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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대로사의 건립

기천서원과 고산서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여주지역의 유생들은 정조대에 들어 또 하나의 향사처(享祀處)로 송시열을 배향한 영당(影堂)을 건립하게 된다. 송시열은 1682년 수원(水原)에 있다가 영부사(領府事)로 숙종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올라가던 중 한강 강교(江郊)에 도착하여 상소를 올려 돌아갈 것을 아뢰고, 여주(驪州) 영릉(寧陵) 근처로 향하였다.1) 이때 송시열은 이광하(李光夏)의 집을 빌려 우거(寓居)하면서 효종 능침의 상설(象設)을 첨망(瞻望)하였다.2) 때로는 효종 능이 바라보이는 곳에 가서 밤늦도록 맨바닥에 앉아 눈물을 비오듯이 흘렸으며, 청심루에서 회상하는 시를 지었던 것이다. 이듬해 5월 송시열은 청주로 돌아갔다.

그 후 몇 년 뒤에 노론계의 인사들 사이에서 이곳에 선생을 제향하는 곳이 있어야 한다는 의론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731년(영조 7)에 정호(鄭澔), 민진원(閔鎭遠), 이재(李縡), 민우수(閔遇洙) 등이 창의(倡義)하여 주치(州治)의 남록에 영당(影堂)을 건립하게 되었다. 그런데 1741년(영조 17) 영조는 서원의 남설로 인한 폐해가 극심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서원 건립과 사향(私享)을 금지하고 창건된 지 오래지 않은 사우들과 영당을 훼철하게 하였는데 송시열을 배향한 여주의 영당도 훼철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주에서 송시열의 제향이 끊어지게 되었는데,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가 1779년(정조 3) 영릉(英陵)과 녕릉(寧陵)을 전알(展謁)하기 위해 여주로 행차하는 일을 맞이하여 송시열의 제향을 위한 사우 건립이 다시 추진되었다. 능 참배를 마친 정조가 청심루에 올라 송시열의 일을 거론하였던 것이다.3) 그 다음날 여주에 있던 김양행(金亮行)을 입시하게 한 자리에서 경기 유생 정운기(鄭雲紀) 등이 상소를 올렸는데4) 이 상소는 미리 준비해둔 것으로 보이며, 여주 유생들이 주축이었을 것이다.

이때 정조는 비답을 내려 특별히 시행하도록 윤허하였다. 정조는 효종과 송시열의 관계를 고려하고 여주를 비롯한 경기지역 사림의 청원을 허락하여 사우를 창건하게 한 것이다. 정조는 1785년(정조 9)에 대로사로 사액(賜額)하며 당시의 심정을 연신(筵臣)에게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5) 정조는 청심루(淸心樓) 위에서 송시열의 시(詩) “달이 잠기도록 앉아 있으니 능(陵)의 잣나무는 컴컴한데, 어디에 꿇어앉아 아뢸지 알 수 없네(坐久月沈陵栢暗 不知何處跪陳辭)”라고 한 구절을 보고 송시열의 마음을 상상하며 불현듯 서글픈 생각이 들었는데, 그곳에 향사(享祀)할 곳이 없을 수 없고, 또 많은 선비들의 상소로 인하여 특별히 사우(祠宇)를 지으라고 명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우의 건립은 곧바로 진행되지 않았던 듯 6년 뒤에 가서야 사액이 이루어진 것이다.

정조는 송시열 배향 사우의 낙성(落成)에 맞춰 편액(扁額)을 ‘대로사(大老祠)’라 하여 걸게 하였다. 정조는 ‘대로(大老)’의 뜻을 일러 “옛부터 ‘천하 대로(天下大老)’란 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연전에 송시열의 문집(文集) 가운데 뛰어난 구절(句節)을 모아 편집하면서 그 책의 제명(題名)을 『대로일고(大老逸稿)』라 하였으니, 대체로 이에서 따온 것이다.” 하였다. 송시열을 조선 천하의 대로(大老)로 한껏 현양한 이름인 것이다. 그리고 정조는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으로 하여금 대로사와 주변 풍광을 도사하게 하여 병풍으로 만들게 하여 곁에 두고 조석(朝夕)으로 신람(宸覽)하였던 것이다.6)

대로사의 창건은 상당히 파격적인 일로 여겨진다. 서원과 사우의 건립은 숙종대에 극성을 이뤄 영조 때에는 지나친 남설이 사회문제로 급부상하였으며 급기야는 1751년 더 이상 서원건립을 금지하는 조치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영조의 금제(禁制)를 어기면서까지 대로사 창건을 허락하여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을 현양한 것이다.

이 같은 정조의 조치는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 기인한 크다고 할 수 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기까지 김상로(金尙魯)·홍인한(洪麟漢) 등 노론의 심한 견제 속에 힘겹게 왕위를 계승하였던 것이다. 즉위 후에는 세도를 위임한 홍국영(洪國榮)을 역시 노론 벌열(閥閱)의 견제로 내쳐야 했다. 이에 정조는 어떻게든 노론의 지지를 이끌어 낼 필요가 있었으며, 대로사는 그에 따라 선택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노론세력을 무마하고 역으로 송시열의 언행에 반하는 인물에 대한 견제도구로 삼으려 했던 정조의 의중이 함께 작용하여 대로사가 창건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대로사 창건 이후 여주지역에서는 노론 색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으며, 여주 유생들의 중심서원으로 부상하여 강학(講學)의 기능까지 다하게 되었다. 또한 청심루와 대로사는 왕릉 다음으로 중요한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1825년 전직 현령(縣令) 오언의(吳彦誼)가 여주의 청심루(淸心樓)에 올라가 술에 만취(滿醉)되어 송시열을 욕하다가 나중에는 송시열이 쓴 액판(額板)을 두들겨 부수어 조각조각 땅에 흩어버린 사건이 발생하자7) 청심루는 송시열이 영릉(寧陵)을 존모하는 뜻을 부친 곳이며, 부서진 누액(樓額) 또한 송시열의 글씨로서 이를 욕보인 오언의는 극악무도한 행동을 저지른 것으로 처리되어 종성부(鍾城府)에 유배되었다. 또한 1839년(헌종 5)에는 효종이 승하한 지 3주갑이 되는 해로서 대신을 영릉에 보내어 작헌례를 섭행할 때 송시열을 배향한 대로사에도 치제(致祭)하게 하였다.8) 여주에서 송시열과 관련된 청심루와 대로사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조치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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