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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피지배계층의 의식성장과 향촌사회의 변화

농업생산의 발전과 농업경영의 변화, 이에 따른 상업경제의 발달은 전통적인 신분관계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즉 농업생산력 발전과 상품경제의 발달에 따른 농민층 분해와 양반의 몰락 현상이 조선후기에 들어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농민층 분해의 양상으로 먼저 피지배계층의 성장을 들 수 있다. 평민과 천민 가운데 합리적인 농업경영이나 상업활동을 통해 재산을 모은 서민지주와 부농층이 등장하였다. 서민지주에는 농민으로 부를 축적하여 성장하면서 지주로 변신해간 자들과, 상인으로서 부를 축적하여 토지를 매입함으로써 지주로 변신해간 두 부류가 있었다. 부농층은 자작상농(自作上農)·자소작상농(自小作上農)·소작상농(小作上農)들로서 경영형부농·광작농(廣作農)·광농경영주(廣農經營主)들로 구성되었다.1) 많은 부를 획득한 이들은 경제적 지위에 맞는 신분적 지위상승 욕구를 표출하였다. 그 과정에서 면천(免賤)·면역첩(免役帖)과 납속(納贖)에 의한 관직의 제수(除授) 등 합법적인 방법과 호적(戶籍)과 홍패(紅牌) 위조, 족보(族譜) 매매 및 위조 등의 탈법적 수단이 동원되었다. 그 결과 양반의 숫자는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상민(常民)은 점차 감소되고, 노비는 급격히 소멸하였다.2)

이처럼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계층이 있는가 하면, 향촌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농민은 몰락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그 원인은 이미 기술(旣述)한 바와 같이 지주제 확대에 따른 토지의 상실이었다. 양반지주와 부농층의 토지확대는 다수의 소경영농민으로 하여금 그들의 차경지(借耕地)를 축소시키거나 상실하게 함으로써 빈농층(貧農層)으로 전락하는 직접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지주전호제가 확산되면서 상하의 신분관계보다는 경제적 관계가 우선시되었던 점이다. 즉 농업생산활동 과정에서 지주와 전호 사이에는 불완전하게나마 경제적 관계가 확산되었으며, 이는 사람들에게 상하간의 신분질서를 이완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 같은 양상은 임노동자층의 형성과정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났다. 전호보다 처지가 더욱 열악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기 시작하였다. 즉 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과정의 하나로서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노동력을 매매하는 일용 노동자층이 형성되면서 농업생산력 발전에서 초래된 생산관계의 변화는 신분제를 해체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향촌사회에서의 농민층 분해와 그에 따른 경제적 관계의 광범위한 확산은 피지배계층들의 의식을 점차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사례로 ‘서민문화(庶民文化)’의 형성과 활성화를 들 수 있다. 우선 『춘향전』·『심청전』·『토끼전』·『콩쥐팥쥐전』 등 국문소설의 등장을 들 수 있다.3) 이것이 경제 성장에 따른 대중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한문이 아닌 국문으로 표기되었다는 점은 문학이 더 이상 양반지배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서민들도 참여할 수 있는 문화분야로 확대되었다는 사실로서, 당시 피지배층의 성장을 알려주는 징표로 상정할 수 있다. 그리고 내용적인 면에서도 『춘향전』·『심청전』의 경우 신분적인 억압을 너머 사랑과 꿈을 이룬다는 점에서 성숙된 피지배계층의 신분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또한 『흥부전』은 부자 형과 가난한 동생의 대비를 통해 조선후기 행해진 장자상속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즉 양난 이후 양반사대부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벌였던 노력과 이를 반영한 사회상이 소설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또한 『흥부전』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서 대신 매를 맞는 흥부의 처지를 통해 당시 몰락한 농민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어떤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국문소설은 민간에서 행해졌던 판소리로부터 유래되었는데 판소리가 대중적 기반을 갖추면서 다시 소설로 정착되어 마침내 ‘판소리계 소설’로 재가공되었던 것이다. 당시 판소리는 대중들이 많이 모이는 장시에서 행해졌다. 조선후기 경제발전을 집약하는 장시를 무대로 한 판소리의 성행은 서민들이 즐겨했던 공연문화의 새로운 창출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의식성장을 입증하는 증표이기도 했다.4)

조선후기 신분제 해체 양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양반의 몰락이었다. 몰락 양반들은 서당훈장이나 고용훈장처럼 지식을 팔아 생활을 유지하거나 더욱 심한 경우 농업이나 상공업 등 생업에 직접 종사하여야 하였다. 심지어 일부 몰락양반 가운데에는 전호가 되거나 심한 경우 임노동자로까지 전락하는 등 현실적인 조건은 일반 백성들보다 열악한 경우도 있었다. 이전 지주이자 관료였던 양반의 특권적 면모가 사회경제적 변동을 겪으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정파간 대립과정에서 패배한 당색(黨色)에 소속된 양반의 경우 평생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에 직면하게 되면서 몰락을 재촉하였다. 당시 양반의 몰락상은 박지원(朴趾源)의 『양반전(兩班傳)』에 잘 묘사되었다. 박지원은 관곡(官穀)을 빌어먹고 못 갚는 가난한 선비와 신분상승을 꾀하여 양반이 되고자 하는 정선(旌善)지역 부자를 대비시켜 몰락 양반의 허위의식을 풍자하였다.5)

이처럼 양반의 사회경제적 위상이 추락하게 되면서 이들이 보유했던 지배력 또한 소멸하기 시작하였으며, 향촌사회 운영과정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이는 상대적으로 향촌사회 내에서 피지배층들의 역할이 사회의식의 성장과 함께 높아지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조선전기 이래로 향촌사회 운영의 주체는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이었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재지사족들은 중소지주로서의 경제적 지위를 견지하면서 향촌의 대소사를 주관하며, 신분제를 바탕으로 상하의 차등적 사회질서를 유지해나갔다. 이들은 원활한 향촌사회 지배를 위해 여러 가지 조직과 수단들을 동원하였다. 일반적으로 사족들은 향안(鄕案)을 모체로 한 향회(鄕會)를 통해 유향소(留鄕所)를 장악하고, 그 지역의 부세운영과 인사권을 통해 수령권과 일정한 타협을 이루면서 리(吏)·민(民)을 통제해나갔다. 또한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을 이용하여 향촌사회 내 여론을 주도하였으며, 각 동리(洞里)별로 생산공동체의 질서유지를 위한 동계(洞契)를 하부조직으로 편제하였다.6)

그러나 17세기 이래 왜란과 호란으로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의 재지사족들이 농민과 토지로 대변되는 생산수단을 크게 상실하였다. 이들 중에는 전란의 과정에서 경제기반의 상실은 물론 인맥의 단절까지 겹쳐 사족기반 자체가 완전히 붕괴된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재지사족들은 향촌내 피지배층의 도움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피지배층의 조직을 인정해 주고 이들을 재건작업에 적극 동참시켰다. 이 과정에서 하층민의 향촌내 위상은 제고되었으며, 사업의 성과에 따라서 피지배층의 조직들은 사족들의 공인을 받으면서 해당 지역에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상하합계(上下合契)를 들 수 있다. 양난 이전 신분적 차이로 인해 따로 분리되어 운영되었던 양반 중심의 상계(上契)와 피지배층의 하계(下契)가 하나로 합쳐진 합계의 형태가 등장하였다. 이는 향촌사회 운영주체로 피지배층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음을 단적으로 입증하는 증거였다.7)

사실 양난 이전부터 피지배계층은 자신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향촌사회 운영과정에 반영시킬 수 있게 조직을 만들어서 운영해왔다. 전통적으로 향촌민들은 신앙활동이나 경제적 활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공동조직을 만들었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민속 고유의식을 주관하고 생활공동체적 기능을 수행하던 향도(香徒)와 음사(淫祠) 등이 있었다. 한편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농업기술 발달과정에서 상호유대를 강화하면서 결속을 다질 수 있었던 조직인 두레가 형성되었다. 이앙법이 보급되면서 모내기철에 일시에 많은 노동력의 투여가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원활한 노동력 동원을 위해 공동의 노동조직이 만들어졌다. 두레는 품앗이를 통해 노동력을 자발적으로 징발하여 모내기를 돕기 위해 형성된 공동 노동조직으로 출발하였으나 차츰 그 범위를 농사일뿐만 아니라 향촌사회 운영과정 전반으로까지 확대시켜나갔다.

두레는 해당 향촌에 거주하는 장정(壯丁)들로 구성되었는데, 일정한 노동력을 갖춘 사람이 구성원들의 허락을 받은 후에 가입하여 활동할 수 있었다. 구체적인 역원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통솔자인 행수(行首)와 보좌역인 도감(都監)이 있다. 그리고 두레작업의 진행을 지휘하는 수총각(首總角)과 두레규약을 감시하는 조사총각이 있으며, 유사(有司)와 방목지의 가축으로부터 전답을 보호하는 방목감(放牧監)이 주요 구성원으로 참여하였다. 행수와 도감은 자작농민 중에서 인망과 역량이 있는 자를 선출하였으며, 그 외에는 소작농이나 머슴 중에서 선발하여 임명하였다. 구성원의 면모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두레는 지주층을 제외한 향촌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피지배층의 이익을 잘 대변할 수 있었다. 자발적으로 조직을 만들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관철해나갔다는 사실은 피지배층의 의식이 성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8)

한편 향촌민 가운데에 부농층은 재지사족과 함께 향권(鄕權)을 놓고 경쟁하는 상대로까지 성장하였다. 우선 이들은 18세기 사회경제적인 변화·발전과정에 확보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부의 납속, 원납(願納) 또는 매향(賣鄕) 등과 같은 신분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신분적 위상을 강화시켜나갔다. 실제로 이러한 방법을 통해 유학(幼學)·향임층(鄕任層)으로 신분과 직역을 변동시키면서 상층신분으로 성장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향촌 내 위상은 불안정하였다. 그것은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사족세력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으로 수령권(守令權)과 결탁하여 새로운 동반자로서 향촌운영에 참여하였다.

당시 중앙의 정부는 사족에 의한 향촌사회 운영이 어렵게 되자, 국가가 직접 통제하는 방향으로 향촌 지배정책을 전환하였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수령의 권한과 면리제(面里制)의 향촌통제기능을 강화하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의 실효성을 보장받기 위해 새롭게 등장하는 사회세력과 손을 잡았다. 이들 세력은 신향(新鄕)으로 불리게 되었고, 기존의 사족들과 향촌사회 운영권을 둘러싼 치열한 갈등을 벌였다. 일명 향전(鄕戰)이라고 불리는 대립의 결과 재지사족이 현격히 약화된 일부 지역에서는 신향들이 이들을 대신하여 지배권을 행사하기도 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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