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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 민씨 세력의 등장과 민씨 척족세력의 형성

대원군의 정치적 등장은 1864년 그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이 고종으로 즉위하면서 가능하였다. 고종이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대비(趙大妃)에 의해 수렴청정이 단행되었지만 곧이어 대원군의 섭정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조대비가 고종을 신왕(新王)으로 결정한 이유는 신왕을 철종의 후사가 아니라 자신의 지아비인 익종(翼宗)의 후사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헌종 말기 이래로 정권에서 소외된 풍양조씨를 대표하는 조대비가 새로이 권력을 회복하고자 함이었다. 안동 김씨를 겨냥한 대결양상으로, 의도한 대로 조대비 수렴청정기에는 안동 김씨 세력이 제거되고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바로 대원군 섭정이 시작되면서 대원군이 자신의 권력강화를 위해 관직을 분산 배분하였다. 안동 김씨 세력을 재기용하여 타협책을 시도하는가 하면, 전주 이씨의 종친세력, 남인계, 북인계 인사, 사돈관계인 여흥 민씨들을 점차 기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대원군 부인의 일족이 되는 여흥 민씨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고종의 비로 맞이하였다.

대원군이 여흥 민씨 가문에서 왕비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노론의 전통을 갖고 있는 여흥 민씨 가문을 왕비족으로 택함으로써 어느 정도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하고 정파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여긴 점, 둘째, 여흥 민씨는 대원군의 어머니와 부인이 모두 그 가문 출신으로 자기의 지지기반을 확대시키려는 의도였으며, 셋째, 친정세력이 가장 미약한 가문에서 고아나 다름없는 명성황후를 선택한 것은 외척으로서의 독자노선을 형성할 수 없게 하기 위한 방어책이었다.1) 어쨌든 이러한 대원군의 정치적 목적으로 입궁한 명성황후는 입궁한 지 7, 8년 만에 대원군을 밀어내고 권력을 잡게 된다.

어떻게 명성황후가 대원군을 밀어내게 되었을까?

명성황후가 입궁했을 때 나이는 16세로 궁녀를 사랑하고 독서를 좋아하며 행동이 총명하여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궁녀 이씨가 왕자를 낳아 완화군(完和君)이라 하였는데 대원군이 완화군을 사랑하여 세자로 봉할 뜻이 있었다. 이에 명성황후가 크게 변심하여 대원군과 알력이 생겼다. 또한 조성하는 조대비의 조카요, 고종 즉위시에 공이 있으며, 김병국은 철종의 외척이다. 대원군이 자기 권세 확장에 급급하여 두 사람을 망각하였는데 명성황후가 이들을 후히 대우하였다. 조두순은 원로였으나 대원군은 그를 냉대하였고, 명성황후는 그를 원훈(元勳)으로 대하며 대원군의 무식을 탓하였다. 또 대원군의 둘째 형 이최응(李最應)을 대원군은 홀대하였으나 명성황후가 후대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이재면은 동생 민승호로 하여금 내응하도록 만드니 이에 대원군은 앞뒤로 적이 생겨 그들을 저지하지 못하였다.2) 이러던 중 최익현의 상소로 대원군은 실각하게 되었다.

1873년(고종 10) 국왕 친정의 이름 아래 단행된 정권교체로 대원군 정권이 물러나고 명성황후 정권이 등장하였다.

민씨 척족세력이라 함은 명성황후가 고종의 비(妃)가 됨으로써 권력의 핵심부를 장악할 수 있었던 정치세력으로, 이들이 정부의 주요관직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된 1866년을 전후하여서인데, 이는 대원군의 안동 김씨 세력 견제책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대원군 섭정기에 정부의 요직에 임용된 인물들을 보면, 명성황후의 양오라비인 민승호를 병조판서에 앉히고, 민겸호(閔謙鎬)는 예조참판에, 민규호(閔奎鎬)는 승정원 도승지, 민태호(閔台鎬)는 황해도 관찰사 등 중앙과 지방의 주요관직, 주로 인사담당과 왕의 근시기구(近侍機構)에 참여하면서 대원군 세력형성을 위한 전략으로 정계에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민씨 척족세력 형성의 기초가 된다. 여기에 종친인 이최응과 풍양 조씨 조영하 등을 규합해 이미 1870년대 초두에 확고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초기 민씨 척족세력의 형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민승호, 민겸호 형제와 민규호, 민태호 형제이다. 이들은 대원군 집정기에 등장하여 고종 친정 후에는 본격적으로 정부 요직을 차지하면서 민씨 척족세력의 발판을 확고히 다져나갔다. 그러나 이들이 순조롭게 정권을 계승한 것은 아니었다. 고종 친정 다음해인 1874년(고종 11) 당시 민씨 척족세력의 영수격인 민승호가 폭사(暴死)한 사건이 일어나 이 사건으로 민씨 척족세력은 한때 결집력을 잃어버렸으나 그 후 같은 항렬의 비슷한 연배인 민규호, 민겸호, 민태호가 그 뒤를 이어 민씨 척족세력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민규호마저 1878년(고종 15) 죽게 되자 민겸호가 세력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는 병조, 이조, 예조판서를 거쳐 별기군이라는 신식군대를 창설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민겸호도 임오군란 때 탄압책을 써서 이를 진압하려다가 살해당하였다.3)

민겸호의 뒤를 이어 민씨 척족세력의 지도자로 부상한 사람은 민태호였다.

그는 1880년(고종 17) 전후 자기의 외아들을 명성황후 친정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왕세자빈(嬪)의 생부가 되면서 더욱 정치적 중심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형조판서, 병조판서, 통리기무아문 등의 개화기구 관직에 임명되어 개화정책을 담당하였으나,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때 민씨 척족세력의 거두로 지목되어 피살되었다. 민태호 역시 군사관련 요직과 재정부문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였다.4)

이상 민씨 척족세력의 확대에 기여했던 민승호, 민규호, 민겸호, 민태호 등은 40~50대의 중견 정치인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연륜을 배경으로 그들의 세력기반을 확보했고, 고종 친정 후에는 반대원군 세력을 흡수하여 자기들의 세력을 확대하여 개화정책 추진의 기반을 구축하였으나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의 갈등 대립을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표적이 되어 정치적인 희생물이 되었다. 이들의 희생은 이후 민씨 척족세력들의 보수반동적 세력으로의 회귀를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갑신정변 이후 민씨 척족세력의 중심인물로 대두된 민영익(閔泳翊)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친정조카로 어려서부터 명성황후의 총애를 한몸에 받아 21세의 어린 나이에 통리기무아문 당상(堂上)에, 1881년에는 협판통리아문 사무(事務)가 되었다. 1883년에는 보빙사(報聘使)의 명목으로 전권대신에 임명되어 미국에 건너가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문물을 시찰하였다. 그러나 귀국 후에는 급진개화파 세력과 반목하여 갑신정변 때 표적이 되었으나 요행히 중상을 입었을 뿐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후 한성부 판윤,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니 그 역시 개화정책 중에서도 군사관련, 재정관련 부서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5)

이와 같이 민영익은 개화세력과도 어울렸던 어느 정도 진보적 성향의 인물이었으나 임오군란, 갑신정변의 정치파동을 거치면서 점차 보수적 성향으로 변화되었고 민씨 척족세력 중심으로 추진되던 개화정책도 점차 주춤해졌다.

이후에는 민씨 척족세력의 중심인물로 임오군란 때 충주의 자택을 명성황후의 은신처로 제공하여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게 된 민응식(閔應植)을 비롯하여 민영환(閔泳煥), 민영위(閔泳緯), 민치상(閔致庠), 민영준(閔泳駿), 민영원(閔泳遠) 등이 주요 요직을 담당하면서 정권을 이끌어 갔다.6)

1880년대 민씨 척족세력들로서 중앙과 지방의 관직에 진출한 인물은 약 260명 가량으로 파악되고 있다.7) 그 중 민겸호, 민규호, 민태호, 민영익, 민영위, 민응식, 민영목, 민병석, 민영상, 민영준, 민영우, 민영소, 민종묵, 민영달, 민치서 등 20여 명의 인물이 정권의 핵심적 요직을 장악하여 실권을 행사하면서 민씨 척족정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의정부와 6조에서 인사, 재정, 군사관련 분야를 독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권력집중은 고종, 명성황후, 민씨 척족의 연대 속에서 순조, 헌종, 철종대 세도정치기보다도 더욱더 노론우위체제의 극대화를 추구할 수 있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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