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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권기 부세체계의 왜곡 및 농촌경제의 파탄

19세기는 17~18세기 이래로 발생하였던 내재적 발전 양상을 국정운영에 반영하여 능동적으로 중세 봉건체제를 극복하고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하는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영·정조대 국왕 중심의 집권체제를 잘 유지함으로써 중간수탈 계층을 배제하고 일민적(一民的) 통치를 이룩하는 과제가 부여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농업생산력 발달과 상품화폐경제 발전과정에서 이루어진 성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잉여 생산물의 고른 분배를 모색해야 했다. 한편 사회적으로는 신분제 해체에 적극 대처함으로써 새로운 시민세력의 육성과 보호에 적극 힘써야 했다. 그러나 세도정권기 중앙 지배세력을 구성했던 외척가문들은 이러한 시대적 과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보수 반동적인 경향을 띠면서 구래의 국가운영 체제를 고집하였으며, 최고 권력기관인 비변사 장악을 통해 소수의 외척세력만이 국왕을 대신하여 중앙과 지방의 국정을 농단해 나아갔다. 이 같은 권력 독점과정에서 정치적 부패와 제도의 문란은 불을 보듯 뻔하였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의 제 모순들은 고스란히 피지배계층에게 전가되었다.1)

당시 향촌사회에 살았던 대다수의 농민들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부세체계의 왜곡으로 생계를 유지해나가기 어려웠다. 더욱이 세도가문에 의해 허비되는 국가재정 적자로 인해 일반 백성들이 부담해야 할 세금은 신분제 변동에 따라 담세원이 축소되어감에도 불구하고 더욱 증대되었다. 즉 신분제가 변동하고 농민층이 분화함에 따라 부세를 부담할 인구가 줄어들게 되면서 남아 있는 농민들의 부세부담 능력도 약화되었다. 중앙정부에서는 이와 같은 구조적인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에 토지를 기준으로 한 총액제(總額制)로의 전환을 적극 모색하였다. 조선후기 부세정책의 특징인 토지를 중심으로 일원화되는 추세와 총액제, 즉 공동납제(共同納制)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총액제는 군현단위로 정해진 총액을 부세부담자수의 증감과 관계없이 부담토록 하는 제도였다. 총액을 미리 정함으로써 세입감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재정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정책이었다. 17세기 이후 부분적인 시행을 거쳐 18세기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실시된 대동법(大同法)과 18세기 중엽의 균역법(均役法), 그리고 전세(田稅)에서의 비총제(比總制)와 군역(軍役)에서의 군총제(軍總制), 환곡(還穀)에서의 이환제(里還制) 등이 그것이다. 공동납의 확대와 함께 각종 부세의 토지집중현상은 중세적인 부세체계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을 유지시켰던 중세지배체제가 해체되어가고 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일단 총액제의 강화로 일정 액수의 부세를 거두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농민들의 저항을 누그러뜨릴 목적으로 군포계(軍布契)를 만들고 호환(戶還) 등을 실시하여 양반도 일부 부세를 부담하였다. 그러나 신분제 해체에 따른 세금을 물지 않는 양반계층의 증가로 삼정(三政)과 잡세(雜稅)는 몰락해가고 있던 빈농층에게 집중되었다.

19세기 부세체계를 왜곡시키는 요소로 군현의 수령과 이서(吏胥)·향임(鄕任)의 농간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진전되고 있었던 화폐유통을 악용하여 부정축재의 수단으로 삼았다. 당시 부세운영 과정을 살펴보면 더 이상 봉건적인 현물자연경제의 틀 속에서만 운영되지 않았다. 부세 수취와 상납 과정에서 발전하고 있던 화폐유통경제의 영향으로 현물이 아닌 화폐가 거래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가적 상품화폐경제의 운영과정에서 주로 군현의 아전이나 향임층, 영주인층(營主人層) 등이 농촌경리를 완전하게 화폐화하지 못한 미숙한 상품화폐경제와 중앙의 현물재정원칙의 괴리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농민들을 수탈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구조적 모순과 그 운영과정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비리로 인해 세도정권기 부세체계는 심각하게 왜곡되었으며, 이로 인한 농촌경제의 파탄으로 향촌사회 내 지주와 전호, 부농과 빈농 사이의 계급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근본적으로 빈농의 담세능력이 한계에 이른 상황 속에서도 이들의 경제력에 상관없이 동일한 비율로 조세를 부과하는 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국가의 폭압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집권세력들은 조선후기 이래 생산력 발전에 따른 사회경제적 변화에 적절히 대응치 못한 채 소수의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만을 보존하는 데 급급하였다. 이들은 근대사회를 전망하는 정치세력이기보다는 구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사고방식과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야기되었던 각종 사회의 제모순들은 신분적 약자였던 피지배계층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며, 마침내 반봉건 투쟁을 초래하였다.

처음에는 소작농민들이 소작료를 빼돌리거나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항조(抗租)투쟁을 벌였다. 그러던 것이 차츰 봉건관료들의 불법적 수탈을 폭로, 규탄하는 와언(訛言)·산호(山呼)·거화(擧火)·투서(投書)·정소(呈訴)운동으로 확산되었으며, 이와 같은 소극적인 항쟁이 축적되면서 본격적인 농민항쟁이 전국 각 지역에서 조직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민란의 주요한 원인은 부세체계의 왜곡에서 비롯된 농촌경제의 파탄에 직면한 농민들의 저항에서 비롯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1862년 임술농민항쟁(壬戌農民抗爭)을 들 수 있다. 이 항쟁은 진주에서 시작된 이후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경기도·황해도·함경도의 일부를 포함, 전국적으로 70여 개 읍에 걸쳐 발생하였다. 이 농민항쟁은 기본적으로 조선후기 이래 계속된 생산력 발전과 계급구성의 변화라는 토대의 변동에 조응된 것이었고, 체제적 모순의 담지자인 농민들이 중세봉건사회를 부정하며 전개한 변혁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다.

농민들의 체제저항에 놀란 세도정권은 부세문제의 해결을 위해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재야 유생층과 관료들에게 부세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널리 모집하였다. 그 결과 각기 다른 대안들이 제시되었는데 우선 부세운영 개선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논의를 주장한 사람들은 운영상 모순만을 시정하는 데 주목하였다. 그래서 일부 수령의 실정(失政)과 탐학을 민란 발생의 주요한 원인으로 상정하고 해당 지방수령에 대한 교체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다음으로 부세제도 자체의 결함을 지적하는 논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삼정 가운데에서도 백성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던 군포(軍布)·환곡의 폐지와 균부균세(均賦均稅)를 실현하기 위해 양전(量田)사업의 철저한 시행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조세제도의 개선을 통해 도탄에 빠진 농촌경제를 구하고자 의도했다. 마지막으로 일부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논자들 중에는 지주제 혁파를 통한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토지소유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 없이는 민란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전부터 주장한 정전제(井田制) 이념에 따라 토지를 고르게 분배함으로써 농민경제의 균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상 세 가지 방안 가운데 세도정권은 삼정이정절목(三政釐整節目)을 통해 부세제도 운영의 문제와 부세제도 개선안을 절충한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원칙만을 천명했을 뿐 구체적인 시행을 강제하는 후속조치를 마련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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