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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기천서원

기천서원은 1580년(선조 13) 마암(馬巖)에 세웠던 것인데,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주세붕(周世鵬)이 1543년(중종 38) 경상도 순흥(順興)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세운 후 경기도지역에서는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이 1564년에 세워지고, 이후 1568년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이 세워졌다. 그 후 양주의 도봉서원(道峯書院)과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이 1573년, 용인의 충렬서원(忠烈書院)이 1576년에 건립된 것을 보면 기천서원은 경기지역에서 상당히 이른 시기에 건립된 서원이라 할 수 있다.

기천서원은 창건 당시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봉향하다가 1611년(광해군 3) 여주 유림에 의해 복원되면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치재(耻齋) 홍인우(洪仁祐)를 추향(追享)하였다. 1625년(인조 3)에는 ‘기천(沂川)’이라 사액되어 여주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발돋움하였다. 그 뒤 1661년(현종 2)에 수몽(守夢) 정엽(鄭曄)·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나재(懶齋) 홍명구(洪命耉)를 추가로 배향하였고, 1708년(숙종 34)에 택당(澤堂) 이식(李植)을 추가 배향하였다. 그리고 순조 때에는 기천(沂川) 홍명하(洪命夏)를 추가함으로써 선현(先賢) 제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경기지역 대부분의 서원이 율곡학파(栗谷學派)의 인물을 배향하였던 데 비해 볼 때 기천서원의 배향인물을 살펴보면, 16~17세기에는 동인-남인계 인물을 주로 배향하였다가 뒤에 서인계 인물들을 배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김안국과 이언적은 영남 남인계의 학통을 이룬 인물들이고, 홍인우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이다. 16세기 말 17세기 초의 정치적 분위기에서 이들의 배향은 여주지역이 가지는 지리적 위치로 볼 때 상당히 의미 있는 점이라 하겠다. 남한강 수계(水系)를 따라 충주(忠州)를 거쳐 영남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여주는 교통의 요지로서 영남인(嶺南人)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던 곳이다. 따라서 여주지역의 유림들과의 교류도 용이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김안국은 여주부근에 우거하며 후진양성에 힘쓰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여주지역에는 동인-남인계 인물들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남인으로서 현종대(顯宗代)에 대사헌 병조·예조 참판 등을 지낸 조수익(趙壽益)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외손(外孫)으로 어머니를 여주에 모셔두고 왕래하면서 관직에 종사하였으며,1) 윤선도(尹善道)와 조경(趙絅)을 신구(伸救)하다가 당시 무리들의 비위를 크게 거슬려 심한 탄핵을 입은 이후부터는 여주의 강가에 은거하였다.2) 그 외에도 많은 남인계 인사들이 여주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1661년 기천서원에 추향(追享)된 인물을 살펴보면, 서인계의 정엽, 홍명구와 남인계의 이원익이 함께 제향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서인계의 정엽은 1599년(선조 32) 여주목사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푼 적이 있고,3) 광해군 집권기에도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으나 폐모살제(廢母殺弟)의 혼탁한 정치상황에서 여주의 별장에 은거하여 올바른 몸가짐을 한 인물로 평가되었다.4) 역시 서인이었던 홍명구는 여주 출신으로서 1636년 평안도 관찰사로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자모산성(慈母山城)을 지키다가,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근왕병(勤王兵) 2,000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김화(金化)에 이르러 적의 대병을 만나 싸워 적 수백 명을 살상한 끝에 전사한 충신이었다. 반면 남인이었던 이원익은 광해군 초기에 다시 재상이 되었으나 정사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사직하고 여주에 물러가 있었다.5) 이원익은 여주에 은거한 것 이외에도 인조반정 때 서인계에서도 영의정으로 추대하여 출사를 강력히 원할 만큼 조야(朝野)에 신망이 두터웠던 것6)이 추향된 원인이라 할 것이다. 이들이 함께 추향된 것은 마치 서인과 남인이 연합하여 일으킨 인조반정의 정신을 재현하는 듯한 상황이다.

다시 말하면 여주지역의 유생들 가운데 서인계와 남인계가 함께 공조하여 3인을 함께 추향한 것으로서 여주지역에 서인계 세력이 차츰 성장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18세기 이후에는 서인계의 인물인 이식과 홍명하가 추배(追配)되었을 뿐이다. 1708년 추향된 이식은 광해군 집권기에 혼탁한 정치현실을 피해 임숙영(任叔英)·정백창(鄭百昌) 등과 함께 여주(驪州), 광주(廣州)의 강변에 은거해 살면서 시와 술로 서로 교우하였던 적이 있다.7) 이식이 여주에서 생활한 이후 그의 아들인 이단하(李端夏) 역시 여주에 근거를 마련하였다.8) 이식의 추향에는 여주에서 이단하를 비롯한 후손들의 영향력과 함께 서인세력이 증대된 결과로 보인다. 이단하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제자로서 제2차 복상(服喪) 문제로 숙청당한 의례제신(議禮諸臣)처벌의 부당성을 상소하다가 삭탈관직(削奪官職) 되었다가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풀려나와 홍문관제학,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을 지낸 정계의 실력자였다. 그의 후손들은 여주에 근거를 두고 여주지역 사족(士族)들과 교류가 잦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천서원에 추향된 홍명하는 여주 사람으로서 홍명구의 아우로 영의정을 지낸 명신이다. 홍명하의 추향은 1800년(정조 24) 영의정 이병모(李秉模)의 주청으로 거의 확정 단계에 이르렀으나 갑작스런 정조의 서거로 늦춰지게 되었다. 이병모는 홍명하가 “사림(士林)의 중심 인물로서 대의(大義)를 실현하는 일을 극력 도왔으며 그의 업적과 모범적인 일들이 남달리 월등하여 선배 명인 석사들도 그의 부조(不祧)를 논의한 일이 있었다.”고 하여 기천서원에 추향할 것은 주청하였다. 그 후 홍명하의 추향은 사학유생(四學儒生)의 상소로 인하여 이루어지게 된다.9) 이때 대신들은 홍명하의 학문적 연원을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송시열에게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곧 기천서원이 중앙 노론세력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 여주지역에도 서인-노론 세력이 공론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으로는 중앙정계에 진출한 문중 차원의 지원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식이나 홍명하의 예는 그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하며, 고산서원의 조한영(曺漢英) 추향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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