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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철종 7)의 대화재와 안동 김씨 문중의 구휼

철종(哲宗)의 재위 기간은 김좌근(金左根) 등을 중심으로 한 김조순 가문 세력이 국가권력을 전적으로 장악했던 시기였다. 1850년 헌종(憲宗)이 후사 없이 죽자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령으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후손이었던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셋째아들인 19세의 원범(元範)이 왕으로 추대되었으며, 순원왕후는 헌종 초년에 이어 거듭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851년 대왕대비의 근친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를 삼았다. 김문근은 국구(國舅)의 지위를 바탕으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또 한 사람의 권력자인 김좌근은 철종 즉위 이후 문반쪽의 관직뿐 아니라 원년 4월의 총융사(摠戎使), 10월의 금위대장(禁衛大將)을 거쳐 2년 4월에는 훈련대장에 임명됨으로써 군사력의 최고 실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1) 그 후 철종 만년까지 김좌근과 그 가문의 절친한 협력자인 정원용(鄭元容)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한 명도 영의정에 오를 수 없었다. 비록 1852년(철종 3)부터 국왕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으나 김씨 문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뿐 실권을 지닌 통치권자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왕족이라 해도 안동 김씨의 세력에 눌려서 살아야 했고, 이들에게 적대하는 세력은 그 어떤 존재도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국가의 모든 권한은 안동 김씨 문중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발생한 여주지역의 대화재는 안동 김씨 문중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국정운영 능력을 시험하는 주요한 현안이었다.

당시 화재피해 상황은 철종의 하교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 철종은 여주목(驪州牧)의 불탄 가호(家戶)에 휼전(恤典)하기를 하교하였다. 화재의 참상은 경기도 관찰사의 장계(狀啓)에 잘 나타나 있었다. 일단 화재의 규모가 주목된다. 실화(失火)에서 비롯된 대화재는 일시에 천여 호를 불태웠으며, 더욱이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1789년(정조 13) 6,654호(3만 1,568명)였던 인구규모에 비춰볼 때 최소한 1/6 이상의 가호와 5~6천 명 이상의 여주 백성들이 화재로 인한 물적·인적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화재 피해에 직면하여 철종은 경기도 관찰사의 장계에 따라 백성들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별도의 구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경기도내 관질(官秩)이 높은 수령(守令) 가운데서 위유사(慰諭使)를 차출(差出)하여 즉시 피해를 복구하며, 여주 백성들을 안위(安慰)시킬 것을 명령하였다. 또한 경기 감사와 여주 목사에게도 백성들을 진휼케 할 방도를 빨리 마련할 것을 지시하였다.2) 동일한 왕명이 6월에도 내려진 상황에서3)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안동 김씨 역시 적극적인 구휼사업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철종대 국정운영의 전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문중의 입장에서 볼 때 여주 대화재에 대한 부실한 처리는 민심 이반으로 직결될 만큼 중대한 문제였다. 이미 삼정문란으로 대변되는 봉건적 부세제도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서울에서 가까운 근기지역에서 일어난 화재와 그로 인한 대규모 난민의 발생은 정국안정의 주요한 관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발생될 수 있는 사난(思亂)의식을 적절한 구휼을 통해 방지할 때만이 앞으로 안동 김씨 문중의 정치적 입지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화재 직후 철종이 내린 하교는 결국 국왕을 앞세운 안동 김씨 문중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내용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한 결과 구휼을 통해 화재로 불안해진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삼정문란으로 인한 피지배층의 봉기는 마침내 폭발하였으니 그것이 임술민란이었다. 1862년 2월 29일 진주봉기에 시작된 민란은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백낙신(白樂莘)과 진주목사(晋州牧使) 홍병원(洪秉元)의 처벌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38개 지역, 경기도 19개 지역, 충청도 11개 지역, 기타 3개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안동 김씨 문중으로 대변되었던 세도정권은 붕괴하고 말았다. 뒤이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는 근본적인 사회모순의 원인을 해결하지 않은 채 구휼이라고 하는 미봉책에만 급급했던 안동 김씨 문중의 정치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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