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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생산의 발달과 농업경영의 변화

조선후기 농업생산의 발달을 가져온 계기로 새로운 농법의 등장을 들 수 있다.1) 특히 이앙법의 전국적인 시행은 노동력 감소에 따른 1인당 노동생산성의 증대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수확량 증가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모내기는 직접 논에 볍씨를 뿌리는 직파법에 비해 제초작업의 횟수를 줄일 수 있는 이점을 지닌 농법이었다. 물을 채운 논에 미리 발아시킨 볍씨를 파종시킬 경우 한달 가량 지난 후부터 호미를 이용한 김매기를 추수 때까지 4~5차례 반복해야만 했다. 그러나 모내기의 경우 모판에서 볍씨를 키우면서 잡초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제초작업 횟수를 줄임으로써 직파에 비해 60~70% 정도 노동력 절감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모내기는 직파시보다 객토(客土), 퇴비(堆肥) 등 볍씨의 성장에 필요한 여러 가지 조건을 잘 조성해줌으로써 볍씨의 발아률을 증대시켜 생산량이 2배 이상 증가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모내기는 이모작(二毛作)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잉여 농산물 증대에 획기적으로 기여하였다. 동일한 경작지에서 1년에 두 번 벼와 보리·밀을 재배할 수 있었다.

또 하나 농업생산의 발달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기술적인 요소로 우리나라 기후와 풍토에 적합한 다양한 벼 품종의 개발을 들 수 있다. 특히 왜수리(倭水里)와 대초벼(大棗稻) 같은 품종은 모내기에 적합한 벼 품종으로 개발·보급되었으며, 경기도 양주군에 소속되었던 노원(蘆原)과 풍양(豊壤)에서 많이 재배되었다. 자급자족을 넘어선 잉여 농산물의 증대는 당시 활성화되던 장시에 상품작물로 판매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지방으로부터 유입된 많은 인구가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개성·대구 등 도시지역에 거주하면서 거대한 쌀 소비시장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곡상인들은 지역적·시간적 차이를 이용하여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쌀을 포함한 농산품의 상업적 가치가 높아지자 농업경영상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거론할 내용은 경영규모의 확대였다. 토지가 부(富)를 축적하는 생산수단으로 각광받게 되면서 양반, 상민(常民), 천민 구별 없이 모두 소유지 확대에 참여하였다. 18세기 이후 토지의 상품화가 진전되면서 토지의 많고 적음은 곧 부(富)의 다과(多寡)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부의 증대를 위해서는 토지 매득을 통한 경영규모의 확대가 필요하였다. 토지소유 확대 과정에서 양반지주들은 신분적 우위를 바탕으로 일반 백성들의 소유지를 사들이면서 자신의 토지를 넓혀나갔다. 일부 상민과 천민 가운데는 합리적인 농업경영을 통해 ‘경영형(經營型) 부농(富農)’으로 성장하는 계층이 생겨났다.

한편 일반농민들은 조세·대동(大同)·신역(身役) 등의 부세부담과 흉작 등의 외부적인 요인들로 인해 자신의 토지를 싼 가격에 내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자주 직면하였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주층이나 상인층 및 부농층은 토지를 매입하여 축적하여갔다. 특히 18세기 이후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토지의 상품화현상도 진전되었고, 토지매매도 자유로워져 화폐재산을 소유한 지주 및 부농과 상인들은 손쉽게 토지를 매입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한 지주제의 전국적인 확산은 자영농민층의 몰락과 소농경제의 위기를 동시에 초래하였다. 생활고로 토지를 팔고 소작인 생활을 하는 농민이 증가하였으며, 아예 토지가 없어서 전국을 떠돌며 유리걸식하는 농민의 수가 늘어났다.

두 번째로 주목되는 농업경영상의 변화는 늘어난 토지에서 시장에 내다팔 농산물을 재배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농업생산 활동이 늘어나고 상품유통경제의 유기적인 결합이 이루어져야 했다. 이 같은 양상은 다음의 저술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중환(李重煥)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와 정약용(丁若鏞)의 『경세유표(經世遺表)』에는 당시 상품작물을 재배하고, 이를 시세에 맞게 판매함으로써 재산을 모은 사례들이 제시되어 있다.2) 그리고 이러한 양상이 도시 주변이나 장시 주변에서 더욱 번성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당시 고수익을 얻을 수 있는 작물들이 자세히 소개되었다.

당대 거래된 대표적인 상품작물로 쌀과 콩, 보리와 조 등의 곡물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쌀은 전국에 걸쳐 상업적 농업을 위해 재배되었다. 미곡생산을 통한 더 많은 이윤획득을 위해 농민들은 밭을 논으로 바꾸는 반답(反沓)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여주·이천 지역의 농민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쌀을 일찍 재배하여 판매함으로써 수익을 올리기도 하였다. 곡물 다음으로 상품화된 농산물로 직류(織類)가 있으며, 주력 상품은 면포(綿布)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목면이 쌀보다 이득을 많이 올린다는 이유로 아예 전업하는 농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밖에도 18세기 이후에 이르게 되면 채소류와 약재류, 연초(煙草) 등이 대표적 상업작물로서 농민들 사이에 널리 재배되었다. 이와 관련한 세 번째 농업경영상의 변화가 나타났다.

상업적 작물 재배를 위해서는 계절에 따라 집중적인 노동력 투여가 필수적인 요건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경영규모가 커지면서 노동력 조달 문제가 농업경영의 성패를 좌우할 요소로 작용하였다. 양반지주와 서민지주, 경영형 부농층들은 농업자본을 들여 종자·비료·농구(農具) 등을 조달하였지만, 특히 노동자와 농우(農牛) 등의 노동력 조달이 큰 문제였다. 더 이상 가족 노동이나 노비 노동만으로는 큰 상업적 이윤을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토지를 많이 보유한 이들은 고가(雇價)를 지급하는 고용노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고용노동에는 임노동(賃勞動)·고지노동(雇只勞動)·고공노동(雇工勞動)이 있었다. 이전과 달리 고용노동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농촌과 도시에 많은 임노동자층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원래 자영농이거나 전호계층으로서 지주제 확대에 따라 토지를 상실하면서 영세농 혹은 무전농(無田農)으로 전락하여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처지였다. 특히 농민층 분해로 발생된 무전농은 도시로 진출하여 상업을 주업으로 하거나 도시의 노동자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광산에 들어가 광산노동자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수의 농민들은 삶의 터전인 농촌에 그대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노동력을 잘 활용한 계층으로 경영형 부농을 들 수 있다. 부농들은 기경(起耕), 파종(播種), 이앙(移秧) 등 여러 단계의 농사과정을 구분하여 일부 혹은 전 과정을 농한기에 미리 예약하고, 농번기에 이를 활용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무전농들은 상업적 작물재배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임노동자층을 형성했으며, 이것이 농업경영의 변화를 초래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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