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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서학의 전래와 충효열의 선양

기천서원과 고산서원에서의 추향 과정과 대로사의 창건과정을 볼 때 여주지역은 중앙정계에 진출한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여주 출신이거나 여주에 우거(寓居), 은거(隱居)한 인물들이 그대로 정착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부터라고 생각된다. 특히 17세기 이후부터는 그 수가 늘어나 정조대에는 여주가 큰 도회를 이루고 있었다. 즉 정조는 여주 능행차 때 여주의 모습에 대해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는 집안이 많이 있으므로 즐비하게 번화한 것이 서울과 다를 것이 없고, 마을이 부성(富盛)하고 인물이 선명(鮮明)한 것이 마치 저자 가운데에서 보는 것과 같으니, 서울로 통하는 큰 고을이라 할 만하다.”고 평하였다. 이에 대해 서유방(徐有防)이 “이 곳은 바로 상유(上遊)이고 땅도 기름지므로, 서울에서 벼슬사는 사람이 많이 이곳에 전장(田庄)을 두고 수확하거니와, 강을 따라 위아래에 볼 만한 누대(樓臺)도 있다.”고 답하였다.1) 여기서 말한 서울의 벼슬하는 사람들은 대개 서인-노론계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소수의 소론계와 남인계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1728년(영조 4) 발생한 이인좌의 난에서는 여주지역에서 연루된 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주모자 이인좌는 여주에 관계가 깊은 윤휴(尹鑴)의 손서(孫壻)로서 윤휴 가문은 이로 인해 여주에서 그 기반을 잃게 되었다. 또한 여주사람 신윤조(辛胤祖), 조상(趙鏛), 임서호(任瑞虎), 정석진(丁錫震), 조관규(趙觀奎) 등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이 연루되었고, 평안병사 이사성(李思晟)의 공초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주·이천·광주의 친구가 10여 인이라는 진술도 있다.2) 이 사건은 여주에서 노론 세력이 더욱 확대되고, 반대로 소론, 남인계는 지역의 기반을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여주지역은 천주교의 성지로 알려진 광주 천진암(天眞庵)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경기도 내에서도 서학이 빠르게 전파되고 있었다. 18세기 후반부터 더욱 급속하게 번진 서학은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을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조선사회에 퍼져나갔는데, 여주지역은 그 가운데서도 앞선 지역이었다. 1800년 3월 여주의 천주교인들은 부활절을 맞아 여주강변에 모여 축제를 벌였는데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에는 이 모습을 기록한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져 노론 벽파의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었고 권철신(權哲身)·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정약종(丁若鍾)·이기양(李基讓) 등과 함께 체포되어 추국을 받았다. 또한 함께 잡혀온 사람 가운데 조동섬(趙東暹)은 양근(楊根)과 여주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천주교를 널리 유포한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3) 조동섬은 양근 출신의 덕망 높은 한학자로서 권철신의 동생인 권일신(權日身)과는 친구 사이였다. 1800년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1801년 2월 12일 양근에서 다시 체포되어 서울 금부(禁府)로 이송되어서는, 2월 26일 배교(背敎)하여 30년 유배형을 받아 함경도 무산(茂山)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다시 천주교 신앙을 지키고 있다가, 1817년 친척인 조숙(趙淑)4)이 잡히자 다시 취조를 받았는데 신심이 더욱 깊어졌다. 그는 유배지에서 권철신의 조카 권기인을 도와 교황청(敎皇廳)과 북경(北京) 주교(主敎)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의 성직자 영입운동을 하다가, 30년 동안 귀양살이 끝에 1830년 92세로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경기 감사 이익운(李益運)이 도내의 사학 죄인(邪學罪人)을 조사하였으며 그 결과로 여주, 양근 지역의 인물 18명이 가려지게 되었다.5) 1801년 3월 이익운은 여주(驪州)에서 11인, 양근(楊根)에서 7인을 취초(取招)하고 사문(査問)한 후에 율(律)에 의거하여 감단(勘斷)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이 계청에 기록된 인물들의 혐의 내용과 처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중배(李中培),6) 임희영(任喜永),7) 유한숙(兪汗淑) 등은 신주(神主)를 세우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아니하여 사람의 윤리를 끊고 사형(死刑)도 마음속으로 여긴 것으로 결정되어 부대시참(不待時斬)하였다. 이들은 천주교 교리를 끝까지 지켰던 것이다.

원경도(元景道),8) 정종호(鄭宗浩),9) 최창주(崔昌周),10) 윤유오(尹有五)11)는 윤리를 멸절(滅絶)시키고 상도(常道)를 패몰(敗沒)시켜 인심을 현혹시켰으므로 일률(一律)에 관계되었으나 의정부로 하여금 상세하게 복심(覆審)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들 역시 천주교 교리를 끝까지 지킨 인물들로 모두 처형된다. 조운형(趙運亨)과 장지의(張志義)는 형신(刑訊)에 임하여 꾸며대어 말을 늘어놓았으나 준거하여 믿을 수 없으니, 관찰사로 하여금 엄중하게 형신하여 취초(取招)하도록 명하였는데 대개 배교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원경신(元景信)·정종순(鄭宗淳)·정종하(鄭宗河)·정원상(鄭元相)·정형상(鄭亨相)·이무(李茂)·조해(趙海)·장지인(張志仁)·김원숭(金源崇)은 모두 본읍(本邑)에 가두어 다시 확실하게 조사한 후에 헤아려 처분하도록 명하였다. 이 외에도 여주에서 체포된 예비 신자 조용삼이 경기 감영에서 형벌을 받던 중 옥중에서 세례를 받고 순교하였다. 이어 5월 24일에는 정순매가 여주 형장에서 처형되었고, 1801년 말에는 다시 과부 이씨와 친척 1명이 처형되었다

이에 의하면 적어도 사형에 처해진 이중배·임희영·유한숙과 원경도·정종호·최창주·윤유오 등의 7인은 확실하게 천주교를 믿고 서학의 전파에 힘을 기울였던 인물들이라고 하겠다. 신유사옥으로 타지방에 비해 여주지역의 많은 천주교도들이 연루된 것을 보면, 여주지역에서의 천주교 전래는 이보다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유일(尹有一)이 조선교회 전체를 위해 활동하였다면 여주지역의 천주교도 확대는 최창주에 의해 이루어졌다. 최창주는 여주의 첫번째 천주교 신자로 1791년 이전에 입교하였으며 이중배·원경도·이희영 등에게 교리를 전하게 된다. 윤유일은 여주의 점들12)에서 태어나 양근 땅 한강개로 이주해 살았으며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의 제자로서 1785년경에 천주교도가 되었다. 1789년 교회 밀사로 선발된 그는 2차례 북경에 다녀온 끝에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조선에 맞이하여 온 중심 인물이었다.13)

주문모 신부의 입국 이후 여주 가마골 출신의 정광수도 이 무렵에 입교하였으며, 그의 누이 정순매도 얼마 후에 교리를 배우고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어 1797년 가을에는 여주의 유명한 노론 집안 출신인 김건순(金建淳)이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김건순은 천주교도 강이천(姜彛天)과 교유하기를 원하였고, 김이백(金履白)은 항상 김건순의 집에 머물다가 그의 사령(使令)이 되어 강이천과 김여의 사이에 왕래하면서 천주교도가 되었다.

이렇듯 여주지역에서 천주교가 빠른 시기에 상당히 널리 전래되었다. 17세기 후반 이후 기천서원, 고산서원, 대로사 등의 건립과 추향 과정에서 노론세력의 아성으로 성장한 여주지역에서 특히 지벌(地閥)과 재화(才華)가 월등하고 여주에 살면서 산업(産業)이 풍족하였던 노론가문의 김건순이 천주교도라는 사실은 믿기지 않는다. 게다가 많은 사대부가 천주교를 믿 고 있었으며 천주교에 대한 신심이 가장 강렬했다는 것은 사실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충효를 앞세운 충의지사, 효자, 열녀 등에 대한 현양사업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여 서학의 유포를 막고자 하였다. 그것은 성리학-정학(正學)을 더욱 굳게 지키고 현양함으로써 서학-이단(異端)을 물리치기 위한 방책이었다. 조정의 정책적인 지원에 힘입어 여주지역에서도 19세기에 많은 인물들의 정려가 세워지거나 복호(復戶)의 혜택을 받았다. 통덕랑(通德郞) 원백손(元百孫)에 대한 복호조치14)를 시작으로 절충(折衝) 김재윤(金載潤)의 처 원씨(元氏)가 어사(御使)의 서계(書啓)와 경기도의 사계(査啓)를 거쳐 예조에서 복계(覆啓)함으로써 정문(旌門)을 세우게 되었다.15)

그리고 매 식년(式年)마다 예조에서 작성하는데 1812년의 ‘식년(式年) 경외(京外)의 충·효·열의 문서’를 정부(政府)에 보고할 때 열녀정려질(烈女旌閭秩)에 여주 고(故) 학생(學生) 이광모(李光模)의 처 박씨(朴氏)와 고(故) 사인(士人) 권순건(權順健)의 처 이씨(李氏) 등이 선발되었다.16) 1832년에는 효자정려질(孝子旌閭秩)에 여주의 고(故) 참봉(參奉) 구규석(具圭錫)이 선발되었다.17)

그러나 위와 같은 조정의 노력은 거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천주교는 1839년 기해년 박해,18) 1846년 병오년 박해,19) 1866년 병인년 박해20) 등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신부와 신자를 극형에 처하는 모진 박해를 당하면서도 그 세력을 확산시켜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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