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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김씨 세력의 세도정치와 현암서원

1800년 정조가 급서(急逝)하고 어린 임금 순조(純祖)가 불과 12세로 즉위하게 되자 영조의 계비(季妃)였던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개시하면서 일시에 권력은 노론 벽파의 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한 노론 벽파세력은 우선 정조의 신임으로 중앙정계에 등장할 수 있었던 남인세력을 천주교도라는 혐의를 씌워 전부 제거하였다. 그러나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순조비로 책봉하는 데 노론 시파(時派)세력이 성공하자 권력은 자연히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시파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순조 초년 벽파세력을 이겨낸 김조순은 비변사와 훈련도감을 장악하고,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이후 안동 김씨 일문은 국구(國舅)의 위세를 떨치면서 확고부동한 세도정치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들은 순조 재위 34년간을 통하여 세도를 부리며 영달하였다. 외척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하나의 대표인물을 내세우고 그들의 큰 족속이 항렬과 촌수의 가깝고 먼 것과 그 재능여하에 따라 정권과 이권을 적당하게 분배하면서 속칭 사돈의 팔촌까지도 그 권세의 그늘 밑에서 온갖 혜택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순조가 승하하고 후사로 세손 헌종(憲宗)이 즉위하니 국왕의 나이 불과 8세였다. 그의 조모되는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가 수렴청정의 형식을 취하였던바, 사실상의 정권은 안동 김씨의 수중에 있었다. 즉 안동 김씨 일문을 대표하는 김조순의 아들 유근(逌根)을 비롯해서 그의 동생 좌근(左根)과 사촌동생 홍근(弘根) 등이 뒷받침을 하게 되므로 좀처럼 타성(他姓)의 침투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때마침 어린 헌종의 외조부인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동생 조인영(趙寅永)이 순원왕후의 호의로 안동 김씨 일문의 지나친 발호를 견제하기 위하여 1835년(헌종 원년)에 이조판서가 되고 보니 그 뒤를 이어 풍양 조씨의 문중에서도 병구(秉龜), 병현(炳鉉) 등이 판서급으로 등장하게 됨으로써 안동 김씨 세도의 독무대에도 변동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되자 김조근(金祖根)은 1837년(헌종 3) 그의 딸을 왕비로 책봉하고 아우 되는 홍근을 내세워 풍양 조씨 세력에 대항하게 하였다. 그러나 우연히 조씨문중에서 내분이 생기고, 1847년(헌종 13)에는 조병현과 그의 아들 구하(龜夏)까지 탄핵당하여 유배됨으로써 조씨 일문은 차례로 몰락하고 외척세도는 다시 김씨 일문 독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판국에 유약했던 헌종마저 즉위한 지 15년 만에 후사도 없이 승하하니, 안동 김씨 일문은 왕족 중에서도 몰락하여 강화도까지 가서 살던, 존재조차 알 수 없던 덕완군(德完君)을 찾아내어 왕으로 떠받드니 이가 곧 철종(哲宗)이었다.

김씨 일문은 세도정치를 견지하고자 강화도에까지 찾아가 철종을 모셔다가 즉위케 하였으니, 당시 나이 19세로서 지금까지의 생애가 정치와는 격리된 빈궁 속에서 살아온 터에 김씨 일문의 덕으로 임금이 되었고, 다음해에는 안동 김씨의 거물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삼게 되니 또다시 모든 정권은 안동 김씨 세력에게로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철종의 재위 기간이 14년이었으나 국왕의 존재는 명목뿐이었고, 모든 권세와 관직은 김씨일문의 독차지가 되고 말았다. 그들 중의 김흥근(金興根)은 이조판서에서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는가 하면, 김좌근(金左根)은 총윤사에서 예조, 호조, 형조판서를 골고루 지내고, 1853년(철종 4)부터는 영의정이 되어 국정을 좌지우지하였다.

이 동안 김수근(金洙根), 김보근(金輔根), 김영근(金泳根) 등은 판서직을 돌려가면서 해보는가 하면, 영근의 아들 병기(炳冀)는 좌근의 양자로 들어가 훈련대장에서 이조, 예조, 공조판서 등을 불과 1년 동안에 모조리 해보기도 하고 문근(汶根)의 조카 병학(炳學), 병국(炳國)은 물론이요, 유근의 아들 병주(炳嵀), 흥근의 아들 병덕(炳德)까지 판서를 지내는 등 안 해본 것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종로 북촌의 고루거각(高樓巨閣)을 제각기 차지하여 온갖 위세와 권력을 마음대로 떨쳤으니, 그들의 안중에는 왕실도 종친도 없었으며, 일반 백성들은 그들의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세도정치하에서는 봉건적인 왕조 그 자체가 쇠미하게 됨은 물론이요,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것이 민심의 불안과 동요이고, 나아가 반란과 폭동까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철종 말엽인 1862년(철종 13), 진주에서부터 시작된 농민봉기와 동학교도와 농민이 함께 외친 후천개벽(後天開闢)의 혁명사상도 실은 세도정치의 타락과 그 폐단에서 초래된 것이니 조선왕조가 붕괴하게 된 중요 원인도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세도정치기에는 중앙과 지방 사이의 정치적 단절이 심화되었고, 순조 이후 왕권이 무력화되었을 때 중앙의 일부 외척문벌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앙과 지방 그리고 산림으로 대표되는 재야산림과 중앙관료의 유기적 연결에 기초한 사림정치의 주자학적 정치이념은 파탄되고, 지방사회의 여론과 움직임이 중앙정계에 반영될 수 있는 통로가 차단된 채 국왕과 척족관계에 따라 몇몇 문벌이 세도를 찬탈하게 되었다.1)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정조 때에 규장각을 중심으로 성장한 김조순, 남공철 등이 중앙의 사상계와 정계를 주도해나갔다. 순조 때 세도정권의 핵심인물인 김조순 등 안동 김씨 가문의 주요인물 외에 조인영, 김정희 등 풍양 조씨 가문이나 그와 연결되는 소장학자들이 북학사상의 영향 속에 하나의 사상경향을 이루었다. 세도정권기의 사상계는 사회모순을 해결하려 들지 않고 기존 지배체제를 유지하거나 자기 만족에 그치는 지식 쌓기에 머물고 있었다. 조금이나마 현실을 개선하려는 사상을 가졌던 사람들은 쫓겨났고, 사회모순을 해결할 사상을 지니지 못한 자들이 정권의 핵심에 남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사상을 탄압하거나 체제유지에 장애가 되지 않을 정도로 통제하고 있었다.2)

이러한 안동 김씨 세력의 세도는 이후 등장하는 고종대에 대원군과 여흥 민씨 세력에게 밀려나게 되고 만다.

안동 김씨 세력의 거두였던 김조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서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한 곳이 현암서원(玄巖書院)이다. 이 서원은 김조순이 죽은 지 불과 2년 만인 1833년(순조 33)에 안동 김씨 문중의 배려로 여주군 백사면 현방리(현재는 이천시에 편입)에 세워졌다. 같은 해에 이곳의 지명인 ‘검은바위’를 따서 ‘현암’이라 사액되었다. 이곳에 김조순의 향사를 모시는 서원을 짓게 된 연유는 백사면 일대가 안동 김씨의 세장지(世葬地) 또는 집성촌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서원터는 금반형(金盤形)의 명당터로 누구나 탐내던 곳이라고 한다.3) 백사면 내촌리에는 김조순의 아들인 김좌근, 손자 김병기 등의 묘소가 있다. 백사면에는 99칸이나 되는 김병기의 집이 현존하고 있으니 당시 안동 김씨 세력의 재력과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현암서원은 지방교육의 기능보다는 안동 김씨 문중에서 주축이 되어 김조순의 향사를 모시는 일에 치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서원은 1870년(고종 7)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지된 뒤 복원되지 못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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