡혀온 범인이 있으면 모두 다시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분부하라”22)고 한 것이다.

신임 경기감사 박제관이 부임하고 나서 6월에 들어와 여주민의 항쟁을 수습하는 일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박제관의 장계에 따른 의정부의 보고를 보면 윤보길은 사형이 구형되었다.

“윤보길 자신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변란이 생겼겠습니까? 첫째도 윤보길 때문이고, 둘째도 윤보길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를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이미 도신(道臣)의 장계에 올라 있고, 법이 더없이 엄하다는 것을 그 자신도 알고 있는 이상 갇혀있는 윤보길을 도신으로 하여금 백성들을 많이 모아놓고 효수(梟首)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키도록 해야 합니다.”23)
그러나 고종은 윤보길을 감형해 주도록 지시를 내렸다. 구명운동이 성공한 것이었다.
“윤보길의 죄는 참으로 용서하기 어려우니 어찌 가볍게 처리하겠는가. 비록 두 아우가 일시에 죽은 것으로 죄를 덮을 수 없지만 그 정상은 참담하다 할 것이다. 특별히 한가닥 목숨만 살려주어 엄형을 1차 가한 뒤에 사형을 감면하여 원악지로 정배하라.”24)

여주 감옥을 부순 이병두와 신필근은 엄형을 3차례 가한 다음 섬으로 유배시키기로 했고, 경희는 2차례 엄형을 가한 뒤에 먼 지방으로 정배하도록 했다. 통문을 주도하고 도피한 이민상, 조병선, 곽승현은 체포한 뒤에 철저히 조사하고 법에 따라 처벌하도록 했다. 그리고 관직을 역임한 조병직과 박규호, 그리고 한용덕은 의금부에서 처벌을 거행하도록 했다.

경기감사 박제관은 안핵사 윤성진25)을 파면시키자고 하면서 새 안핵사를 파견해서 여주의 일을 재조사시키는 조치는 철회하도록 하였다. 일찍이 영해병란을 조사하는 안핵사로서 경험이 있던 박제관은 과단성 있는 조처로 여주민의 항쟁사건을 결말지었다.

1885년에 벌어진 여주민의 항쟁은 봉기의 주도자들과 원인 제공자인 윤보길을 처벌하는 것으로 수습되었다. 한 고을 대소민인(大小民人)이 모두 원한을 쌓았던 부정 원인 제공자와 인명이 손상된 폭력 항쟁의 주도자들에 대한 처벌도 귀양을 보내는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조정의 일관성 없는 조세 정책과 과다한 결가 책정을 비롯한 수취제도의 운영상 문란이 중첩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단순히 윤보길 개인의 문제와 폭력행위 문제로 몰고 간 것이었다.

파출당한 전 여주목사 김영덕은 정배를 보냈으나 역시 고종이 “고려해야 할 점이 없지 않으니 풀어주라.”고 명하여 4월 4일 이미 해배(解配)되었다. ‘고려해야 할 점’이라고 표현한 것은 자신이 승인한 상정가 수취의 본색 환원이 항쟁을 야기한 원인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 조치에 의해 여주민의 항쟁으로 인해 관료로서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된 사람은 없었다.

또한 이때는 갑신정변 이후 청군 대부대가 서울에 주둔하여 경기감사 박제관이 청군의 뒷바라지에 고심하고 있던 시기였고, 강원도 원주에서도 항쟁이 일어나 그 수습에 나서고 있었다. 또한 6월 장마철에 이르기까지 여러 날 동안 비가 오지 않는 가뭄 때문에 조정에서 기우제를 올리고 있던 때였다. 국정의 책임자인 고종은 기강을 잡기 위한 옥사(獄事)를 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주민의 단호한 조세 저항에 놀란 조정은 상정가로 납부하는 것을 연장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26) 1890년에 다시 의정부에서 논란이 있었으나 역시 3년을 더 연장시켰다.

“경기감사 이헌직(李憲稙)의 보고를 보니 여주목사 김가진(金嘉鎭)이 보낸 공문을 일일이 들어 말하기를 본주(本州)에는 여러 일과 공사가 다른 고을에 비하여 많기 때문에 대동법에 의한 조세를 이미 상정가로 쳐서 돈으로 바치게 하였는데 이제 기한이 차게 되니 백성들이 어쩔 줄 몰라 하므로 3년을 기한하고 다시 상정가로 쳐서 돈으로 바치게 하여 달라고 했습니다. 정공(正供)을 요청대로 승인하는 것은 원칙으로 보아 매우 신중해야 할 일이지만 본주는 다른 곳에 비해 유별하고 백성들의 힘이 아직도 많이 펴지 못했으니 다시 3년을 기한하고 상정가(詳定價)로 바치게 하여 극진히 염려하는 조정의 혜택을 보여주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하니 승인하였다.

민력이 약한 고을은 많이 있지만 그런 군현들도 대동법에 정한 대로 현물세를 기준하여 세금을 받을 수밖에 없으나 여주는 유별나기 때문에 상정가로 바치는 것을 연장하자는 것이었다. 여주민의 항쟁은 이처럼 조정의 관료들에게 여주목을 만만히 다룰 수 없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여주는 갑오개혁으로 조세제도가 바뀔 때까지 다른 군현에 비해 적게 부담하게 되었다.

1880년대에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항쟁과 여주민의 항쟁은 이와 같이 성격이 달랐다. 이를 요약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여주는 영릉(英陵)과 녕릉(寧陵) 두 능침을 관리하는 부담으로 조세를 상정가로 납부하는 혜택을 받았다. 물가가 크게 오르던 1880년대에 상정가 납부는 매우 큰 혜택이었다.

둘째, 조세 수취를 맡은 향리가 오랫동안 여러 방법으로 남징의 폐단을 키워 왔으나 지방관이 제어하지 못하였다. 세력이 강한 향리 집안이 지방관과 연계하고 중앙관료까지 긴밀한 연줄을 가진 때문이었다.

셋째, 조정에서 재정 부족으로 인해 여주의 상정가 납세를 중단하고 예전과 같이 현물세를 기준으로 받는 조치를 내리자 이에 반발한 농상계(農桑契)에서 통문을 작성해서 농민들을 봉기시키기에 이른다. 항쟁민들의 공격 대상은 퇴임 향리 윤보길이었다.

넷째, 여주민 항쟁의 대표에는 관직을 역임한 양반이 추대되고, 이 지역의 양반신분들도 앞장을 서게 된다.

다섯째, 양주목사가 안핵사로 조사하지만 민심의 지지를 받는 양반 참여자와 세력 있는 향리 양쪽에 대한 조사를 소홀히 한다.

여섯째, 조정은 항쟁을 수습하면서 원인 제공자로 몰린 윤보길과 항쟁 주도자를 가볍게 처벌하는 온건책을 채택하였다. 조정의 일관성 없는 조세제도 운영은 항쟁의 원인으로 거론되지 않았다.

일곱째, 여주는 ‘유별한’ 지역으로 간주되어 갑오개혁으로 조세제도가 바뀔 때까지 상정가로 납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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