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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서인·노론 정권기 여주목 향촌세력의 동향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 「팔도총론(八道總論)」에서 경기지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경기도는) 나라를 세운 이래 300년 동안 성명문물(聲名文物)이 갖추어진 곳으로 유풍(儒風)을 크게 떨치고 학자가 배출되어 엄연히 소중화를 이룬 곳이다. 양주, 포천, 가평, 영평은 동교(東郊)를 이루고 고양, 적성, 파주, 교하는 서교(西郊)가 되는데 이 두 교외는 모두 땅이 메마르고 백성들의 빈곤함으로 살 만한 곳이 적다. 사대부로서 집안이 가난하고 권력에서 멀어지면 삼남으로 낙향한 자는 능히 그 집안을 유지하지만 근교로 나온 자들은 더욱 빈한하고 쇠패해져서 한두 세대를 거친 후에는 대부분 품관이나 평민으로 전락해버리는 경우가 많다.”1)

이중환의 표현대로 경기지역은 중앙정계와 직결되어 있는 정치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권력의 향배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는 경기지역 사족의 모습을 그려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중환은 소론계(少論系) 인물로서 『택리지』가 그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그의 주관적인 표현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여주에 대해서는 사대부집이 많아 대를 이어 산다고 하였다. 읍내에 있는 청심루(淸心樓)는 강산의 풍치가 대단히 좋다고도 하였다.

경기지역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제자들이 학맥을 이루어 동서분당 이후 대개 서인계로 자리하였다. 그리고 인조반정 이후 서인계가 중앙정계를 장악하였기 때문에 서인계 핵심 인물들이 경기지역에 대부분 그의 생활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한양과 자신의 근거지에 마련한 별서(別墅), 전장(田庄)을 오가며 생활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여주지역은 여흥 민씨(驪興閔氏), 안동 김씨(安東金氏), 덕수 이씨(德水李氏), 원주 원씨(原州元氏), 반남 박씨(潘南朴氏), 남양 홍씨(南陽洪氏) 등 노론계 핵심가문의 유입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곳이다. 이들은 중앙정계에서 물러났을 때는 그 지역의 서원을 중심으로 정치적 활동을 하였으며 지역의 유생들과도 상당한 교류를 하였다. 또한 동문이나 친인척 간에는 빈번한 왕래가 이루어졌다. 여주지역도 마찬가지여서 중앙에서 활동하던 정치계의 거물들이 많이 있었으며, 이들을 찾아오는 사람들 또한 청심루나 신륵사(神勒寺)에 들러 시 한수를 읊기도 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여주지역이 서인계(西人系)로 굳어진 것은 아니었다. 조선후기 여주지역에 건립되었던 기천서원(沂川書院)에는 동인(東人)-남인계(南人系) 인사들이 배향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여주지역의 당색이 남인계에서 서인(西人)-노론계(老論系)로 옮겨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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