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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와 여주

명성황후에 대해 그리피스는 ‘대원군에 못지 않게 억센 여자’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 서울에 왕비가 왕을 조종해서 조선을 통치하고 있으며 왕은 자신의 아내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는 소문을 소개하면서 그 진위 여부는 모르겠지만 명성황후가 소문만큼 그렇게 진보적인 개혁정책의 추진자라고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명성황후에 대해 외모나 내적인 면 모두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했다.1) 비숍이 명성황후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우리가 도착하자 누런 명주가 걸려 있는 간소한 방에서 친절하게 커피와 다과를 대접받았다. … 오래 지체된 뒤 통역만을 동반하여 작은 접견실 한 끝 상단으로 안내되었다. 짙은 분홍색 벨벳 의자 앞에 국왕과 세자, 그리고 왕비가 서 있었고, 언더우드 부인이 나를 소개하자 준비되어 있는 의자에 앉으라고 말하였다. 당시 왕비는 40세가 넘었으며 몸은 가늘고 미인이었다. 검고 윤나는 머리카락에 피부는 진주가루를 사용함으로써 창백하였다. 눈은 차고 날카로웠고 그것은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임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2)

비숍은 당시 한국인들에게 나타났던 왕비의 정치참여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와는 달리 변호하는 입장을 보였다. 대원군이 항상 왕비의 목숨을 노리고 그의 친척들을 위협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방어로 대원군과의 대립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했으며, 왕비의 존재는 나약한 남편이 주위의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 못하게 하는 버팀목으로 평가하였다.3)

언더우드 부인의 명성황후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명성황후께서는 기민하고 유능한 외교관이었으며, 가장 신랄한 그분의 반대자들도 항상 그분의 기지를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명성황후께서는 애국적이고 광범위한 진보정책의 최고 관리자이셨으며, 자기 나라를 위한 최선의 이익에 헌신하셨으며, 어떤 동양의 여왕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크게 국민의 복지를 추구하셨습니다.”4)

서양인들에게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던 그녀가 시해당했을 때 모두가 안타까워했다. 유교적 관념 속에서 일반 대중들은 왕비의 정치적 참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지만 서양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자세가 나약한 왕을 대신하여 국가를 지켜줄 버팀목으로 이해하면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던 것이다.

비숍은 여주에 3일간 머무르면서 여주지역에 대한 몇 가지 감상을 기술하였다.5)

첫째, 여주의 지리적 여건은 한강을 끼고 있으면서 아주 싱싱한 곡물들이 자라고, 낮고 톱니 같은 모양으로 나무가 거의 없이 녹색으로 엷게 번져가는 주름진 산맥들에 닿아 있는 풍요로운 곳이다.

둘째, 여주는 돌아가신 왕비(명성황후)의 출생지로 매우 중요한 도시이다.

셋째, 여주인의 외국인에 대한 태도는 군중들이 비록 적대적이지는 않더라도 다루기 어렵고, 자신을 구경거리로 삼아 몹시 불쾌감을 주었으며, 대부분의 사람이 모두 외국인인 자신에게 매우 무례하였다.

넷째, 여주인의 차림새가 지저분하였으며, 거리도 더럽고 쇠락했다.

다섯째, 높은 양반이 많은 고장으로 지방관에게 낮춤말을 쓰며 하인에게 하듯 명령을 내렸다.

여섯째, 여주 지방관리의 부정부패가 심하여 아예 그들을 ‘한국사회의 기생충들’이라고 지칭하였다. 특히 지방관은 서울에 주로 살면서 지방 관아의 아전들과 결탁하여 조세를 짜내어 나누고 약탈품이나 챙기면서 국고는 완전히 거덜낸 장본인들로 질타의 표적으로 삼았다.

일곱째, 조상을 모신 사당의 내부를 직접 보고 영혼 숭배의 사상이 깃든 종교성에 놀라움을 표하였다.

문호개방을 전후한 시기에 외국인의 눈에 비친 여주의 인상은 자연조건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이었지만 인심, 풍속, 관리 등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특히 그가 격노하여 마지않은 것은 부패한 관리, 그로 연유된 깨끗지 못한 거리와, 사람들에 실망하고 있다. 왕비의 출생지로 가장 큰 기대를 갖고 첫 번째로 방문길에 오른 고장 여주는 거칠고 박한 곳으로 비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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