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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남한강 유역의 포구분포와 상업경제의 발달

농업생산의 발달과 농업경영의 변화에 따른 상업적 작물의 재배는 곧바로 유통경제의 발전, 특히 장시의 증대로 표출되었다. 서울, 평양, 대구, 개성 등 대도시지역에서는 상설시장이 세워졌으며, 향촌지역에서는 장시가 더욱 발달하였다. 15세기 말 남부지방에서 개설되기 시작한 장시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그 수가 증가한다. 17세기에 들어와 5일장 체계가 전국적으로 수립되었으며, 18세기에 이르면 장시의 수가 1천여 개로 증가하였다. 보통 한 개의 군에 5, 6개의 장시가 닷새 간격으로 열리게 되므로, 그 지역 주민들은 거의 매일 장을 볼 수 있는 셈이었다. 따라서 5일장은 해당 지역 사람들에게 상설시장과 같은 존재였다. 이와 같이 5일장 체계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전국에 걸쳐 군을 단위로 하나의 지역적 시장권이 형성되었음을 의미했다. 대표적인 장시로 경기도 광주의 사평장(沙坪場), 충청도 강경장(江景場), 경상도의 마산장(馬山場), 황해도의 은파장(銀波場), 함경도의 원산장(元山場), 강원도의 대화장(大和場) 등을 들 수 있다. 지방 장시의 활성화는 이를 무대로 한 상인들의 등장을 예고하였다.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상인층으로는 도시의 시전(市廛)상인과 지방 각지를 돌아다니는 보부상(褓負商) 등이 있었다. 그러다가 1608년(선조 41)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면서 공인층(貢人層)이 새로운 상인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농촌출신으로서 도시에 살았던 몰락 농민들이 상업에 종사하거나 지방 장시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이들 중에는 상업자본을 축적한 사상(私商)층이 나타났다. 이들은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대도시와 농촌의 장시를 장악하여 상품거래에 따른 이득을 얻었다. 송상(松商), 경상(京商), 만상(灣商), 내상(萊商) 등이 당시 대표적인 도고(都賈)들이었다. 이들 상인세력은 상품유통과정에서 매점매석과 독점을 배경으로 성장하였으며, 대리인을 통해 본격적으로 생산지까지 진출하여 상품을 매점하거나 또는 일부 상품의 경우 생산자에게 원료와 생산비를 미리 주고 생산과정을 지배·장악하기도 하였다.1)

이처럼 생산지까지 확대된 원격지 교역을 위해서는 육로뿐 아니라 수로를 이용한 상업활동이 필요했다. 조선전기 이래로 육로를 통한 상업활동은 종래의 역(驛)을 이용한 역로(驛路)운송이 주류를 이루었다. 역은 중앙과 지방의 공문서를 전달하고 공공물자를 운송하며, 사신왕래에 따른 영접과 숙박제공 등을 담당하는 등 운송과 교통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유지하는 데 중추적인 구실을 다하였다. 특히 진상(進上)과 공부(貢賦)는 대개의 경우 역로를 이용하여 운송하였다. 경상도지역을 사례로 그 경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안동(安東)이나 영덕(盈德)의 진상은 단양(丹陽)의 장림역(長林驛)을 거쳐 수산역(水山驛 : 청풍) → 황간역(黃澗驛 : 청풍) → 연원역(連原驛 : 충주) → 가흥역(可興驛 : 충주) → 안평역(安平驛 : 여주) → 신진역(新津驛 : 여주) → 아천역(阿川驛 : 이천) → 오천역(吾川驛 : 이천) → 경안역(慶安驛 : 광주) → 평구역(平丘驛 : 양주)을 지나 서울로 운송되었다.2)

그런데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역과 함께 전국적 유통망을 연결하는 지역적 유통단위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각 지방의 포구(浦口)와 하항(河港)이 등장하였다. 당시 육로를 통한 상품수송은 지리적인 제약을 많이 받고 있었다. 따라서 대규모의 세곡(稅穀)이나 지조(地租)의 수송은 대개 뱃길을 따라서 이루어졌다.3) 특히 경강포구(京江浦口)와 외방포구(外方浦口)가 수로를 이용하여 많은 양의 상품을 일시에 유통시킬 수 있다는 이로움 때문에 새로운 상업지구로 각광받게 되었다.4) 즉 종래 포구는 세곡이나 지대운송의 거점으로 또는 군사방어상의 요충지로 기능했는데, 조선후기에 이르게 되면서 상업이윤을 목적으로 선박을 이용한 상품유통이 발달하게 되었다. 포구가 상품유통의 거점으로 기능하고 그 곳에서 매매가 활발히 전개되자 종래 포구가 없던 지역에도 새롭게 포구가 설치되었으며, 이미 폐기되어 없어진 포구가 다시 설치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포구 중에서도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역, 즉 조수(潮水)가 올라올 수 있었던 지점이 큰 포구로 발전하였다. 큰 포구의 발전은 18세기 이전에 주로 국가에서 세금으로 걷는 곡식을 운송하면서 성장하였다. 특히 경강상인들은 세곡과 지대운송과정에서 꾸준히 새로운 유통로를 개발하면서 부를 축적하였다.5) 본래 이들은 사선(私船)으로 어채(漁採)나 행상, 진도업(津渡業)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16~17세기 이후 관영조운체계(官營漕運體系)의 해체와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소작료 및 상품물량의 증대, 대동법 실시에 따른 대동미(大同米) 운송 등의 변화에 편승하여6) 세곡 및 지대 운송업에 적극 진출하여 성장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포구 주변에는 여각(旅閣)·객주(客主)·선주인(船主人) 등이 등장하여 상인들을 위한 숙박시설을 제공하거나 위탁구매하여 판매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부수적으로 숙박·수송·보관·금융업 등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즉 포구의 유통기능이 전면적으로 발전하면 그 자체가 소비시장과 교환매개지로서의 장시와 동일한 기능을 갖게 된다. 포구의 발달 정도는 선박에 의해 운송되는 대규모의 상품을 얼마나 빠른 시일 내에 소비할 수 있는 시장이 배후에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러한 포구를 포시(浦市)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7) 한강 하류지역의 포구들도 점차적으로 정기적인 장시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곳이 남한강 연안의 백애촌(白崖村), 북한강 연안의 홍천장(洪川場)·인제장(麟蹄場) 그리고 한강 하류의 덕은장(德隱場) 등이었다. 서울과 같은 큰 소비시장을 배후에 둔 경기지역 포구의 역할이 증대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들 근기(近畿)지역의 포구에서 주로 다룬 상품은 단연 쌀이었다. 더욱이 여주와 이천과 같은 주요 미곡생산지를 갖고 있었던 포구에서는 대량거래를 통해 많은 이윤을 얻으려는 상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송파(松坡)지역의 상인들을 들 수 있다. 송파는 삼남지방의 상품이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하고 있었다.8) 이 지역 상인들은 상품유통경제의 발달과 확대를 배경으로 송파장을 전국적 장시로 발전시켜나가는 동시에 지역간의 상품가격의 차이를 이용한 매점매석 행위를 통하여 이윤을 추구하였다. 이들은 포천(抱川) 등지에서 어물을 사들이든지, 광주·이천·여주·용인(龍仁) 등 미곡산지에 내려가 현지의 곡물을 매집·판매하였다. 당시 여주와 이천 지역에서는 세도(細稻)가 많이 산출되었다. 이들 지역에서 재배된 주요 농산물의 서울 유입경로를 18세기 여주지역의 전세곡(田稅穀)을 상납하는 임운항로(賃運航路)를 통해 미루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강(驪江) 유역의 여러 포구를 통해 양근(楊根)의 대탄(大灘)을 거쳐 광주(廣州)의 두미강(斗尾江)을 지나 송파로 유입되어9) 도성의 장시에서 판매됨으로써 상업경제 활동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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