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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대내정책

대원군은 김씨 세도정권을 붕괴시키고 왕권강화에 애쓰는 한편, 농민들의 불만의 대상이 되어온 여러 폐단을 제거하였다. 먼저 대원군은 중앙관제를 복구하였다. 중앙관제 개혁을 인사정책과 병행하면서 안동 김씨 세력의 중추인 비변사를 의정부와 분리시키는 작업을 추진하여 집권 1년 후인 1865년(고종 2) 3월에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여 비변사를 완전히 폐지하니 의정부는 국정최고기구로서 조선초기의 지위를 되찾게 되고, 안동 김씨의 세력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왕실 권위를 높이기 위해 추진한 사업으로서는 경복궁 중건(重建)이 있었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은 결과적으로 극도의 재정궁핍을 가져와 공사가 끝난 후에도 재정의 회복을 위하여 적잖은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하여 종래 평민에게만 부과한 군포세(軍布稅)를 양반관료에게도 과하고, 지방 관리들의 협잡을 막기 위하여 고리대화(高利貸化)한 환곡제도(還穀制度)를 고쳐 사창제(社倉制)로 하였다. 이렇게 지방 관리들의 부정을 막음으로써 국가의 수취체제를 시정하려는 노력은 또한 지방 토호(土豪)들이 사점(私占)하고 있는 어전(漁箭)을 모두 환속시켜 군자(軍資)로 전환시켰으며, 토지겸병을 엄금하여 농장화(農場化)를 저지시켰던 것이다.1)

아울러 그는 지방관들이 백성에게 거두어들이는 온갖 잡세와 잡부금을 없애고, 비공식 진상(進上), 사헌(私獻)과 뇌물의 거래를 엄중히 단속했다.2)

그는 부분적인 양전을 실시하여 진전(陣田)과 누세결(漏稅結)을 색출 과세하는 데 힘썼으며, 삼정 중 가장 폐단이 컸던 환곡문제 해결에 착수하여 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였다. 즉 대원군은 1867년(고종 4) 7월 호조판서 김병학의 건의를 받아들여 환곡제를 사창제로 바꾸는 개혁정치를 취하였다. 이의 실시로 관리들의 부정을 완전히 근절시킬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 감소시킬 수는 있었으며, 농민의 부담이 경감되었고 국가재정에도 상당히 보탬이 되었다.

또한 대원군은 갖가지 폐단을 일으켰던 군포제도도 개혁하여 그때까지 면세 대상이었던 양반들에게도 매호당 2냥씩 걷는 호포제도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군역을 모든 신분층에 골고루 부담시켰다는 점에서 사회사적으로 획기적인 조치였다.3)

이상과 같은 재정정책으로 대원군은 어느 정도 국민생활에 안정을 가져오고 국고를 충실히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경복궁을 중건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며 지배체제를 일원화함으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확보할 목적으로 악화(惡貨)인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함으로써 국민경제를 다시 파탄에 빠뜨리고 말았다.

이와 같은 대원군의 대내정책은 내외의 위기를 맞이하여 어느 정도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이 당시 조선사회가 안고 있었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못되었다. 농민층의 요구를 어느 정도 해결해준 것은 사실이었으나 크게 보아 봉건체제의 틀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정책은 김씨 세도 정권하에서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고 농민층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지배층에게 약간의 희생을 강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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