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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부세체계의 변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농지가 황폐화하고1) 농민이 도산(逃散)2)하는 등 농업생산체계가 파괴되어 농촌경제는 파탄에 이르고 국가재정도 궁핍하였다. 아울러 전쟁 중에 창설된 훈련도감은 일반 군인들에게도 월급을 지급함으로써 국가의 재정부담을 증가시켰고3) 호란과 관련된 새로운 군대의 창설은 그러한 문제점을 가중시켰으며, 군다민소 및 방번수포(放番收布) 등의 폐단은 군역민의 고통을 더욱 심화시켰다. 더욱이 공물(貢物)·진상(進上)·잡물(雜物) 등 요역(徭役)은 민들에게 가장 큰 부담의 하나였는데, 공물과 진상의 경우 해당 민호(民戶)에게 해당 물자를 그대로 징수하거나 미포(米布)로 대납(代納) 또는 민호의 노동력을 징발하였다. 그런데 공납 물종(物種)은 지나치게 많고 진상의 회수가 잦았을 뿐만 아니라 수령은 공상(供上)을 빙자하여 빈번하게 요역을 징발하였고, 중앙 각사는 물론이고 지방 관아에서도 자체 수요를 위해 관내 민호로부터 장빙역(藏氷役)·생초(生草)·저(楮: 닥나무) 등 각종 잡물을 징수하거나 혹은 요역노동을 징발하므로 민들의 생활은 더욱 곤궁해졌다.4)

이에 정부는 개간이나 선진 농업기술을 수록한 농서(農書)의 보급 등을 통해 농업생산력을 향상시키고, 특히 부세체계를 개혁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면서 국가의 재정수입을 증대시키려 하였다. 먼저 군역의 부세화가 강화되는 상황 속에서 군포의 부담을 경감시키는 균역법을 시행하였고, 호패법(號牌法)·교생고강(校生考講) 등을 통해 군역기피를 방지하면서 천민과 승려를 군역에 동원하고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시행하여 군역담당자를 확충함으로써 군다민소로 인한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다.5) 다음으로 정부는 농민의 재생산을 보장하기 위한 진휼책으로 환곡제도를 실시하였는데, 환곡은 17세기 중엽 회록법(會錄法)이 실시되면서 부세로 전환되어갔고, 18세기 중엽 결세(結稅) 수입의 감소와 균역법(均役法) 실시에 따른 재정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부세화가 강화되었다.6) 특히 정부는 요역 대신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는 대동법을 시행하여 요역의 물납세화·전결세화를 꾀함으로써 방납(防納)의 폐해·공부(貢賦) 부담의 불균형을 시정하면서 중앙 및 지방 재정을 구제하려 하였다. 이러한 대동법의 실시는 시장에서 정부 수요품을 조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상품유통경제의 발달을 잘 알 수 있다.7)

한편 대동법이 실시되었지만 산릉역(山陵役) 등의 요역은 여전하였고, 임진왜란 이후 조지서가 파괴되고 현종 초년부터 지공(紙貢)만은 지방 군현에서 상납키로 하다가 1700년(숙종 26) 지방 군현과 공인이 절반씩 담당하도록 하는 가운데 사찰은 국가의 주요 지물(紙物) 생산소가 되었다. 그러한 현상은 조선후기 경기도 여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즉 여주의 민도 산릉역을 담당하였는데, 한 예로 효종(孝宗)의 능(陵)을 여주로 옮길 때 경기 백성들의 노역(勞役)이 심하였으므로 그 대가로 산릉역에 동원된 여주 등 5읍민의 대동미 3말 등을 감해준 바 있다.8) 아울러 1599년(선조 32) 여주의 장흥사(長興寺)는 자문지를 제조9)하는 등 조선후기에 지역을 담당하였다. 원래 사찰에서는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지물을 제조하였지만, 조선 초기까지는 지물을 공물로서 국가에 납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관영제지소인 조지서(造紙署)의 기구가 파괴되고 지장(紙匠)은 도산함에 따라 나라에 필요한 지물 및 사대외교용으로 사용되는 표전자문지(表箋咨文紙)의 제조에 어려움을 겪었고, 호란 이후 청(淸)도 막대한 양의 지물을 조공으로 요구하였으므로 지물 확보를 위한 대책이 필요하였다.10) 이에 정부는 사찰로 하여금 자문지를 제조하라고 하였고, 호란 이후 삼남에 지물을 분정(分定)하였다.11) 더욱이 대동법의 실시 후 지공(紙貢)을 부담하게 된 지방 관부는 지소(紙所)를 설치하여 지장이나 농민들에게 지물을 징수하려 하였지만 기존 저전(楮田)이 농토가 되어 그들에게서 지물을 얻기 어렵게 되자, 닥나무가 풍부하고 물이 깨끗하고 맑아 품질이 좋은 지물을 생산할 수 있는 사찰에 점차 지물을 떠맡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지방 관부는 지물을 제조시키고 헐값을 사찰에 지불하였고 군영·토호 등의 지물 수탈도 있었으며,12) 남한산성 등 산성 방어를 목적으로 차출된 의승(義僧)의 번상 비용 및 조지서 입역 등으로 인하여 조선후기 사찰은 잔폐(殘廢)되게 된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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