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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권의 성립과 여주지역의 동향

조선의 제22대 국왕인 정조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정국운영은 왕실과 외척관계를 맺은 소수 유력 가문에 의해 주도되었다. 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세도정권기로 규정하였다. 본래 세도란 세도지임(世道之任)에서 유래된 용어로서 일당(一黨) 전제적 정권의 비대화로 인하여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면서 국왕이 특정한 인물을 두텁게 신임하여 그에게 왕권의 대행을 위임한 형태를 의미하였다.1)

18세기 후반 정조대 탕평정국(蕩平政局)을 거치면서 여러 정파들이 상호견제를 통해 정국안정을 도모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서인계(西人系) 노론(老論)이 주도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들 중에서도 국왕의 신임을 받는 유력자, 혹은 왕실과 혈연관계를 가진 외척세력이 득세하게 되었다. 특히 정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순조(純祖) 이후 역대 국왕들은 모두 나이가 어려서 왕실과 척족관계(戚族關係)에 있는 양반관료가 실제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이른바 외척세도정치가 행해지게 되었다. 19세기 세도정권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가문으로는 경주 김씨(慶州金氏), 안동 김씨(安東金氏), 반남 박씨(潘南朴氏), 풍양 조씨(豊壤趙氏)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세도정권 초기 경주 김씨의 득세가 주목된다.

순조 초기 경주 김씨를 이끌던 인물은 영조(英祖)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였다. 그녀는 경주 김씨 유학(幼學) 김한구(金漢耉)의 딸로서 15세로 서거한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를 대신하여 1759년(영조 35) 중전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구주(金龜柱)는 영조의 총애를 받아 과거에 급제한 이후 빠른 승진을 거듭하였으며, 영조 후반 정국에서 남당(南黨)의 영수로서 풍산 홍씨의 홍봉한(洪鳳漢)을 중심으로 한 북당(北黨)과 대립하였다. 그 후 정조가 등극하자 경주 김씨 세력은 위축되었다. 정조는 즉위 초부터 국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외척세력을 배제하였는데, 이 같은 정책의 실시 결과 홍인한(洪麟漢), 정후렴(鄭厚廉)과 김구주 등이 배척되었다. 하지만 1800년(정조 24) 6월 28일 정조가 갑작스럽게 서거하면서 경주 김씨 세력은 정국을 주도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당시 11세에 불과하던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가 왕실의 윗어른으로서 나이 어린 국왕을 대신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시행하였다. 대왕대비는 수렴절목(垂簾節目)의 규정에 따라 국왕과 같은 국가 최고의 위상을 견지할 수 있었다. 정순왕후는 4년 동안의 수렴청정을 통해 정국운영에 직접 간여하였는데 특히 인사문제와 죄인 처벌 문제와 관련된 하교(下敎)가 주를 이루었다. 인사분야에서는 자신의 외척가문 출신 인물을 적극 등용하였다. 이때 중용되었던 인사들은 김구주를 비롯한 친정 인물인 김관주(金觀株), 김일주(金日柱), 김용주(金龍柱), 김로충(金魯忠), 그리고 심환지(沈煥之) 등이었다.2) 이들 외에도 수렴청정 기간동안 순조의 학문 성장을 돕는 명목으로 당대 대표적인 산림(山林)이었던 송환기(宋煥箕)·이직보(李直輔) 등을 초치(招致)하였으며, 이들을 통해 정치 관계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다.

한편 수렴청정기에 단행된 주요 정책으로는 내시노비(內侍奴婢)의 혁파와 장용영(壯勇營)의 철폐를 들 수 있다. 1801년에 단행된 공노비 혁파를 통해 호조(戶曹)의 부족한 경비를 보충할 수 있었다. 이는 정조대 이래 아래부터의 신분해방의 욕구를 국가재정의 안정화와 관련하여 정책화시킨 귀결로 단행되었다. 즉 내시노비의 혁파는 조선후기에 가속되어온 신분제 동요라는 당시 사회적 변화를 인정하고 피지배층의 욕구를 어느 정도 해소하여 그들의 호감을 얻으려는 목적과 정치적으로는 정조의 정책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 정책의 실행으로 정순왕후는 선왕의 이념 위에서 자신들의 기반을 강화함으로써 초기 불안정한 왕위를 공고히 할 수 있다. 또한 장용영 폐지와 이에 수반한 장용내영(將勇內營)의 별고(別庫)와 외영(外營)의 각 창고를 모두 내탕(內帑)에 환속시키는 조치를 통해 재정기반을 안정화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장용영 혁파의 이면에는 다른 외척세력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이 시기 경주 김씨를 위협했던 대표적인 정론가(政論家)는 안동 김씨를 대표했던 김조순(金祖淳)이었다. 원래 정순왕후는 안동 김씨, 반남 박씨 등 외척가문들에 대해 포용과 견제의 이중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안동 김씨에 대해서만큼은 견제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것은 안동 김씨 가문이 경주 김씨 입장에게 가장 강력한 정치적 경쟁상대였기 때문이었다.3) 당시 김조순은 순조의 장인이었다. 정조대 이미 김조순의 딸이 세자빈으로 선택되었으며, 재간택까지 끝낸 상황이었다. 그리고 1802년(순조 2) 마침내 순조비(純祖妃)로 책봉되었다. 그 사이에 국혼(國婚)을 막으려는 경주 김씨의 방해 공작이 있었지만 1804년 4월 안동 김씨가 반남 박씨와 협조하여 국혼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권유(權裕), 이안묵(李安默) 등을 제거함으로써4) 외척세력으로서의 입지를 한층 강화시킬 수 있었다. 또한 김조순은 장용영과 최고권력기관인 비변사(備邊司)의 실권(實權)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순조 원년에 규장각(奎章閣) 제학(提學)에 임명되어 줄곧 검교제학(檢校提學)으로 있으면서 관원의 인사를 주도하였다. 이처럼 막대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김조순을 견제하기 위한 일환으로 정순왕후는 장용영을 혁파하였으며, 이를 통해 안동 김씨 가문의 무력기반을 무력화시키고자 의도했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주 김씨의 권세는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면서 점차 위축되었다.

정순왕후는 순조의 나이가 15세가 되던 1804년(순조 4) 철렴(撤簾)할 것을 하교하였다. 이 같은 하교를 내리게 된 배경에는 굳건한 경주 김씨의 정치적 기반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김관주가 정승의 반열에 올라 있었으며, 김일주 또한 오랫동안 순조의 곁에서 보필하는 등 중앙정계에서 경주 김씨의 기반이 확립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기반 속에서 철렴 직후에도 정순왕후는 자신이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특히 군국(軍國)에 관한 대정령(大政令)과 형벌에 관한 대처분, 그리고 의리에 관계되는 일을 그대로 주관하였다. 그러나 1804년(순조 4)에 일어난 권유의 옥사(獄事), 1805년(순조 5) 12월에 일어난 김달순(金達淳) 옥사와 정순왕후의 사망을 계기로 경주 김씨 세력들은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으며, 안동 김씨 인물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아갔다. 경주 김씨의 정계 축출 과정에서 안동 김씨는 반남 박씨와 연합하였다. 우의정 김달순(金達淳)의 초연연주(初筵筵奏)를 빌미로 한 이른바 ‘병인경화(丙寅更化)’를 계기로 안동 김씨와 반남 박씨 척족이 연립하여 주도하는 세도정권이 수립되었다.5)

경주 김씨의 실권 이후 안동 김씨와 반남 박씨는 일정기간 연립을 통해 정국을 운영해나갔다. 이 시기 김조순은 반남 박씨 박준원(朴準源), 풍양 조씨 조만영(趙萬永) 등 유력 인사의 협력을 얻어 정국을 주도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김조순은 1808년(순조 8) 4월 과거 장용영의 군액과 재정을 이용하여 훈련도감(訓練都監)의 재정을 늘리는 등 군사권을 장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세도가로서의 면모를 확립해나갔다.6) 또한 그는 1809년(순조 9) 3월 8년째 맡아온 훈련대장직을 이득제(李得濟)에게 물려주고 군사력의 직접 장악에서 일단 물러나는 여유도 갖게 되었다.7)

그러나 두 외척간의 연립은 이후 1811년 평안도농민전쟁이후 사회기강 진작과정에서 표출된 이견과 1812년 11월 조득영(趙得永)의 박종경(朴宗慶) 탄핵으로 세력 재편과정을 겪게 되었다.8) 당시 조득영은 김달순을 공격하는 데 앞장선 공로로 순조의 총애를 받아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는 등 커다란 세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더욱이 김조순과의 협력관계 속에서 자신의 8촌인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으면서 더욱 기반을 확대시켜 나아갔다. 반면 반남 박씨 세력은 자신들의 권력배경이었던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가 서거하면서 함께 몰락하였다. 풍양 조씨의 득세과정에서 안동 김씨가 잠시 수세에 몰리기도 했지만 곧 헌종(憲宗)·철종(哲宗)에게 왕비를 들임으로써 다시 세력을 만회하였다. 그리하여 안동 김씨 일족의 세도는 순조대를 이어서 헌종·철종 때까지 3대 60여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조정의 요직을 독차지하여 권세가 절정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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