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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고산서원

기천서원이 건립된 지 100여 년이 지난 1686년(숙종 12)에는 여주 사림의 공의로 이존오(李存吾)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원우를 창건한 일이 있었다. 고산서원은 1708년 여주의 유학(幼學) 신각(申慤) 등이 상소(上疏)하여 사액을 청하여 서원으로 승격되었는데1) 이때는 기천서원에 이식을 추향한 해이기도 하다.

신각은 이존오가 고려 왕조에서 정언(正言)을 지낸 여주 사람으로서 10세 때에 강창시(江漲時)를 지어 “넓은 들은 모두 물에 잠겼는데, 고산(孤山)만이 홀로 항복하지 않았도다[大野皆爲沒 孤山獨不降]’라고 읊었는데, 고산은 곧 여주를 말한 것이며, 많은 선비들이 이존오의 사당(祠堂)을 지어서 숭봉(崇奉)한다고 하였다. 이존오는 1366년 우정언이 되어 신돈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공민왕(恭愍王)의 노여움을 샀지만, 이색(李穡) 등의 옹호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된 뒤 공주(公州)의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울분 속에 지내다가 죽었다.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 등과 교분이 두터웠던 인물로 여주지역에서는 정몽주와 버금가는 위상의 인물로 평가되어 제향을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서도 이존오의 충절을 인정하여 사액을 허락하였다.

이후 고산서원은 이존오만을 향사하여 오다가 1826년 예조참의를 지낸 조한영을 추향하기에 이른다. 조한영의 추배는 정조 이후 여주 유생들의 청원상소가 계속된 결과로도 생각할 수 있으나 대로사의 건립과 같은 시기에 여주 유생(儒生) 이성익(李聖翊)이 상소하여 조한영의 추배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2) 이성익은 상소에서 영조의 말을 인용하여 “척화(斥和)한 여러 신하에게 사제(賜祭)하고 연석(筵席)에서 ‘김상헌(金尙憲)·조한영(曹漢英)은 삼학사(三學士)와 생사(生死)는 비록 다르지만 그들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의(義)를 지킴은 실로 다름이 없다. 두 사람의 이름을 삼학사의 다음에 넣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며, 삼학사와 김상헌을 향사(享祀)하는 곳은 한둘에 그치지 않은데 조한영만 홀로 빠졌으니 진실로 결여된 은전(恩典)이라 하였다. 따라서 조한영의 구택(舊宅) 부근(附近)에 숙종(肅宗)께서 ‘고산서원(孤山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내린 이존오(李存吾)의 사우(祠宇)가 있으니 여기에 조한영을 추배(追配)하는 은전(恩典)을 거행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정조는 그런 이유로 모두를 추향(追享)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일단 윤허하지 않았다.

사실상 조한영은 향사되기에 적합한 인물이다. 그는 1640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수륙군(水陸軍)의 원병을 청하는 동시에 원손(元孫)을 볼모로 심양(瀋陽)에 보내라고 요청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린 충의지사(忠義志士)였다. 이 사실이 청나라에 알려져 1641년 심양으로 잡혀가 심한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으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옥중에서는 김상헌의 시문집인『설교집(雪窖集)』의 편찬을 도우는 등 척화파(斥和派)의 일원으로 활약하였으며, 1642년 심양에서 의주 감옥으로 옮겨졌다가 풀려났던 것이다.

정조는 표면적으로 대로사를 창건하여 완성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또다시 여주지역에만 추향하는 일이 생기면 전국에서 이 같은 청원을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반려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로사가 노론계 당색의 사우로 건립되는 마당에 조한영의 가계가 노소분기 이후 주로 소론계로 활약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한영 추향 문제는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으로 비춰질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여주의 소론계 유생들은 뜻을 굽히지 않고 조한영의 추향을 끈질기게 청원하였으며 마침내 1826년에 그 뜻을 이루게 된다. 여주 사족(士族)들은 좌의정 이상황(李相璜)을 통해 “문충공(文忠公) 조한영의 곧은 충성과 높은 절의(節義)는 진실로 천하에 말할 수 있고 오는 세상에 풍성(風聲)을 세울 만하니, 마땅히 사우(祠宇)에 배향되어야 한다.”고 주청하여 추향이 결정된 것이다.3) 아무튼 조한영의 고산서원 추향은 여주 유림의 공의로 이루어지게 되었으나 여주지역 유림은 노론의 주도 속에 소론세력이 한편에서 견제하는 형세를 이루면서 각 문중의 정치적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19세기 이후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주축이었던 충문공(忠文公) 김조순(金祖淳)을 향사하기 위해 안동김씨 문중에서 세운 사우가 1833년 건립되자마자 ‘현암서원(玄巖書院)’이라 사액한 것4)을 보면 서원의 사액과 추향문제는 중앙에 진출한 각 문중이 가진 정치권력의 비중에 따르는 것이었으며, 또한 지방 사림의 공의를 빙자하는 문중의 움직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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