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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전파와 도참서의 유행

조선후기의 내재적 발전은 피지배층의 사회경제적 의식의 성장을 초래하였다. 이처럼 급속하게 진행되는 사회변화에 비해 이를 수용하려는 집권층의 의지는 현실적으로 더딜 수밖에 없었다. 즉 기왕의 제도적·사상적 장치들이 토대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세도정권하에서 주요한 정책들이 사회경제적 변동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소수 외척가문의 이해관계 유지를 위해 제안되는 상황에서 피지배층의 사회변화에 대한 염원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급격한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일군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있었으며, 이들에 의해 피지배층의 염원을 실현할 수 있는 사상들이 검토되었다. 이때 불평등한 중세 봉건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평등한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사상은 유교적 전통에서뿐만 아니라 외래사조를 통해 모색되기 시작하였다. 그 중 대표적 것으로 천주교가 있었으며, 이를 수용하고 전파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권철신(權哲身)과 일신(權日身) 형제, 이벽(李檗)과 이승훈(李承薰), 정약종(丁若鍾)과 약전(丁若銓), 약용(丁若庸) 형제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제자들이었다.1)

이익은 18세기 사회 제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사상체계로 실학(實學)을 확립하려 노력했던 학자였다. 그는 많은 문인제자들과 함께 성호학파(星湖學派)를 결성하여 다양한 학문과 사상들에 대해 연구하였다. 이익이 주목했던 학문대상 가운데 천주교와 서양과학기술을 포괄하는 서학(西學)이 있었다. 비록 서학이 이단(異端)의 학문으로 당시 유학자들에게 배척받았지만, 그는 공자(孔子)의 소도(小道) 관점에 입각하여 이단사설(異端邪說)에서도 유익한 점은 본받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이익은 서양 과학기술의 선진성을 높이 평가하면서 천주교에서도 심성수양(心性修養)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바로 이러한 스승의 학문전통을 계승한 소장파 문인들에 의해 천주교가 궁구(窮究)되기 시작하였다.

성호문인들은 1778~1779년 무렵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산북면(山北面)과 금사면(金沙面)에 위치한 주어사(走魚寺)와 천진암(天眞庵)에 모여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였다. 참석자들은 10여 일간 지속된 강학기간 동안 하늘, 세상, 인성(人性) 등에 대해서 집단토론회를 펼쳤다.2) 그리고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 천주교 교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파견된 서양 선교사의 도움 없이 자득(自得)된 천주교 교리는 배움의 차원을 너머 일상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종교로 인식되고 체행(體行)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기초로 하여 종교적 제의(祭儀)를 병행하면서 천주교를 전파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위해 관련 서적들을 간행하였다. 이승훈은 직접 북경(北京)에 가서 영세(永世)를 받고 돌아와 1784년 조선 최초의 천주교회를 세우면서 활발한 종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함께 신앙활동을 전개한 사람들은 양반사대부뿐만 아니라 중인계층도 포괄되었다. 당시 김범우(金範禹)를 중심으로 사대부·중인 수십 인이 그의 집에 모여 예배를 보았다. 서울의 양반사대부들에게까지 확산된 천주교는 이후 삼남지방뿐만 아니라 유림의 본고장인 경상도 지역까지 교세를 확장하였다. 이처럼 짧은 시간 놀라운 속도로 천주교가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천주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사상 때문이었다.

그런데 피지배층이 염원하는 평등한 세상은 반드시 천주교의 교리에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전래해 내려오는 도참서(圖讖書)에도 그러한 사상이 들어 있었다. 도참이란 원래 징후·전조의 뜻을 지닌 말로, 장차 닥쳐올 길흉화복을 예언·암시하거나, 약속하는 신비적·미신적 성격이 농후한 사상 체계였다. 즉 어렵고 힘든 현실에 직면했을 때 밝은 미래를 제시함으로써 인간 마음 속에 내재된 불안감을 해소시켜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으로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비기류(秘記類)가 있었다. 이 책들에는 왕조나 왕권의 교체기, 정치사회적 변동기에 대한 예언이 자주 등장하였다. 실제로 역대 반왕조세력들은 도참과 비기를 이용하여 현체제를 부정하였으며, 이를 자신의 세력을 결집하는데 활용하였다. 대표적으로 이성계(李成桂)도 이를 빌어 이씨왕조 건설에 이용하였는 데, 조선을 건국한 뒤 비기의 전파를 금지하였다. 그리고 소장자에게는 형벌을 내리고 수집된 책들은 모두 불태워 없애버렸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와서도 정여립(鄭汝立)이나 허균(許筠) 등에 의해 변란의 자료로 활용되어 새로운 왕조인 정씨왕조설이 유포되었으며, 이후 민간에 더욱 널리 전파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정감록』에 주목한 것은 현실사회의 불평등을 타파하려는 의지가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조선왕조를 교체해야 한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부추기는 것으로,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해도기병설(海島起兵說) 등의 무장저항의 방편까지 담겨져 있었다. 즉 정진인(鄭眞人)과 같은 이인(異人)이 등장하여 무장봉기를 통한 역성혁명을 이루어 사회변혁을 주도하리라는 희망을 피지배층에게 주입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격을 지닌 도참서들은 임진왜란 이후 꾸준히 유포되었으며, 18세기 초에 이르게 되면 사회적 문제로 불거지게 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도참서들이 널리 유포된 서북지방에 조사관을 파견하여 민간을 조사하고, 책들을 불태운 사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감록』은 계속 유행하여 영조 연간에도 이를 금하는 엄명을 내렸고 정조 연간에는 홍복영(洪福榮) 등이 이를 이용하여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18세기 후반에 언해(諺解)된 『정감록』은 일반 백성들에게 널리 유포되었으며, 이 책을 읽거나 그 내용을 들은 피지배층은 현실의 모순된 사회를 극복하고 이상사회를 꿈꾸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세기에 이르면 세도정권의 폭정에 맞서 ‘난을 일으키려고 생각[思亂]’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구체적인 행동인 민란으로 표출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 평안도농민전쟁 당시 홍경래(洪景來)가 이를 이용한 뒤, 변란세력들에 의해 더 널리 이용되거나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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