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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호란 이후의 복구사업과 향촌세력의 대응

임진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조선은 비록 멸망을 면했지만, 여러 분야에서의 모순이 심화되어 체제가 크게 동요하였다. 우선 군사 면에서는 임진왜란에서 군역 기피로 인한 군사력의 약화 및 일본군의 조총에 대한 대비부족 그리고 방어전술과 방어시설의 문제점 등이 노출되었고, 호란에서의 패배는 군사력 강화라는 과제를 더욱 부각시켰다. 경제 면에서는 요역(徭役)의 폐단은 물론이고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농업생산체계가 파괴되어 농촌경제는 파탄 상태에 이르고 국가재정도 궁핍하였으며, 호란과 관련된 새로운 군대의 창설과 군인수의 증가는 국가의 재정지출 증대와 함께 군다민소(軍多民少)를 초래하여 군역 담당자의 몰락을 심화시켰다.1) 사회면에서는 임진왜란으로 인한 노비문서·향안(鄕案)·호적의 소실 및 납속정책(納粟政策), 왜란과 호란에서 보여준 양반지배층의 무능 등이 양반지배층의 권위를 떨어뜨려 신분제에 기초한 사회질서가 동요하게 되었다. 한편 대외정치 면에서는 새로이 중국의 실세로 등장한 후금(後金)을 인정하느냐 않느냐의 문제에 봉착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은 비록 임진왜란 때 명(明)으로부터 재조지은(再造之恩)2)을 입었지만 후금과 명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취하여 슬기롭게 대처했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정권을 장악한 서인세력은 숭명배금(崇明排金)정책을 추진하다가 두 차례의 호란을 당하여 임진왜란 후의 국가재건과제를 한층 더 어렵게 하였다. 그리고 호란에서의 패배는 신분제·지주전호제를 이론적으로 옹호하였던 주자학(朱子學)에 대한 도전으로 표출되어 사상 면에서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이에 정부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여 조선왕조 체제를 복구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정책을 시행하였다.3) 우선 군사 면에서는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에 그 효용성이 입증된 기효신서법(紀效新書法)4)을 도입하여 훈련도감과 속오군을 창설하였고, 산성을 중심으로 방어시설을 정비하였으며 청군(淸軍)의 기병전술에도 대비하는 조치 등을 취하였다. 특히 영장제(營將制)를 시행하여 진관체제와 제승방략의 약점을 시정하면서 지방군사력을 강화하려 하였고, 경기도는 물론이고 강원도·황해도 일부 군인을 중앙군인 총융청·수어청·진무영 등에 편성함으로써 수도 외곽의 방어를 강화하려 하였다. 경제 면에서는 개간·농서(農書)의 보급·대동법(大同法) 등의 정책을 실시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재정수입도 증대시키려 하였다. 아울러 군다민소 및 군포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호패법(號牌法)·교생고강(校生考講) 등을 통해 군역기피를 방지하면서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하여 군역의 부담을 경감시키려 하였고, 천민과 승려를 군역에 동원하고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 등을 시행하여 군역담당자를 확충하려 하였다. 사회 면에서는 신분제 유지를 위해 향안(鄕案)을 복구하고 향약을 널리 보급하면서 도망 노비의 추쇄정책도 추진하였으며, 면리제(面里制)와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를 통한 하부조직의 정비와 영장제에 의한 토호통제 등을 통해 재지세력의 향촌지배를 약화시키면서 향촌에 대한 국가의 직접적인 지배력을 강화하려 하였다. 대외정치 면에서는 비록 효종대(孝宗代)에 명의 원수를 갚고 인조의 치욕을 씻겠다는 북벌론(北伐論)을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실제 외교상으로는 청의 실체를 인정함으로써 현종대 이후 대외정세는 점차 안정되어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사상 면에서는 양반과 지주 중심의 이데올로기인 주자학을 옹호하기 위해 주자학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키면서, 주자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주자와 다른 주장을 하는 경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처벌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한편 이렇게 왜란과 호란 후 추진된 정부의 재건책 중에서 ‘군역기피자의 색출·사천의 속오군 편성·공노비 추쇄·대동법의 실시’ 등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자신의 노비 및 군역 등을 기피한 민을 은닉하여 지주경영을 하였던 향촌 재지세력의 이익을 크게 침해하였다. 아울러 조선후기에 승려들은 산성 방어나 지역(紙役)에 동원되는 등 승역(僧役)이 강화되므로 승려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과중한 승역으로 인해 사찰은 몰락하게 되었다. 이에 향촌세력과 승려 등은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재건책에 대해 적극 대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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